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의 리더십을 개발하는 것이 창업자의 가장 큰 도전 과제라면 두 번째 도전 과제는 회사에서 잘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창업자들은 은퇴 시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회사 떠나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족기업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창업자들은 왜 회사 떠나는 걸 어려워하는 것일까?
창업주들이 은퇴 계획을 세우지 않는 까닭은?
한 중견기업의 창업자인 A회장은 몇 해 전 아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은퇴해서 이제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은퇴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평생을 일에 묻혀 사느라 취미도 없고, 가깝게 교류하는 친구도 없다. 따라서 대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는 자녀들에게 종종 섭섭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전 안중에도 없어요.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만 얘기하고 나한테는 아무도 얘기를 안 해요. 집에서 내가 왕따가 된 기분이 들어요. 자기들이 지금 누구 덕에 잘 먹고 잘사는데…. 괘씸해요.”

그래서 A회장은 아직 현업에 있는 다른 경영자들에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회사에 남아 있으라고 조언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해법은 없는 걸까.

다양한 집단관계 속 ‘페르소나’ 돌아봐야
그리스어인 ‘페르소나(persona)’는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에는 화장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가 분장을 하는 대신 자신이 맡은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즉, 노인 역이면 노인을 상징하는 가면, 천사 역이면 천사를 상징하는 가면을 써서 관객들이 쉽게 역할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맞게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며 ‘역할인격’이라고 하는데, 이는 집단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나’를 뜻하기도 한다.

가령, 한 사람이 회사에서는 사장이지만, 집에서는 남편이며 동시에 자녀들에겐 아빠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동창회에 가면 친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등 그에 맞는 페르소나가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평생을 회사 일에 매달려 살아온 창업자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외부인격, 즉 페르소나가 잘 발달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는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삶의 대부분을 회사에 바쳤기 때문에 집에서는 권위적이고 무서운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살아가고, 오로지 경영자라는 역할에만 매달려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면 현실은 기대와 많이 다르다. 자신이 세운 기업이라는 왕국에서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던 창업자로서의 페르소나를 벗어나면서 바로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은퇴 후 경영자로서의 페르소나가 무너지는 순간, 자신을 지탱할 ‘역할인격’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예전같이 대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역할인격, 즉 페르소나를 돌아봐야 한다. 많은 경영자들이 일주일에 80시간 이상을 회사 일에 매달리지만, 정작 은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체계적인 승계 계획을 가지고 있는 기업 또한 아주 드물다. 더구나 대부분의 경영자나 가족들은 승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러다 보니 승계 계획뿐만 아니라 자신의 은퇴 계획을 세우는 경영자는 많지 않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승계하려면 사전에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자신이 일생을 바쳐 회사를 이루어 놓았는데 정년이 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자기가 주인이었던 곳에서 점차 영향력과 통제권을 잃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경영자들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인식한다면, 정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은퇴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이 은퇴를 어렵게 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오너경영자들이 은퇴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업자들에게 “은퇴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면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를 얘기한다. 그런데 가족기업 전문가들과 컨설턴트들이 경험적으로 얻게 된 오너경영자들이 은퇴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회사 일을 떠나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는 경영자들은 회사일 외에는 삶에서 다른 의미나 즐거움을 거의 찾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이면에는 권력을 잃는 것, 사회에서의 권위를 잃는 것, 친구나 회사와 연결된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존경심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둘째, “은퇴할 경제적 여력이 안 된다”라는 답은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흔한 이유다. 자신의 재산보다 회사의 재정적 안정을 더 중요시하느라 충분한 은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경우 노후 생활에 필요한 자금이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조달돼야 하기 때문에 은퇴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때로는 은퇴 자금을 충분히 모았더라도 여전히 재정적으로 불안함을 느껴서 은퇴를 미루는 경우도 있다.

셋째, “회사는 내 인생이다”라고 답하는 경영자들은 대체적으로 가족이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일평생 회사 일에만 몰두하고 산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생 회사에 혼신을 다해 헌신했기 때문에 회사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고 열심히 일하지만 조직의 현재 상태와 앞날을 염려한다. 그래서 어떤 경영자들은 사회적 정년이 훨씬 넘은 80대 심지어 90이 넘어서까지 은퇴하지 못한다.

넷째,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라고 말하는 경영자들의 경우 대체로 이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은 스스로 회사를 믿고 맡길 만한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거나, 조직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부터 성장기에 이르는 동안 창업자들은 자신이 직접 시장을 예측하고, 제품의 생산과 판매, 자금조달, 재무관리, 그리고 임직원 선발까지 모든 부분을 책임지고 전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해 왔다.

사업 초기에는 이런 방식이 효율적이지만, 기업의 규모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창업자가 너무 작은 일까지 직접 챙기다 보면 장기적 사업 방향 같은 핵심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업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업자가 여전히 모든 일에 관여하고 통제하는 것을 ‘창업자의 함정’이라고 한다.

창업자의 함정을 벗어나라
‘창업자의 함정’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못하는 회사를 만들어 놓는다. 만약 어떤 회사가 ‘창업자의 함정’에 갇혔다면, 그것은 창업자의 사망과 함께 기업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 승계를 앞둔 중소기업 창업자들 중 “내가 죽으면 회사가 잘 굴러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죽으면 후계자나 임원들이 자신을 대신할 만한 역량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리더가 ‘창업자의 함정’에 갇힌다면 효율성이 떨어져 회사가 다음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채 세대교체를 하게 되는데, 만약 후계자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경우가 아니라면 ‘창업자의 함정’은 ‘가족의 함정’으로 발전돼 회사의 생존까지도 위협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업승계를 앞둔 중소기업의 경영자라면 보다 전문적인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 후계자에게 위험을 떠넘기지 않는 경영 체질로 만들어 놓고 승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스스로 경영 시스템이나 정책을 개발하고 정착시키는 것이 어렵다면, 경영자 코칭이나 컨설팅 등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또한 후계자가 없다거나 자녀들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려고 하는 등 은퇴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경영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편안하게 은퇴하려면 아래 4가지가 안정돼야 한다. 분야별 질문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해보고 이에 따른 계획을 세워보자.
창업주들이 은퇴 계획을 세우지 않는 까닭은?
행복한 은퇴를 위해 준비할 것들
이 밖에도 일반적으로 은퇴라고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존재감의 상실 등을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지위’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즉 ‘사무실을 어디에 둘 것인가?’, ‘명함에는 어떤 타이틀을 넣을 것인가?’, ‘전화는 누가 받을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에 대한 고민보다 훨씬 심각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경영자들은 미리 이러한 것들을 예상하고 개인비서를 고용한다거나, 회사에서 떨어져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내는 등의 방법으로 준비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은퇴 후의 만족스러운 삶이 보장될까?

무엇이 성공적인 은퇴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취미생활이나 여행 등을 즐기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이 경우 특별히 사회활동이나 새로운 일을 찾기보다는 무엇이 가장 삶을 활기차고 즐겁게 할 수 있을까를 찾으면 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개 휴식이나 취미활동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은퇴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기회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2가지 경우 모두, 회사를 떠나기 전부터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준비를 잘해 둔다고 해도 은퇴를 앞두고 심리적 어려움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사람들은 상실감보다는 기대와 기쁨을 안고 회사를 떠날 수 있다. 그러려면 은퇴 후 삶에 대한 준비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은퇴 후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은퇴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대부분의 퇴직 경영자는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은퇴 후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자신의 실무 경험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뒤 틈틈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컨설팅이나 자문을 하기도 하며, 다른 회사의 사외이사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또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로 비영리단체를 돕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구, 부부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목표를 갖기도 한다. 이렇게 은퇴 후에도 활동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스스로 성공적인 은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미리 충분히 고민해보고, 대비해야 한다.
창업주들이 은퇴 계획을 세우지 않는 까닭은?
통상 은퇴한 뒤에도 이전 못지않게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건강하다. 그러나 ‘이 나이에 내가 뭘 하겠어’라고 말한다면, 활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경영 계획을 수립하는 방법이나, 재무나 인사 등 실무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나 의사소통 방법 등 리더십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외부 모임이나 세미나 등에 참석해 사업 외의 유용한 기술을 배우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네트워크도 넓혀야 한다.

김선화 가족기업연구소장
일러스트 김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