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서용선

실체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평면인데도 어떤 입체감마저 전달하는 듯한 깊고 깊은 색채가 그랬고, 단순화된 표현 혹은 상징적인 풍경과 장소가 담고 있는 현상 및 이면의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역사적 상상’이라 분명 선을 긋고 있는데도 화폭 안 서사가 주는 울림은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으니, 돌아보면 서용선 작가의 작품이 가진 공통분모이고 힘이었다.
[ARTIST] 역사와 현실, 인간의 삶에 대한 실존적 성찰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갤러리에서 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며 새 출발하는 ‘역사적’ 순간을 서용선 작가가 열었다. 국내 대표적 중견작가로 무게감과 영향력을 가진 서 작가의 그림들은 건축적으로도 강하다고 평가받는 공간마저 압도하며 측정 불가의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실록 전’이라는 타이틀이 말해 주듯 단종 관련 작품들로 채워진 이번 전시는 오랫동안 그려 온 역사화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현대 도시인의 삶이라는 테마와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의 또 한 축을 이루는 역사화가 시작된 건 1986년. 올해로 28년째를 맞는 역사화의 ‘역사’는 ‘단종 그리는 화가’로 유명한 서 작가 자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답사의 힘으로 만들어 낸 강렬한 서사
미술관 초입에 내걸린,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들의 모습을 표현한 대형 목판 작품을 비롯해 새로 선보이는 작품만 30여 점. 엄청난 작업량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의 생활을 짐작케 했다. 2008년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50대 후반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부족했던 작품 활동에 대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화폭을 채워 가는 중인 듯했다. 신작이 많을 수밖에 없는 건 단종 관련 역사화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이전과는 또 다른 관점, 또 다른 배경이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간 계유정란과 단종복위운동에 따른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을 그려 왔다면, 이번에는 단종 관련 사건의 주변 인물로 알려졌던 안평대군에 초점을 맞춘 신작과,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거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를 그린 역사 풍경화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서 작가의 풍경화는 단순한 실체가 아닌 역사적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난 28년 동안 해 온 답사의 힘이다. 단종이 숨을 거둔 영월의 청령포, 매월당 김시습이 단종의 영혼을 위해 제를 지냈다는 동학사 경내의 숙모전, 단종복위운동에 실패하고 처형당한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새겨 넣었다는 영주 소수서원 근처의 ‘경(敬)’자 바위 등은 그가 직접 현장에 가보고 얻은 이미지들이었다. 서 작가가 그린 풍경은 과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과 동시에 현재적 실체라는 점에서 그의 역사관과도 맞물린다. 역사란 기록으로 끝나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서구에는 역사화가 많지만, 우리는 역사화라는 게 거의 없어요. 지역적 전통에 따라 갈라지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죠. 그런데 결국 역사라는 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시간의 축적에 의해 걸러져 나온 대표적 사건들이고,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반드시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족 내에서도 끊임없이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요. 다만 포장돼 있을 뿐이죠.”
‘처형장 가는 길’, 750×480cm, Acrylic on Canvas, 2014년
‘처형장 가는 길’, 750×480cm, Acrylic on Canvas, 2014년
“그림은 현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서 작가의 역사화를 포장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강렬한 색채다. 색을 여러 번 덧칠함으로써 원색을 원색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는 색감은 한편으론 화폭 안 서사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또 한편으론 그의 안에 내재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 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서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두 갈래로 나뉜다. 서 작가처럼 통쾌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 강하다”, “자극적이다”라는 말 또한 오랫동안 들어 온 익숙한 반응이다.

“스스로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해 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일어나는 화나 분노를 그림에 쏟아서, 또는 자연에 없는 색을 확 갖다 던짐으로써 분이 풀리는 것도 같아요. 그리곤 ‘그래, 내가 보여 주려고 했던 게 이런 거였어’ 하죠. 작가는 사회와 동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땐 보는 사람의 취향이 작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땐 작가가 그 취향을 이끌기도 하는데 저는 제 표현 방식에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 주길 바라는 편이긴 해요. 물론 사람들의 반응이 제 자신에게도 울림이 되는 부분이 분명 있어요. 실제로 전시를 하는 동안 전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게 느껴요. 무심결에 하는 말들, 반응들, 제스처까지 들리고 보이죠. 어떤 사람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려다 작품을 보고 멈칫하고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 제 어릴 때 친구가 그랬던 적이 있어요.(웃음)”
‘안평_동학사’, 500×300cm, Acrylic on Canvas, 2013~2014년
‘안평_동학사’, 500×300cm, Acrylic on Canvas, 2013~2014년
역사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관객과의 소통 부분에 있어 더 제한적인 면이 분명 있다. 역사책에서 글로 배웠던 사실을 전면적인 그림으로 접했을 때 사람들이 찰나적으로 느끼게 될 감정 혹은 정서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 국내 전시치고는 이례적으로 작품에 대한 설명서를 만든 것도 전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작품 그 이상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고뇌하는 현대 도시인, 작가의 삶이 투영되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왜 하필 그 많은 역사적 사건 중 단종이었을까. 서 작가는 “조선사에서 전쟁을 제외하고 단일 사건으로 일방적인 처형에 처해진 사람이 200여 명에 달하는 사건이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단종 그림은 그가 왜 예술을 하는가라는 실존적 문제와도 연결된 것이었다.

“1986년, 굉장히 울적한 기분으로 강원도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어요. 서울에서만 자란 저는 강원도의 삭막함이 정말 황당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다 평창강 지류인 서강의 한 바위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여기가 단종이 죽어서 버려진 곳이라고. 그 말 듣고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순간 드는 생각이, 사육신이 겪었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었어요. ‘그 고문에도 불구하고 왜 세조에게 반항하려고 했을까’, ‘나라면 못 했을 거다’ 등등의 생각을 했죠. 물론 그 한 번의 경험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순 없고, 다만 평소에 제가 약자, 슬프고 억울함, 비극적인 것들에 대해서 동정하던 감정, 답답해하던 감정들을 끄집어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실은 서 작가가 살아온 환경 자체가 그런 맥락에 닿아 있었던 것도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유년 시절 서울의 변두리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는 사춘기이던 중학교 시절부터 사회에서 뒤처졌고, 그로 인해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대학에도 여러 번 떨어진 후 군 입대를 하게 됐다.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도 했지만,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외아들의 의무감에 중장비 학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한번만 더 대학 문턱을 넘어 보기로 했고, 좀 더 쉬울 것 같아 택한 전공이 바로 미술이었다. 그의 표현처럼 ‘대학에 가려고 미술을 한 건지, 미술을 하려고 대학에 간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선택이었다.
3 ‘송씨 부인’, 181.5×227cm, Acrylic on Canvas, 2014년4 ‘보위(단종과 수양)’, 181.5×226.5cm, Acrylic on Canvas, 2014년5 ‘장릉’, 60.5×72.5cm, Acrylic on Canvas, 2014년
3 ‘송씨 부인’, 181.5×227cm, Acrylic on Canvas, 2014년4 ‘보위(단종과 수양)’, 181.5×226.5cm, Acrylic on Canvas, 2014년5 ‘장릉’, 60.5×72.5cm, Acrylic on Canvas, 2014년
막상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그의 방황은 계속됐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렵기만 했다. 비로소 자신의 작품에 대해 돌아보고 적극성을 띠게 된 건 오히려 대학 졸업 후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였다.

“갤러리를 스물다섯 살에 처음 가봤으니 말 다했죠. 그림 그리는 것 자체에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았어요. 지금 돌아보면 정말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기본이 안 돼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학생들을 보면서 반성도 하고 다시 공부를 하게 됐죠. 당시 미술대학은 추상화가 많이 유행했고 대학의 학업 과정 자체도 추상화에 이르는 과정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뭔지 모르게 사람에 대해 끌렸어요. 문학 작품의 영향인지 본질적으로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사람에 얽힌 이야기들이 좋았죠. 그러다가 단종과 만나게 됐으니 거기서 번쩍 한 거죠.”

그랬다. 그가 단종에게 ‘꽂힌’ 건 비극의 역사 그 이전에 단종과 그 주변 사람들이 먼저였다. 단종과 더불어 도시의 정황과 고뇌하는 현대 도시인의 모습을 꾸준히 그려 온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서 작가의 대표작들로 손꼽히는 ‘청계천에서’와 ‘숙대 입구’ 등에서 드러난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도심, 무표정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사람들의 표정은 시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연민의 표현인 셈이다.

“그림은 현실을 고발하는 게 아니잖아요. 사회를 보는 직접적인 눈 또는 항거라기보다, 예술이란 하나를 걸러서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재밌는 게 도시인들의 삶을 그리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예쁘다’라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분들은 모두 우울하게 보더라고요.(웃음) 뭐, 환경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겠죠.”

서 작가의 삶이 작품에 투영되는 것이라면, 현재 이후의 삶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이전과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고 화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이듬해인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고 해외에서 러브콜을 받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그이니 말이다. 물론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화두는 변함이 없겠지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