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가드닝 스케줄_2월 이야기

요즘 TV 드라마에서 ‘화학적 반응’을 뜻하는 케미스트리의 준말로 ‘케미’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가장 순수하게 식물과 사람의 케미가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봄이 시작되는 입춘, 비가 내리면 싹이 튼다는 우수가 있는 2월은 그 ‘케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다.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집필실 앞에 매달아 놓은 감이 곶감이 되고 있다. 식물이 달콤한 열매를 만드는 이유는 안에 씨를 담기 위해서고, 그 씨가 동물에 의해 멀리 퍼져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집필실 앞에 매달아 놓은 감이 곶감이 되고 있다. 식물이 달콤한 열매를 만드는 이유는 안에 씨를 담기 위해서고, 그 씨가 동물에 의해 멀리 퍼져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엌 창문 밖에 지난겨울 토종 감을 따놓은 뒤 바쁜 일에 밀려 잊고 말았다. 몇 달 지나는 사이에 홍시가 돼 터진 줄도 몰랐는데, 얼마 전부터 아침밥을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서면 온 몸이 잿빛 깃털인 새 두 마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홍시를 한 입 베어 무는 장면이 보였다. 몇 번을 훔쳐보다 이름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직박구리였다.

겨울이 되면 새들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식물들의 열매가 주된 식량이 되는 새들은 나무의 열매가 사라지는 겨울을 이겨내기가 아주 힘들다. 오죽했으면 사람들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산새가 사람이 살고 있는 부엌까지 왔을까. 보는 이의 평화로운 마음과는 달리 새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 셈이다. 그런데 직박구리가 먹는 홍시를 잘 보면 새만큼이나 영리하고 치열한 감나무의 생존도 보인다. 감나무가 달콤한 감을 만드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씨를 옮겨줄 동물을 불러오기 위함이다. 과육은 맛있게 먹어주되, 씹히지 않는 딱딱한 씨는 멀리 버려주면 적당한 곳에서 싹을 틔우겠다는 식물의 번식 방법이다.
땅이 녹으면 식물들은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초록의 잎과 꽃을 틔워낸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는 식물의 씨를 뿌려주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땅이 녹으면 식물들은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초록의 잎과 꽃을 틔워낸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는 식물의 씨를 뿌려주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씨앗 준비보다 더 중요한 흙을 돌보는 일
요즘 TV 드라마에서 유난히 소통이 잘 되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두고 서로 간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케미스트리의 준말인 ‘케미’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식물과 동물의 관계야말로 진짜 드라마틱한 케미가 숨어 있다. 주목이라는 식물은 뿌리부터 잎까지 독성이 가득하다. 물론 먹을 일도 없겠지만 일정량 이상을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유일하게 독이 없는 부분은 씨앗을 감싸고 있는 과육 부분인데(과학적으로 과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젤리처럼 몰랑거리고 맛도 달콤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새와 동물들은 과육은 먹지만 가장 독성이 강한 씨는 다시 뱉어낸다. 이 뱉어낸 씨를 통해 주목은 좀 더 멀리 자손을 퍼트리는 셈이다. 그런데 식물의 씨가 가장 빨리,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는 이유는 새와 동물보다는 바로 인간에 의해서다. 물론 특정한 식물을 원하는 목적으로만 번식시키지만 인간이 없다면 지구에 이토록 많은 식물이 번식되기도 힘들다. 그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식물과 사람의 케미가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2월은 절기상으로 보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4일에 있고, 비가 내리면 싹이 튼다는 우수가 19일에 한 번 더 있다. 2월에 봄이 시작된다는 소리인데, 실상 절기가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내놓고 보면 절기만큼 정확하게 계절을 알려주는 알람도 없다. 정원 일도 결국 식물을 키우는 농사일과 같아서 절기가 매우 중요하다. 싹을 틔울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씨앗을 준비하는 일이 급선무다. 올해 화단에는 어떤 식물을 심어볼까? 잎이 나는 시기와 모양, 꽃이 피는 때와 색상 등을 고려해서 식물을 선정해야 한다. 그 선정에 맞춰 씨앗을 파는 곳을 알아두고 미리 주문해 놓는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더불어 아직은 추위가 매서워도 흙 관리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정원사가 잊지 말아야 할 격언 중 하나가 “흙은 식물을 돌보고 정원사는 흙을 돌본다”다. 1년간 흙은 대부분의 영양분을 식물에게 뺏기고 겨울을 맞는다. 겨울 동안 땅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마치 동태가 덕장에서 황태로 변하듯이 보송보송해진다. 겨울 추위가 정원에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식물의 뿌리가 침투하기 좋은 환경은 만들어도 식물에게 필요한 영양분 자체를 만들어낼 순 없다. 그래서 농부들은 부지런히 봄이 오기 전 양질의 퇴비를 만들고, 식물을 심기 2, 3주 전 이 퇴비를 원래의 흙과 잘 섞어준다. 정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필요하다. 만약 땅이 너무 얼어 있다면 일단 퇴비를 위에 얹어주고, 언 땅이 녹았을 때 흙과 함께 섞어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준비가 얼마나 잘 돼 있는가가 한 해 정원의 풍요로움을 짐작하는 척도가 된다. 사실 이맘때쯤 우리는 전통적으로 띄운 메주로 장을 담그는데 이 장 맛에 따라 1년 음식 맛이 좌우된다는 것도 이상할 정도로 정원의 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2월은 꽃을 피우는 식물은 없어도 1년의 식물 농사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밑 작업이 이뤄지는 때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2월은 땅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준비 시간이다. 땅이 얼었다면 퇴비를 먼저 부어주고, 땅이 녹았을 때 기존의 흙과 섞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2월은 땅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준비 시간이다. 땅이 얼었다면 퇴비를 먼저 부어주고, 땅이 녹았을 때 기존의 흙과 섞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틔움’을 맛보는 최고의 즐거움
온실이 있다면 씨를 뿌려 싹을 틔우는 일도 이때쯤이다. 일반적으로 땅에 직접 씨를 뿌릴 수 있는 시기는 4월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그전에는 찬 기운에 씨가 얼어서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생명을 다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씨의 싹을 틔워주는 공장이 따로 있고, 우리가 시장에서 사는 식물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키워낸, 혹은 아예 꽃망울까지 맺힌 식물이다. 하지만 단단한 씨의 봉인이 해제돼 새잎이 돋아나는 그 ‘틔움’을 맛보는 일은 정원 일의 즐거움 중 최고가 아닐 수 없다.

열을 낼 수 있는 온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상황이 안 된다면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집 안 창가도 괜찮다. 화분에 원하는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비닐 봉투에 넣어 묶은 뒤 햇볕을 쐬어주면 낮 동안 미니 비닐하우스 효과가 일어나 온실 없이도 싹을 틔우는 일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밤에는 창가의 온도가 다른 곳보다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에 따뜻한 곳으로 옮겨주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씨를 심은 뒤 대부분은 2주 후쯤부터 싹이 올라오는데 이 싹을 잘 키워 풍성하게 성장하면 원하는 화단으로 옮겨 심어주면 된다.
열매는 씨를 품고 있는 과육을 포함한 전체를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이 열매를 먹고 씨를 뱉어주지 않으면 씨는 자연스럽게 과육 부분을 말린 뒤 씨를 땅에 떨어뜨린다.
열매는 씨를 품고 있는 과육을 포함한 전체를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이 열매를 먹고 씨를 뱉어주지 않으면 씨는 자연스럽게 과육 부분을 말린 뒤 씨를 땅에 떨어뜨린다.
양팔을 다 벌려도 안아지지 않는 아름드리나무도 한 알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 이 씨앗 속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지는 과학적으로도 아직 제대로 풀린 게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지구의 생명체들은 바로 여기에서 모두 탄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는 식물의 잎과 꽃에 매료돼 이 신비한 씨앗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이고 근본인 이 씨를 2월, 이 계절에는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다. 아직 한 번도 내 손으로 직접 씨를 심어 싹을 틔워본 적이 없다면 이번엔 이 기적을 한 번 체험해봐도 좋을 듯하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는…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정원 문화를 꿈꾸며 정원 관련 전문 글쓰기와 정원 설계를 함께 하고 있다. ‘오 가든스(Oh Gardens)’의 대표이며, 저서로는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영국 정원 산책’, ‘소박한 정원’ 등이 있다.


기획 박진영 기자 | 글 오경아 가든 디자이너·작가 | 사진 임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