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닮은꼴 일본의 신탁 활용은

[한경 머니 기고=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고령화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에 세계 최초로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최고 신탁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의 신탁 활용법은 국내 금융사에 있어 미래를 대비하는 예습과 같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늘 ‘일본은 어떻게 됐는데’라는 결론 아닌 결론에 도달할 때가 많다. 물론 영국, 미국, 스웨덴, 프랑스에 대한 자료도 중요하지만 법과 제도가 비슷한 일본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인구 비중이 7%인 고령화 사회에서 14%인 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속도 면에서도 우리는 일본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반면 영국 47년, 미국 72년, 스웨덴 85년, 프랑스 115년 등 주요 선진국들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그 변화에 대처하고 수용해 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18년이 걸린 한국과 같이 일본 역시 24년 만에 고령 사회로 진입하면서 급격한 변화에 대처해 간 과정을 알고 이해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금융소비자들의 고민도 다양해지고 있다. 금융의 공급자인 금융기관들도 변화의 흐름을 잘 읽고 선제적인 대응 전략이 필요해졌다. 금리와 상품 중심에서 금융소비자가 바라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함께하는 다양한 서비스 제공이 중요해진 것이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가지려면 어찌 해야 할까.

◆일본 신탁은행서 한국 미래를 보다

오랜 고민 끝에 일본을 배우고 체험하는 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KEB하나은행은 일본 최고의 신탁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이하 스미트러스트)과의 전략적 제휴를 바탕으로 일본 현지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일본 사회의 변화 흐름을 이해하고 금융의 대응 자세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미트러스트가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개방한 현지 3박 4일간 연수는 일본 금융제도와 변천사를 배우고, 재무컨설턴트를 직접 만나고, 스미트러스트의 여러 상품 라인업 교육을 통해 앞서가는 신탁 유형을 경험한 소중한 기회였다. 또 버블 붕괴 후 금융시장의 정체를 개선하고 런던, 뉴욕에 버금가는 금융시장으로 키우기 위한 일본의 금융 시스템 개혁 과정을 듣게 됐다.

더불어 금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금융 시스템 개혁, 새로운 금융 법제와 규정의 필요성도 살펴보고, 일본의 가장 큰 사회 변화인 초고령화에 따른 금융의 대응을 이해하는 시간도 가졌다. 특히 다양한 금융 수요에 호응할 수 있는 생활금융의 플랫폼으로서 신탁의 기능 및 일본의 신탁 변천사와 실생활에 활용되는 신탁 상품과 서비스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고령화 닮은꼴 일본의 신탁 활용은

◆중(重)고령화와 대상속 시대

일본이 장수국가라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의하면 2016년 기준으로 일본의 85세 이상 남성의 여명은 6.4세, 여성은 8.4세다. 인간은 장수를 바라지만 초고령 사회에서는 꽃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시밭길도 함께 하고 있다. 급속하게 고령화가 돼 가는 우리 사회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일본의 모습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일본에서는 일생의 ‘라이프 이벤트’ 중 최종 이벤트이자 100%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벤트로 ‘상속 이벤트’를 설명하고 있다. 또 상속 이벤트가 쓰나미처럼 몰려올 시기를 가리켜 ‘대상속 시대’라고 칭한다.

일본의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앞지른 것은 2006년부터다. 같은 해 일본은 전체 인구 중 노인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화 시대에 세계 최초로 진입했다. 일본에서는 고령자 중에서도 65~74세 고령자를 ‘전기 고령자’라고 하고, 75세 이상의 고령자를 ‘후기 고령자’라고 칭하고 있다.

한편 2018년 3월 후기 고령자 수가 1770만 명으로 전기 고령자 수를 추월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고령자를 떠받치는 부담이 커지는 이 상황을 가리켜 ‘중(重)고령화’가 도래했다고 표현했다.

고령자들이 늘면서 금융 자산을 포함한 자산 보유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8년 3월 기준 일본 총무성의 ‘전국 소비 실태조사’를 보면 일본은행(BOJ)이 발표한 약 1829조 엔에 달하는 일본의 개인 금융 자산 중 60% 이상을 60세 이상이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고령자들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는 배경이 이해됐다.

반면 고령자들은 은퇴 후에도 의료비 및 장수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금융 자산 보유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과거 버블 붕괴에 따른 부동산 가격의 급락 경험도 금융 자산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는 결과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금융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령자들의 고민도 복잡해진다. 자신의 노후 생활 또는 본인 사후 배우자의 존엄한 생활 유지를 위한 보호 장치, 분쟁 없는 상속 문제 해결, 손자녀를 위한 교육비 지원 고민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자녀나 손자를 위한 재산의 세대 이전은 누구나 관심을 갖는 문제가 됐다.

그런데 기존의 예·적금 기능만으로는 이런 복잡한 고령자들의 요구를 담아낼 수 없고 새로운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가진 신탁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의 신탁제도는 1905년 러·일 전쟁 직후 전후 복구를 위해 투자 자금이 필요했던 일본이 ‘담보부사채신탁법’을 제정한 것이 기원이 됐다. ‘금융제도개혁법’ 제정(1992년)으로 주요 금융 회사의 신탁 자회사를 통한 신탁 업무가 허용되고 신탁대리점제도 도입 및 비금융 회사의 신탁업 허용, 신탁 범위의 확대와 2006년 전면적인 ‘신탁법’ 개정을 통해 유언대용신탁 같은 다양한 형태의 신탁제도도 도입됐다.

신탁 규모도 늘어났다. 일본신탁협회의 신탁재산의 현황을 보면, 신탁재산 총액은 2018년 9월 말 기준으로 1156조2000억 엔에 달하며 2017년 말 대비 6.9%(74조7000억) 증가했다.
신탁의 유연성을 살린 새로운 신탁 상품도 증가했는데 상속 설계 목적의 유언대용신탁과 후견제도지원신탁, 교육자금증여신탁, 결혼육아지원신탁 등이 대표적이다.
고령화 닮은꼴 일본의 신탁 활용은

◆유언장 쓰는 문화와 ‘유언신탁’ 발전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신탁 서비스는 ‘유언장 보관 및 집행 서비스’다. 이는 신탁은행에서 유언장 작성 지원부터 유언장 보관 및 유언 집행까지 지원하는 신탁 서비스다.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신탁은행 등에 유언서 보관 및 유언 집행을 부탁해 두면 상속인 간의 갈등을 줄일 수 있어 활용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다. 일본신탁협회 자료에 의하면 2018년 9월 기준으로 유언장 보관 업무와 집행 서비스를 합해 13만2741건을 기록하고 있다. 단순히 유언장 보관만 맡기는 건수는 오히려 줄고 신탁은행으로 하여금 집행까지 맡기는 사례는 증가하고 있다 한다.

일본에서 2006년 ‘신탁법’ 개정 이후 등장한 ‘유언대용신탁’은 상대적으로 꾸준히 활용된 유언신탁에 비해 최근 빠르게 증가했다. 2012년 이후 증가해 2018년 상반기까지의 신규 수탁 건수 누계는 약 16만4000여 건을 기록했다.

유언대용신탁의 장점은 재산을 보유한 위탁자가 생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관리·운용하고, 사망 이후 상속 방법과 사후 수익자의 재산 수령 방법도 미리 결정해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치매 등으로 인한 노후 대비 재산 관리와 사후 미성년자 또는 장애인을 위한 재산 관리 방법에 유용한 제도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서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해 현재까지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치매 등을 대비한 ‘후견제도지원신탁’

일본은 성년후견제도가 2000년 도입된 이후 피후견인의 재산에 대한 크고 작은 유용 사고 등 재산 관리에 대한 문제가 노출됐다. 이에 일본최고재판소가 피후견인의 재산 관리 방법을 신탁에 의해 관리되도록 추진해 마련된 서비스가 바로 후견제도지원신탁이다.

신탁계약의 체결부터 계약의 변경 및 해지가 가정재판소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후견인조차 신탁된 재산에 대해서는 임의로 인출할 수 없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일본에서 2012년 2월에 출시된 이후 2018년 9월까지 수탁 건수가 2만1000건을 넘어섰고 최근 3년간 일본신탁협회 자료를 보면 2015년 대비 약 4배 가까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치매환자들의 성년후견제도 신청 비중이 높아 후견제도지원신탁은 치매환자들의 재산 보호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가 인용한 다이이치(第一)생명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치매 질환자들이 보유한 금융 자산은 전체 가계 금융 자산에서 2017년 7.8%에서 2030년 10.4%로 커진다 하니 신탁 관리의 필요성은 점점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2013년 7월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됐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한정후견심판이 결정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성년후견제도를 알게 됐다. 우리도 일본과 같이 피후견인의 실질적인 후견 지원을 위해서는 안전한 재산 관리 방법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발맞춰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서 2016년 12월 성년후견지원신탁(치매안심신탁)을 선보였고 2017년 1월 1호 계약이 성사된 후 많은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최근에도 후견 관련 상담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고령화 닮은꼴 일본의 신탁 활용은

◆젊은 세대로 자산 이전 돕는 신탁

‘교육자금증여신탁’은 일본 고령층의 자산을 젊은 세대로 이전시키는 방안으로 2013년 세제 개편과 함께 신설된 신탁이다. 교육자금증여신탁은 손자 등의 교육 자금으로 조부모 등이 현금을 신탁한 경우 1500만 엔까지 비과세되는 신탁이다.

교육자금증여신탁은 고령자들이 보유한 금융 자산을 교육비 부담이 큰 신세대에게 이전함으로써 사회 전반적으로 소비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익자가 30세가 되면 신탁이 종료되며, 남은 재산에 대해서는 증여세가 부과된다. 20만 건 이상의 계약이 체결되는 등 고령층의 관심 증가로 교육비 지원 목적자금으로 젊은 세대로의 자산이 이전됐다.

고령자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젊은 세대에게 이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2015년 세제 혜택 방안을 마련했다. ‘결혼·육아자금의 일괄 증여에 따른 증여세 비과세 조치’다. 이에 따라 2015년 4월에 ‘결혼·육아지원신탁’이 등장했다.

◆기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제도

상속이 발생하면 상속인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미리 준비가 잘 돼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문제부터 상속인들 간 재산 분할도 머리 아픈 문제다. 상속인 수가 많거나 상속인 중에서 해외에 살고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고객들의 유산 정리 업무 지원을 위한 별도의 전문가 그룹을 배치하고 있다. 바로 재무컨설턴트 제도다.

사망자 수의 증가와 준비되지 않은 채 발생하는 상속 문제는 가족들에게 좀 더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전문 기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됐다. 스미트러스트의 재무컨설턴트는 2018년 10월 기준 251명이고, 2020년 3월 말까지 300명 체제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에서도 현재 유언대용신탁에 따른 부가 서비스로 유산 정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센터 내 변호사, 세무사, 부동산전문역, 프라이빗뱅커(PB)가 한 팀을 이뤄 상속에 관한 전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품이 아닌 ‘안심’을 제공하는 유산 정리 업무 제도가 정착되길 기대해본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