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이불 삼아 길거리에서 자고 먹는 돈키호테지만 그가 보여준 평화와 우애, 사랑이 넘치는 삶에 대한 기억과 기대는 추종자 산초를 비롯해 모두의 마음을 흔든다. 그 누구라도 돈키호테로 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일러스트 정재환
일러스트 정재환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삼척동자도 안다는 익숙한 소설이다. ‘돈키호테 같다’는 말은 약간의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정적인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돈키호테’ 하면 떠오르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니, ‘풍차’, ‘정신이 이상한’, ‘산초’ 등을 말한다. 짐작컨대 돈키호테가 거인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풍차에 돌진하는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또 그 장면에서 ‘정신 나간’ 주인을 보필하는 산초의 유쾌하면서도 해학적인 어떤 모습이 동시에 겹쳐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돈키호테 같다’고 하는 말은 시쳇말로 분위기 파악 못한 채 ‘나대는’ 인물형으로까지 확대된다.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류의 성서’로 언급되는 작품이 아닌가.


나이 50줄 시골 귀족의 모험
한국에서 ‘돈키호테’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 100년 전의 일이다. ‘레미제라블’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소개되고 읽혀졌다. 다만 ‘레미제라블’과 경우가 다른 것은 그 의미가 전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채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만 전승됐다는 점이다. ‘돈키호테’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얘기됐음에도 그 의미가 생략된 채 해학적 코드로만 남은 것이다. 분명한 건 많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400년 전, 그러니까 꽤 오래전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1605년 작품이다. 당시 스페인은 일명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황금시대’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영토 확장을 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페인은 이러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근대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여러 역사적 사정이 반영된 결과이지만, ‘돈키호테’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의미가 조금은 해득되기도 한다. 근대 르네상스의 빛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읽지 못한 것. ‘돈키호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이 난다.

우선, ‘돈키호테’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르반테스가 직접 등장해서 이 소설은 자신이 쓴 게 아니라 톨레도의 어느 시장에서 주운 이야기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일일이 적고 리얼리티를 부여하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이를테면 톨레도의 잡화점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상인이 아라비아 책 한 권을 팔면서 직접 번역까지 해서 읽어주더란다. 알고 보니 ‘돈키호테’의 일부. 세르반테스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며 자세히 옮겨 놓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이토록 세세하다. 일종의 알리바이인 셈. 별 얘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의 검열을 의식한 가공인 셈이다. 시골 귀족의 이상야릇한 모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부러 위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돈키호테’의 원제는 ‘재기발랄한 향사(鄕士) 돈키호테 데 라만차’다. 스페인 라만차 지방의 활달한 시골 귀족 돈키호테라는 뜻. 그런데 이 시골 귀족의 취미가 하필 ‘책 읽기’였다. 그것도 이미 때 지난 소설인 ‘기사도 소설’에 푹 빠진 것. 그러던 어느 날 ‘기사’의 길을 가리라 결심한다. 결심이 서자마자 마을 인근의 농부인 산초를 설득해서 같이 길을 떠나게 된다. 물론 이미 나이 50줄에 들어선 돈키호테의 모험을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책을 치우기도 하고, 설득도 하지만 그럴수록 돈키호테의 집념은 더해간다. 산초도 처음부터 마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가진 것도 선택할 것도 별로 없었던 산초는 모험의 길 끝에 영주를 시켜주겠다는 돈키호테의 허랑한 말을 붙잡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산초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이러저러 해서 산초와 돈키호테의 모험이 시작된다. 돈키호테는 기사가 응당 지녀야 할 ‘의’와 ‘충’의 감각을 상상적으로 체화한 채로 모험을 떠난다. 그런데 그 길이 시작되자마자 나타난 거대한 풍차. 돈키호테는 이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며 돌진한다. 산초는 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약간 어리둥절하다. 조심스레 돈키호테의 행동에 훈수까지 두며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키호테는 기사의 위용을 한껏 뽐내고 나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은근슬쩍 꺼내놓는다. 이제 펼쳐질 모험에서도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라는 일종의 암시의 말이다.


불행한 자들에게 자유와 사랑을
그러나 여느 여행이 그러하듯 길 위에서 보이는 인간사는 다채롭다. 서아메리카 전부가 스페인 땅이라고 일컬어지던 시기임에도, 그렇게 영화롭던 시절임에도 길 위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구구절절 가지각색이다. 신문도 TV도 없던 시기였기에 돈키호테가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돈키호테’ 발간 당시 길거리에서 낄낄거리는 사람들은 대개 ‘돈키호테’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놀라운 흡인력과 재미를 준다. 이를테면 돈키호테가 길을 가고 있는데 강제노역을 하러 끌려가는 죄인들을 보게 된다. 이때 돈키호테는 ‘불행한 사람을 구하는 게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이들을 도와주리라 맘먹는다.

그리고 끌려가는 연유를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사랑 때문에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는 사람’, ‘뚜쟁이 노릇을 해서 잡혀가는 사람’, ‘아가씨들을 희롱한 죄로 끌려가는 사람’ 등이다. 돈키호테가 보기에 이들의 행동은 하나같이 죄가 아니다. 뚜쟁이 일만 하더라도 ‘멋진 공화국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사랑과 연애가 자유롭지 않던 시절, 마땅히 국가가 무엇을 지켜주어야 하는지 말하고 싶었던 돈키호테는 이들의 구구한 사연을 듣는 것으로 할 말을 대신한다. 물론 이 죄인들의 쇠사슬이 풀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돈키호테의 모험은 막장 드라마 이상이기는 하다.

돈키호테의 여행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가진 리얼한 삶의 빛깔이다. 저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이 없다. ‘돈키호테’는 모험 속에서 이 무수한 삶의 이야기들이 황당무계한 희극적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찌됐든 돈키호테의 모험은 우스꽝스럽지만 결국 불행한 자들에게 자유와 사랑을 안겨주는 이야기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야기로 따지면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암행어사 박문수’ 정도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다행인 것은 돈키호테의 이 모험이 가진 의미를 조금은 찬찬히 보려는 재해석된 콘텐츠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맨오브라만차’는 196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의 몇몇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중에서 돈키호테의 내면을 잘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이를 테면 알돈자라는 여인은 산초에게 왜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지 묻는다. 산초는 이 물음에 아주 해맑은 얼굴로 “I really like him”이라고 답한다. “내 손톱이 하나씩 쏙 빠진다고 해도 그가 참 좋다”고 말한다. 영주를 시켜준다고 약속해서가 아니라 돈키호테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하늘을 이불 삼아 길거리에서 자고 먹는 돈키호테지만 그가 보여준 평화와 우애, 사랑이 넘치는 삶에 대한 기억과 기대가 산초를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돈키호테가 자기 맘을 온통 드러내며 부르는 노래가 있다. ‘Impossible dream’. 돈키호테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불가능한 꿈’의 첫 구절은 ‘그 꿈, 이룰 수 없어도’로 시작된다. 이 노래 속에는 돈키호테의 내면 안에 도도하게 흐르는 강직한 약속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돈키호테,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산초처럼 ‘좋으니까’라는 노래가 절로 떠오른다. 그 누구라도 돈키호테로 살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어쩌면 지금까지도.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