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설계사도 울고 가는 ‘약관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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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암호문인지, 의학용어 사전인지 전혀 해독 불가다. 애매한 표현이나 규정 탓에 분쟁이 끊이지 않지만, 보험업계의 ‘쉬운 약관’을 위한 개선 의지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지침서의 ‘사망 및 질병이환의 분류번호 부여를 위한 선정 준칙과 지침’에 따라 C77-C80[이차성 및 상세불명 부위의 악성신생물(암)]의 경우 원발성 악성신생물
(암)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원발부위(최초 발생한 부위)를 기준으로 분류합니다.”

암보험 약관의 첫 장에 등장하는 ‘보험금 지급 관련 유의사항’에 관한 설명이다. 과연 이러한 유의사항을 읽고,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일반 보험 가입자는 물론 설계사들도 해독(解讀)이 어려운 보험약관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개발원은 생명·손해보험사 상품을 대상으로 한 ‘제14차 보험약관 이해도 평가’ 결과를 지난 10월 발표했다.

생보사 중에선 미래에셋생명, 신한생명, 푸르덴셜생명, 동부생명, 하나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ABL생명 등이 ‘우수’ 등급을 받았다. 반면 업계 1위인 삼성생명은 ‘보통’ 등급에 해당하는 60점대 점수에 그쳤다. AIA생명과 흥국생명은 60점 미만인 ‘미흡’ 등급을 받았다. 손보사 가운데는 80점 이상의 ‘우수’ 등급을 받은 곳이 없었다. AXA손보, BNP파리바카디프손보 등 두 곳만 70점대인 ‘양호’ 등급을 받았다.

보험개발원은 지난 2011년부터 1년에 두 번씩 ‘보험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해 왔다. 해를 거듭하면서 개선되고 있다지만, 거의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난해한 보험약관으로 인해 불완전판매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정작 보험을 판매하고 설명할 의무가 있는 보험설계사조차 약관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당신의 보험금을 의심하라>의 저자이자 보험약관 전문 교육기관인 ‘WHY’의 윤용찬 대표는 “보험 회사의 교육은 판매 교육과 상품 교육에 집중돼 있을 뿐 약관이나 보험금 청구에 관한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개발원의 김석영 연구위원과 김세중 연구위원은 ‘보험약관 이해도 평가 결과와 의미’라는 보고서를 통해 “보험약관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첫 관문으로 분쟁이나 민원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만큼 약관 이해도 개선의 중요성을 내부적으로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미국과 일본이 각각 ‘가독성 테스트(Flesch)’와 ‘평가표’를 보험사 자체 평가 규정으로 강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자체 평가 시스템 규정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보험 설계사도 울고 가는 ‘약관의 함정’
‘묻고, 따져라’ 약관 모르면 호구(?)

#1. 박명수(가명) 씨는 건강검진을 통해 갑상선암이 림프절에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았지만 그나마 2009년에 가입해 둔 암보험이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보험의 암 진단금은 갑상선암 600만 원, 림프암 3000만 원이었다. 그런데 M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니 “갑상선암 진단금 600만 원만 지급할 수 있다”는 답변이 왔다.

이는 이차성 및 상세불명 부위의 악성신생물(암)의 경우 원발성 악성신생물(암)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원발부위(최초 발생한 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규정에 근거를 둔다. 갑상선암처럼 소액암에서 시작돼 고액암으로 전이된 경우 최초 발생한 소액암만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의미다. 암보험의 손해율이 높아지자 보험사들은 2011년경부터 이 같은 내용을 보험 상품의 특별약관에 추가했다. 문제는 박 씨의 경우 2009년에 해당 암보험에 가입했음에도 보험사는 2011년에 변경된 내용을 적용해 보험금 지급액을 축소하려 했던 것. 결국 박 씨와 보험사는 법정 다툼을 벌였고, 1·2심에서 박 씨가 모두 이겨 3600만 원의 보험금과 기타 지연손해금을 받았다.

#2.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최지성(가명) 씨의 아들은 부친을 보내고 ‘두 번’ 울었다. 황망한 사고도 안타까운데 아버지가 생전 가입해 놓은 종신보험의 보험료가 당시 두 달 밀려 실효 상태에 있었던 것. 당시 보험료를 납부하면 다시 계약을 유지(부활)할 수 있던 보험이었지만, 아버지는 보험료를 내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최 씨는 우연히 보험 전문가에게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해당 보험이 실효 통지를 받았더라도, 등기(해지 확정 안내문)를 받은 날로부터 2주 이내이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최 씨는 “보험설계사로부터 실효된 보험의 보험금은 못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억대의 보험금을 못 받을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험은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사 시 보험금을 받기 위해 가입한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보험의 계약서라 할 수 있는 ‘약관’을 보는 일이 좀처럼 없다. 약관 및 세부 규정을 모르니 어떤 때 보험금을 청구해야 할지도 모르고, 막연히 보험금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다가 예외 규정 때문에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송승용 희망재무설계 대표는 “보험 가입 당시 설계사가 가입자에게 약관에 대해 알려주게 돼 있지만, 실제 책 한 권 분량의 약관을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어렵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중요한 사항만 간추려 쉽게 정리한 요약 약관 등을 제공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약관의 해석이나 적용 여부를 두고 보험 가입자와 보험사 간 마찰을 빚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약관에서는 보험 계약자가 제출한 진단서와 보험사 측의 자문 소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보험사와 소비자가 함께 제3의료기관을 정하고 그 자문에 따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보험사가 특정한 의료기관에 자문을 구해 보험금을 축소하거나 거절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의료자문이나 손해사정에서 불공정 논란이 거세다.

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생명·손해보험사 의료자문 현황’(2014~2017년 상반기)을 분석한 결과, KDB생명은 전체 1892개의 의료자문 중 1492건(78.9%)을 특정 5개 병원에 의뢰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보생명, 현대라이프, MG손보, 롯데손보 등도 각각 특정 5개 병원에서 전체 의료자문 중 50% 이상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용찬 대표는 “보험 소비자가 제출한 병원의 진단서 등에 보험사의 의견이 다를 경우 다시 조사할 수 있지만, 보험사가 일방적으로 특정 자문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공정한 결론을 얻기 어렵다”며 “보험사와 소비자가 함께 제3의료기관을 정하고 협의할 수 있다는 약관을 소비자와 설계사도 모르기 때문에, 보험사가 약관을 무시하는 관행이 횡행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보험 설계사도 울고 가는 ‘약관의 함정’
손해사정 역시 객관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손해사정은 보험 계약자가 질병, 사고 등을 겪어 보험금을 받기 전에 질병이나 사고의 수준과 책임을 따져 보험금을 결정하는 업무를 말한다. 보험금 산정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중립성이 필수적이다. 현재 보험업법에는 자기 손해사정은 금하고 있지만, 보험업법 시행령에 단서조항을 둬 자회사를 통한 손해사정을 허용하고 있다.

이영희 법무법인 미담 손해사정사는 “대형 보험사들이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기 때문에, 자회사로서는 보험사의 눈치를 보는 손해사정이 이뤄지기 쉬운 구조다”라고 말했다.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7대 대형 생보사 및 손보사는 손해사정 업무의 86.2%를 자회사에 위탁하고 있다. 삼성, 한화, 교보 등 빅 3 생보사는 99% 이상이다.

그렇다면 보험금을 청구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보험설계사는 “보험금 지급은 약간의 문구에 따라 ‘아’ 다르고 ‘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며 “고객센터는 보험사 관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험 소비자의 편에서 해석을 도와줄 수 있는 보험설계사에게 문의하고, 중대한 사안일 경우 손해사정사나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