최근 관심이 모아지는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FO)는 세대를 거치면서 진화를 거듭해 현재는 자산관리를 넘어 차세대 교육과 사회공헌에까지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본 패밀리오피스의 진화 과정을 통해 한국 시장의 미래를 점쳐본다.


유럽의 패밀리오피스는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 등 격변의 상황에서 태어났고, 미국의 패밀리오피스는 산업 성장 가운데 신흥 부유층이 탄생하면서 시작됐다. 반면 일본 패밀리오피스의 전근대적 기원은 에도시대(1603~1868) 미쓰이, 미쓰비시 같은 재벌의 자산을 관리하던 조직인 ‘오모토카타’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일본 재벌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해체돼 현재는 ‘계열’이라는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데, 이 계열사의 내부 조직인 자산운용사가 외부 전문 집단의 도움을 받아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의 패밀리오피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패밀리오피스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데는 사회적, 제도적 이유가 있다.


유럽·미국보다 늦은 성장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패밀리오피스 시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과 함께 부유층 고객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총 세대수 중 불과 1.6%에 지나지 않는 부유층(순 금융자산 1억~5억 엔 미만 보유)과 초부유층(순 금융자산 5억 엔 이상 보유)이 개인 금융자산의 약 20%를 보유하고 있고, HNWI(High Net Worth Individual: 주택 제외 자산 100만 달러 이상 보유자) 인구가 미국(307만 명)에 이어 세계 2위인 182만 명이었다(2011년 현재).

일본에서 최초의 프라이빗뱅킹(PB) 붐은 1998년이다. 시티그룹의 PB부문이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금융자산 1억 엔 이상 되는 분에게! 바라던 자산 운용의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처음으로 게재했는데 이를 본 부유층 고객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부유층으로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얻은 이유는 첫째, 1997년경에 일본의 장기신용은행, 야마이치증권, 산요증권 등 일본 금융기관의 도산으로 일본 금융기관에 대한 불신감 고조, 둘째, 24시간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가동 및 증권, 신탁은행 등 계열 금융기관과 해외 거점을 이용한 시티은행의 서비스 강화, 셋째, 투신 상품을 은행에서도 판매하도록 허락한 정부의 규제 완화, 넷째, 당시로서는 상식을 벗어난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광고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는 일본계(노무라증권) 및 외국계 금융기관(UBS·메릴린치·시티)들이 부유층을 대상으로 PB와 PWM(Private Wealth Management)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독립된 사업부문이나 고객 데스크를 별도로 두지 않고 리테일이나 소매부문에 합쳐서 운영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는 PWM이지만 서비스 내용으로는 패밀리오피스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고쿠사이(國際)증권은 2000년에 투자고문회사인 ‘고쿠사이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한 후 미국의 대표적인 패밀리오피스와 제휴해 일본에 미국식 패밀리오피스의 자산관리 운용 노하우를 도입하겠다고 표방했다. 기존의 금융기관들이 판매자의 입장에서 같은 계열 금융기관의 상품을 소개, 판매하는 접근 방식이었다면 고쿠사이증권의 패밀리오피스는 구매자인 고객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상품을 소개하는 등 자산 운용 대책과 리스크 관리, 상속 대책, 부동산 관리, 사업 승계, 세무·법무법인과의 연계 등 고객 자산 전체를 일원관리(一元管理)하는 것을 지향했다.


2007년 정점에 달한 PB 비즈니스
일본의 부유층 및 초부유층이 보유하는 순 금융자산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증가하면서 이와 함께 PB 비즈니스도 2007년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후인 2009년부터는 순 금융자산이 감소했고, 이후 2011년까지는 횡보 수준을 보였다. 이 기간 동안 UBS, 크레디트스위스(CS) 등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일본 시장에서 PB 비즈니스 철수와 재진입을 반복했다. 2000대 초반 의욕적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했던 HSBC는 사업 부진으로 2012년에 패밀리 비즈니스를 철수하고 CS가 이 부문을 인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서 부유층 고객들은 대형 은행과 외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게 됐다. 금융기관들도 2007년까지의 영미식 PB 비즈니스 중심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일본식 PB 비즈니스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유럽 부유층의 자산이 대부분 유동자산화된 반면에 일본 부유층의 자산은 부동산과 자사주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일본 부유층의 47%, 초부유층의 67%가 기업 경영자다. 그리고 이들의 사업과 자산을 승계하는 데는 높은 상속세가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 일본식 PB 비즈니스 모델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OPINION] 일본 패밀리오피스의 성장 비결
일본의 금융기관이 부유층 대상으로 패밀리오피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는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금융 자문 서비스’에 대한 대가 지불이 정착되지 않았고,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투자, 세무, IB 등에 모두 전문화된 인력을 확보하기도 힘들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층의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포괄적인 자산관리에 대한 니즈는 계속 증대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패밀리오피스의 형태가 싱글패밀리오피스(SFO)에서 멀티패밀리오피스(MFO)로 진화해 왔으나, 일본의 경우는 후발주자로서 고도의 노하우와 정보기술(IT) 시스템, 우수한 인재 등의 제공에 따른 코스트를 분산하기 위해서는 대형 금융기관이 MFO를 먼저 도입할 것을 적극 추천하고 있어 향후 이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객 입장에서는 보유 자산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과 부유층의 경우 국적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해외에 거점을 둔 부티크형 패밀리오피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향후 이들의 일본 진출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스위스에 본점을 두고 도쿄와 싱가포르에 거점을 둔 패밀리오피스가 일본의 상장, 비상장 오너 패밀리의 자산 약 2000억 엔을 운영하면서, 패밀리오피스 포럼 등을 통해 일본 부유층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김종태 KDB대우증권 미래설계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