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ance 제 143호 (2017년 04월)

신탁, 고령화 시대 자산관리 다시 쓴다



[한경 머니=한용섭 기자]고령화·저금리 시대에 신탁이 종합자산관리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자산 증식이라는 직구 외에도 자산관리와 상속·증여라는 변화구까지 장착한 신탁이 100세 시대에 인생 연장전을 어떻게 지켜낼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야구 경기로 치면 9회 말이 지났어도 승부가 나지 않은 것이다. 저금리 상황에서 좀처럼 점수를 올리기는 쉽지 않은데 심지어 고령화로 인해 경기는 몇 회까지 이어질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앞서 야심차게 등판한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는 난타를 당했다. 재테크 만능통장으로 기대를 모으며 초반 반짝 흥행몰이를 이끌었지만 1년 만에 수익률이 은행 정기예금보다 못한 1%대 밑으로 곤두박질하며 ‘국민무능통장’이란 오명까지 얻었다.

ISA가 자산 증식이라는 직구로만 승부를 걸었다면, 신탁(信託, Trust)은 자산 증식은 물론 자산관리와 상속·증여 기능까지 더해 인생의 연장전을 모두 책임지겠다며 당찬 각오를 다지고 있다.

최근 신탁이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령화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치매 등의 위협을 겪을 수 있고, 일생 동안 모아온 은퇴 재산을 저금리 상황에서 안전하게 관리하고 보전하고자 하는 니즈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정부는 태스크포스팀(TFT)을 가동해 신탁업 진입 규제 완화, 수탁 대상 확대, 수탁자산 영업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신탁업법을 연내 제정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탁이 투자 수단으로만 머물러 있던 것을, 본연의 재산 관리와 상속·증여 기능을 강화해 국민 종합자산관리 툴로 정착시키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신탁업 활성화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내 신탁업의 효시를 1910년 영업을 개시한 일본계 등본합자회사로 봤다. 이후 신탁전업사와 신탁겸영사가 80개가 넘게 난립했고, 1931년에는 조선신탁업령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 신탁업 역사는 족히 100년은 넘게 진행돼 온 것이다. 

이후 신탁 관련 법령은 3번의 진화를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는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추진 과정에서 장기 저축성 자금의 동원 수단으로 신탁업을 육성할 필요성이 제기돼 1961년 신탁법과 신탁업법이 제정된 것이고, 두 번째는 2012년 신탁법이 50여 년 만에 전면 개정돼 유언대용신탁과 수익자연속신탁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가 생전에 사망 시를 대비해 사후 수익자를 신탁계약으로 정해서 상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수익자연속신탁은 위탁자가 사망 이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익자를 순차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신탁이다.

◆100년 역사 넘는 신탁, 3번의 진화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연내에 예고된 신탁업법 제정을 포함한 신탁제도 개선이다. 지난 2009년 신탁업자에 대한 규율을 담은 신탁업법을 없앤 뒤 통합 자본시장법에 흡수시키는 등 신탁을 단순히 투자 수단으로만 인식했던 것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맞게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탁은 투자신탁(특정금전신탁 등)이나 사업신탁(사업 추진 위한 자금조달) 위주로 발전돼 왔는데 신탁 시장의 규모는 지난 2013년 154조 원에서 지난해 710조 원으로 불과 4년여 만에 5배 가까운 외형적 성장을 보였다.

이 같은 성장은 주로 퇴직연금이나 특정금전신탁(MMT) 등 금전신탁의 성장에 기인했는데 실제 2011년 퇴직연금 활성화 정책 추진을 전후로 기업의 퇴직연금 가입이 늘며 퇴직연금 수탁고가 2009~2014년 기간 연평균 53.7% 증가했으며, 정기예금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고, 비교적 단기로 운용이 가능한 MMT의 수요도 매년 급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성장세에도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신탁은 투자 기능뿐만 아니라 재산 관리의 고유 기능을 활용해 생존신탁(가족을 수익자로 지정해 생존 시 파산, 질병 등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활비 등을 보호)이나 유언신탁(사망 시 대비해 상속재산 처분 계획을 미리 설정),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할 후견신탁이나 복지신탁 등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데도 신탁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현재 국내에 선보인 신탁 상품들은 이 같은 한계를 조금씩 벗어나려는 의지 속에 성장통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KB국민은행이 올해 2월에 내놓은 ‘상장지수펀드(ETF) 신탁 상품 3종’은 환율 상승이나 하락에 대비해 수익을 발생시키는 상품으로, 고객이 미리 설정한 목표수익률에 도달 시 장중 실시간으로 자동 매도되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안정적인 투자 상품으로서 강점을 살렸다. 고객 수익률에 따라 고객 부담 수수료가 달라지는 신개념의 ETF 신탁인 ‘착한 신탁’도 투자 기능과 고객 편의성을 강조한 사례다.

여기에 더해 KB국민은행은 지난해 펫신탁(Pet Trust)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는데 주인이 사망하거나 병 등을 이유로 반려동물을 돌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본인 사망 후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주인에게 자금을 주기 위한 신탁이다.
 
고령화에 대비한 신탁 상품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나란히 선보인 KB국민은행의 ‘KB성년후견제도 지원신탁’과 KEB하나은행의 ‘치매안심신탁’, ‘성년후견 지원신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상품은 기존 금치산제와 한정치산제가 폐지된 이후 도입된 성년후견제도의 실효성을 높여 후견심판을 받은 치매 및 발달장애인 등의 재산 관리를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상품들로, KEB하나은행은 여기에 더해 부모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미성년자녀들을 위한 미성년후견지원 신탁도 상품화했다.

상속·증여, 종합자산관리의 측면을 강조한 신탁 상품들도 점점 예열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신한내리사랑증여신탁’(신한은행), ‘명문가문 증여신탁’(우리은행) 등 증여신탁 상품이 신탁재산 평가액 할인율(연 10%, 올해 3%로 축소) 혜택의 막차를 타려는 고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모은 바 있으며, 종합자산관리와 상속 기능을 강조한 유언대용신탁 상품인 ‘하나리빙트러스트’(KEB하나은행), ‘내리사랑신탁’(신한은행), ‘신영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신영증권)도 점차 고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나리빙트러스트’는 2010년에 상품화되됐는데 KEB하나은행에서는 ‘하나 토탈 케어 트러스트’를 통해 ‘하나 케어 트러스트’(큰 병이나 치매 등을 겪게 되는 고객에 대해 요양비, 간병비, 생활비 등 지원), ‘하나 부동산 관리 트러스트’(부동산과 관련된 금융·세무·회계·법률 컨설팅, 노후 건물 신축이나 리모델링 설계·시공 지원), ‘하나-SNUH 기부 트러스트’(1억 원 이상 기부 의사 밝힌 고객에게 VIP급 의료 서비스 제공) 등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신영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도 종합자산관리, 자산 승계, 특별 부양, 공익 기부 등 4가지 형태로 서비스를 제공하며, 신탁 특유의 다양한 확장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월 1만 원으로 받을 수 있는 신탁 상속 상품도 나왔다. KEB하나은행은 3월에 출시한 ‘가족배려신탁’을 통해 신탁 상품이 일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가족배려신탁’은 본인 사망 시 가족들이 부담 없이 장례, 세금, 채무 상환 등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보급형 신탁 상품으로 생전에 은행에 금전 재산을 신탁하고 귀속 권리자를 정하면 별도의 유산 분할 협의를 거치지 않고 신탁된 금전 재산을 지급할 수 있다.

이 상품은 예치형과 월납형 중에 선택이 가능한데 예치형의 경우 계좌당 최저 500만 원부터 최대 5000만 원까지 가입이 가능하고, 월납형은 최저 1만 원부터 가능해 가입자 부담을 덜어준 점이 특징이다.
 
권우영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저금리에 따른 은행 신탁 비즈니스의 기회와 관제’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신탁은 대기성 자금의 운용 수단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 고령화와 저금리에 대응해 은행들이 다양한 상품의 개발, 종합자산관리 인프라 구축, 글로벌 금융사와의 제휴 등의 노력을 전개하며 신탁이 종합자산관리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며 “국내 은행도 자산관리 사업모델을 정착시키기 위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신탁 사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눈썰미가 있다면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한국과 일본의 신탁 상품들은 많이 닮아 있다. 신탁업 자체가 일본을 거쳐 넘어온 이유도 있지만,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있는 양국의 고민이 고스란히 신탁 상품에 담겨 있는 것이다.


◆고령화 겪는 한·일, 신탁도 ‘닮은꼴 진화’

우리나라보다 앞서 고령화 시대에 진입한 일본은 오는 2050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총인구의 38.8%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같은 연유로 일본의 신탁 회사들은 고령화 시대에 개인 자산관리 상품으로 유언신탁, 수익자연속신탁 등 상속 관련 신탁 상품을 VIP 고객에 대한 영업 강화 및 종합자산관리 서비스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사실 국내에 도입된 성년후견제도 지원신탁(KB국민은행), 치매안심신탁·성년후견 지원신탁(KEB하나은행), 가족배려신탁(KEB하나은행) 등도 일본에서 먼저 활성화됐다.

일본의 미쓰비시UFJ신탁은행, 미즈호신탁은행,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리소나은행에서는 한국에 앞서 2012년경부터 후견제도 지원신탁을 판매해 왔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경증치매자를 위한 치매신탁 상품으로 후견인제도를 활용한 신탁 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경증치매란 일상생활에는 제한이 없으나 교통수단 이용이나 금전 활동 등에 제한이 따르는 상태를 말한다. 경증치매를 겪게 되면 방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나 일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떨어져 누군가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이들을 돌보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지난해 1월 ‘경증치매 증가에 대응한 치매신탁 도입 필요성’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 금융권에서는 경증치매자 보호를 위한 치매신탁인 후견제도 지원신탁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아직 치매신탁에 대한 관심이 적다”며 “치매신탁 시장은 경증치매기만 준비할 경우 최소 30조9000억 원에서 최대 33조4000억 원의 시장규모이며, 중증치매기까지 포함한 치매 전 기간을 대비해 신탁을 설정할 경우 최소 72조9000억 원에서 최대 75조50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며 보험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해 강조했다.

이어 연구소는 “치매신탁 개발 시 금융사가 후견인 선정 절차에 관여해 후견인을 물색하고 선정해줄 수는 없으나 서비스 측면에서 관여할 수 있도록 고려돼야 할 것이다”라며 “보험권의 경우 치매신탁의 타깃 고객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 경쟁력을 가지고 시장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일본 신탁은행들은 고령화에 대응한 다양한 상품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과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은 상속 준비부터 집행까지의 과정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유언신탁과 유산 정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이 2013년 4월부터 판매한 ‘가족배려신탁’(사후 필요한 장례비용과 가족의 생활 자금 준비를 위한 신탁)은 KEB하나은행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의 ‘계속안심신탁’과 미즈호신탁은행의 ‘재산승계신탁’은 위탁자 본인과 가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가족신탁 상품이다.

‘계속안심신탁’은 고객 본인의 생활에 맞춰 생활 자금을 계획적으로 수령하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필요한 자금을 간단하게 가족이 수령하도록 할 수 있다. 또 상속 후에는 가족이 계속해 생활 자금을 수령할 수 있다.

‘재산승계신탁’은 일종의 후견제도 지원신탁으로 신탁된 금전에 대해서 원금 보장이 가능하고, 정기적으로 후견인이 관리하는 피후견인 명의의 예·적금 계좌를 교부해 관리해주는 상품이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 리소나은행, 미즈호신탁은행,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등은 손자녀, 자녀 등의 교육 자금 증여를 지원하는 ‘교육자금증여신탁’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조부모나 부모가 손자 또는 자식에게 교육 자금을 증여하는 경우 1인당 1500만 엔(약 1억5000만 원)까지 증여세가 비과세되는 점을 활용한 신탁 상품이다.

더불어 프루덴셜생명보험과 중앙미쓰이신탁은행, 다이이치생명보험과 미즈호신탁은행이 공동 개발해 판매 중인 생명보험신탁도 눈길을 끈다. 미성년자가 보험금을 수령할 경우 신탁 회사가 보험금을 관리하면서 생활비를 지급받다가 성년 이후 일정 연령이 됐을 때 보험금을 지급받도록 한 신탁 상품이다. 

이외에도 특정증여신탁(특별 장애인 요양과 생활 안정 지원), 특정기부신탁(신탁을 통한 기부 촉진 도모), 사업승계신탁(가업 상속) 등이 상품화가 돼 선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신탁업 활성화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 신탁은행들은 넓은 범위에서 신탁은 자산관리 및 상속·증여와 관련한 비즈니스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70~80대 고객을 대상으로는 사업승계 신탁에 주력하고, 50~60대 고객에게는 투자신탁 상품을 판매하거나 자산관리 컨설팅을 제공하는 식으로 고객 성향에 맞는 맞춤형 포트폴리오 설계에 주력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연구소는 “국내에서도 연령대별 니즈에 맞게 차별화된 상품 및 서비스 제공이 필요한데 상대적으로 젊은 50~60대 고객들에게는 자산 포트폴리오의 효과적인 관리를 지원하고, 70대 이상 고객에게는 자녀, 손주 세대로의 자산 상속 관련 상품과 유언 집행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며 “국내의 경우 보유 자산 중 부동산 자산 비중이 높기 때문에 금전뿐만 아니라 부동산 신탁 서비스의 전문성 확보는 필수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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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7-04-0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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