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108호 (2014년 05월)





[BEYOND ARCHITECTURE] 정영한 소장의 실험주택 ‘최소’의 가치에서 출발한 집에 대한 새로운 정의

“공간을 정의하는 건 가구”라는 정영한 소장의 발언은 강력한 한 방이었다. 침실과 거실, 주방 등 공간의 구획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집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 집에 대한 개념 자체부터 이 시대 다함께 고민해 봐야 할 ‘최소’에 대한 가치까지 정 소장의 실험주택은 많은 화두를 담고 있었다.



얼마 전 서울 관훈동 창의물류 갤러리 ‘낳이’에서 끝난 ‘최소의 집’ 전시에는 고기웅, 장지훈, 정의엽 등 세 명의 건축가가 자신들이 생각한 최소의 집에 대한 모델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다운사이징이 주택 시장의 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번 전시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최소의 집’ 기획 전시로, 고기웅 건축가는 충남 아산시의 ‘봉재리 주택’을, 장지훈 건축가는 부산 수안동의 ‘비 온 후 주택’을, 정의엽 건축가는 경기도 서종면의 ‘스킨 스페이스’를 각각 선보였다. 전시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들 세 주택의 공통점은 바로 콤팩트한 규모다. 물론 규모라는 게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법. 세 명의 건축가가 생각한 ‘최소의 집’도 연면적으로 따지면 99㎡에서 165㎡까지 다양성을 띠고 있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최소는 또 다른 누군가에겐 최소가 아닐 수도 있다. 같은 주제를 두고도 각자의 정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계기로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최소의 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이 전시의 본질이다. 한 회에 세 명씩, 총 10회에 걸쳐 30명의 건축가가 참여해 30개의 ‘최소의 집’을 완성해 가는 릴레이 전시를 기획한 이는 바로 스튜디오 아키홀릭 정영한 소장이다. 지난해 첫 전시에서 ‘6×6 실험주택’을 공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정 소장은 “‘최소’라는 주제로 집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반드시 공간 면적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란 점이다.

“이 시대에 집에 대한 인식 자체가 너무 비대하고 커졌는데, 집에 대한 가치를 다르게 해석해 보고 싶었어요. 단지 ‘작은 집’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최소의 가치로부터 출발하자는 의미로 ‘최소의 집’이란 타이틀을 달았죠. 전시를 접한 분들은 단지 규모의 다운사이징으로만 바라보는데 그건 하위 개념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여러 건축가가 정의하는 ‘최소’의 가치와 정의가 다양한 결과물로 나오고, 그걸 통해 건축가와 대중이 만나 소통하는 자리를 갖고 싶었죠.”


건물 전면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은 폴딩과 퍼니처 코리도의 무빙월 개폐에 따라 외향적 공간과 내향적 공간으로 가변성을 띤다.


­ ‘9×9 주택’, 가구를 없애고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다
정 소장이 정의한 ‘최소’는 건축이 최소한으로 개입되는 것이었다. 건축가가 가이드를 주기는 하되 공간에 대해 정해 주지는 말자는 것. 과거 전통적인 개념으로 봐도 밥 먹는 공간과 잠자는 공간은 다르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방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면 굳이 집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었다. 공간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니 다운사이징이 부차적으로 따라온 경우였다.

그 가치가 실현된 건 2011년 의뢰를 받고 설계한 ‘9×9 주택’이 시작이었다. 70대 여류화가를 노모로 둔 건축주 부부는 어머니가 머물 작업실 겸 원룸을 원했다. 사용자의 연령을 고려해 사이즈가 작으면서도 최적의 공간에 대해 고민하던 정 소장은 군더더기를 빼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를 위해 그는 ‘퍼니처 코리도(furniture corridor)’ 기법을 도입했다. 공간의 외곽으로 가구를 모두 몰아넣고 사용할 때마다 열어서 쓰도록 한 것이었다. 가령 주방 가구가 있는 벽을 열고 주방으로 사용하던 공간이 벽을 닫아 빈 공간이 되면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식이다. 가구뿐만이 아니라 배기 및 환기, 냉난방 설치까지 매입함으로써 철저히 공간을 비우는 데 주력했다.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9×9 주택’의 전경. 공간 외곽으로 가구를 몰아넣은 이 실험주택은 철저히 사용자가 공간을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집을 정의하는 건 가구죠. 소파가 있으면 거실, 침대가 있으면 침실인 식입니다. 그런데 가구로 정의된 그 시간 외에는 공간이 버려집니다. 그런 식으로 정의되니 집이 커질 수밖에 없죠. 가구가 없어지면 당연히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될 테고, 그러면 클 필요도 없는 겁니다. 하나 더, 큰 집이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이 커서가 아니라 물건들 때문인데 정작 본인들은 그걸 몰라요. 가구를 몰아넣고 공간을 비우기 위해서는 물건을 버리는 게 중요해요.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버리면서 버릴 것과 남길 것에 대한 가치를 재정립해 보자는 의도 또한 담겨 있었죠.”

가로 9m, 세로 9m, 높이 6m의 두 개 층으로 된 실험주택은 연면적 132㎡에 달하는 그리 작지 않은 집이지만, 실제로 가구를 늘어놓은 일반 주택보다 공간감이 클 수밖에 없다. 공간 실험뿐만 아니라 ‘9×9 주택’은 거주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의했다는 점에서도 실험주택의 면모를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 뚫려 있는 천창, 건물 전면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은 폴딩과 퍼니처 코리도의 무빙월 개폐를 통한 가변성을 띠고 있다. 폴딩을 열면 외부 전경이 내부의 중정(中庭)과 연결돼 마치 자연과 경계가 모호한 외향적 공간이 되고, 폴딩을 닫고 퍼니처 코리도의 모든 무빙월을 닫으면 은밀한 내향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식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중성적인 계단실 공간.


이론적으로는 더없이 훌륭한 이 실험주택은 그러나 실수요자들이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직 보편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정 소장 역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건축주라는 판단이 들면 설계 의뢰를 받지 않고 있다.

“사람들에게 작은 집을 왜 좋아하느냐 물으면 흥미롭다는 반응과 함께 과연 살 수 있을까라는 반문들을 합니다. 그럼 저는 말하죠. 살기 힘들 거라고. 실험주택은 기존에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고 물건을 정리해 다운사이징 할 용기와 자신이 있어야만 가능해요. 그런 결단을 내리고 나면 아주 자유로워지죠. 현재 ‘9×9 주택’에는 건축을 의뢰했던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는데, 거주 1년이 다 돼 가는 지금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다. 아이가 없는 데다 아내는 일러스트 작가, 남편은 교수로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거주 실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죠.”


외부 경관이 다공에 의해 중정과 만나 외향적 정원을 만든다.


집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 만들어 낸 다양한 실험주택
‘9×9 주택’ 이후로도 정 소장의 주택에 대한 실험은 계속돼 왔다. 얼마 전 해외 건축 전문 사이트 ‘디자인 붐’에 소개된 ‘6×6 주택’이 그중 하나. 가로 6m, 세로 6m, 높이 9m의 2층 반 높이인 이 주택은 ‘9×9 주택’의 진화된 개념이자 ‘공간의 가변성’이라는 정 소장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실현한 주택이기도 했다. 설계를 마치고 아직 시공 전 단계인 ‘6×6 주택’은 ‘9×9 주택’과 마찬가지로 ‘퍼니처 코리도’ 기법을 택했지만, 가구와 각종 시설 및 설비, 계단까지 안쪽 공간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9×9 주택’의 역전이다. 그렇게 주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3×3 크기의 퍼니처 코리도 안에 들어가고 가니 그 주변에 남은 공간은 사용자의 몫으로 남았다. 재밌는 건 ‘6×6 주택’은 얼마든지 트랜스포메이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구가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필요한 만큼 공간 연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6×6’은 어디까지나 건축가가 설정한 제한적 환경일 뿐이에요. 그래서 다이어그램에도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돼 있죠. 설계가 끝난 ‘6×6 주택’은 자녀 없이 두 마리의 개를 키우며 사는 부부를 위한 집이지만, 가족 구성에 따라 다양한 예시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변적입니다. 트랜스포메이션 형태에 따라 시리즈가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최소’라는 가치에서 출발한 개념이니 공간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가능성은 별로 없죠.”


햇살이 쏟아지는 침실은 마치 원시적 주거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가변성이 정 소장이 생각하는 집에 대한 첫째 가치라면, 그 가변성은 철저히 사용자들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 애완견 펜션을 운영 중인 부부를 위한 ‘3×3 주택’도, 40대에 헤어져 60대에 재결합한, 함께 살되 프라이빗한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부부를 위한 ‘5×5 주택’도 그렇게 탄생했다.


퍼니처 코리도에 면한 임의적 공간. 가구가 없어진 영역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집은 인문학적인 겁니다. 사회적 현상과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나라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죠. 따라서 집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어요. 이제는 집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인물) 기자·김재경(건축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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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4-06-1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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