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성민제의 ‘온몸 연주’를 본 후로는 존재감 전혀 없던 더블베이스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는 더블베이스와 한 몸이었다. 너무 띄우는 것 아니냐고 혹 반문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니, 그 반문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성민제의 연주를 본다면(듣는 것을 넘어 본다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더블베이스가 이런 악기였어?’라는.
[BREAK FOR MUSIC] 무대 뒤 조연에서 빛나는 주연으로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의 비상(飛上)
올해 스물다섯.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의 성민제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의 대한민국 청년의 모습 딱 그만큼이었다. 클래식 연주자라기보다는 래퍼에 더 가까워 보이는 자유분방함도 살짝 기대치를 엇나갔다. 의외이기는 했지만 실망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릴 적부터 더블베이스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왔으니 어쩌면 조금은 반항감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허나, 그렇다고 이해해주기엔 성민제란 이름이 너무나 독보적이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더블베이스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성민제는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또 연주자들에게도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존재감 없이 늘 ‘베이스’로만 활용되던 더블베이스가 본격적으로 주연이 된 무대를 경험한 클래식 애호가들은 ‘신세계’를 발견했고, 악기 자체가 가진 어떤 한계를 과감히 넘어선 성민제의 모습이 다른 연주자들에게 자극이 됐으며, 나아가 인기 없던 악기인 더블베이스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많아졌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회생활을 갓 시작하기에도 어린 나이에 그는 많은 것을 해냈다. 결코 지금의 모습을 목표로 독하게 달려온 건 아니었다. 얼떨결에 시작했고, 성격대로 묵묵히 열심히 했으며, 그러다 보니 정말 하기 싫은 것도 참아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그는 어느새 더블베이스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됐고, 성취감과 함께 부담감도 커졌으며 ‘이제야 비로소’ 행복한 연주자가 됐다.


타의로 선택한 악기, 그리고 삶의 무게감
성민제는 열 살 때 더블베이스를 처음 잡았다. 당시만 해도 보통 고등학교에 들어가 전공으로 택하는 학생들이 많았을 때이니 빨라도 너무 빠른 시작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더블베이스를 전공하고 얼마 전까지 서울시립교향악단에 몸담고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늘 보던 친숙한 악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계획적’이었음은 나중에 알았다.

“아시겠지만 더블베이스는 악기가 워낙 커서 아이가 하기 힘든데, 게다가 전 학교에서도 키가 제일 작았어요. 어린이용 작은 사이즈로 따로 제작했는데도 팔이 안 닿아서 백과사전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했어요. 아버지가 더블베이스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어요. 아마도 저를 통해 당신이 못한 걸 이루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은 했지만 좋아하지도, 재미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의 뜻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끈기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선화예술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외로움과 소외감과도 싸워야 했다. 같은 악기를 전공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고, 다른 악기 전공생들의 시선도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이겨내게 만든 건 ‘나는 특별해’라는 자기 위로였다. 선화예중을 졸업하고 영재로 곧장 한국예술종합대에 들어간 후에는 남들과 다른 여정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대학 입학 후 경제적으로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악기에 대한 지원 외 생활비나 용돈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것도 만만치 않았다.

“정말 힘들었어요. 대학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갈 때는 학교 선택에서부터 모든 걸 제 스스로 해야 했죠. 제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서 더 그랬던 것도 있어요. 아버지 외에는 주변에 그 어떤 누구도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없었고, 당연히 목표니 롤 모델이니 하는 것도 없었죠. 부모님도 제가 힘든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그냥 얻어지는 건 없다는 걸, 고통이 따르는 만큼 언젠가 빛날 날이 온다는 확신 때문에 지켜보기만 하셨던 것 같아요.”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면서 성민제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이미 경쟁자가 없을 정도였던 그는 2006년 독일 슈페르거 더블베이스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를 하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이듬해에는 러시아 쿠세비츠키 더블베이스 콩쿠르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더블베이스의 절대적 강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2008년 제5회 금호음악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독일 마르크노이키르헨 국제 콩쿠르에서 3위에 오르는 등 계속된 쾌거는 ‘의외의 이유’로 그가 더블베이스를 계속 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첫 콩쿠르에 나갈 때만 해도 한국에선 제법 유명했지만 외국에선 저를 몰랐잖아요. 잘 하는 애가 콩쿠르에 나온다고 하니 ‘어떻게 하는지 보자’ 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았어요. 어린 마음에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는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전부터 쌓였던 게 폭발한 거겠죠. 당시 한 달 정도 잠을 거의 못 잘 정도였는데, 다행히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됐죠.”

그간의 힘든 시절과 노력에 대해 보상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라니? 어리둥절할 무렵 이렇게 덧붙였다. “콩쿠르에서 그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거든요. 극한의 상황에서 무대에 올랐는데도 인정받고 수상하게 되면서 계속 할 수 있겠다는 힘을 얻게 된 거죠. 더불어 입상 후 오히려 더 겸손해지는 계기도 됐어요. 저를 살게 해준 음악이니까요.”
[BREAK FOR MUSIC] 무대 뒤 조연에서 빛나는 주연으로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의 비상(飛上)
10년여 만에 행복한 연주자가 되기까지
평소에 클래식 음악을 거의 듣지 않을 정도로 상당 부분 의무감에 해온 음악이었지만, 3년여 전부터는 비로소 더블베이스가 좋아졌고 연주자로서 사는 행복감을 스스로 찾았노라고 했다. 10년 넘게 악기와 또 자신과 싸우며 얻어낸 결과였다.

“예전엔 행복한 게 뭔지 몰랐어요. 어릴 땐 악기가 무겁고 어렵다는 생각만 했죠.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악기가 아니다 보니 스무 살 때까진 그렇게 내면으로 많이 방황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젠 방법을 알게 됐고 독주 무대에 오르면서 자신감도 생겼어요. 레퍼토리를 고르고 더블베이스에 맞게 편곡을 하고 또 저만의 무대 연출도 해보면서 재미도 있어졌고요.”

물론 여전히 책임감 또한 크다. 그로 인해 더블베이스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지면서 전공생들이 많아졌고, 그들 대부분이 성민제를 롤 모델로 하고 있는 까닭이다.

“모교만 하더라도 저 때는 혼자였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3명 정도래요. 엄청난 발전이죠. 초등학교 때 시작하는 게 당연한 것도 달라진 점이죠. 하지만 여전히 더블베이스는 진입장벽이 높은 악기예요. 줄이 두꺼워서 음정을 짚기도 어렵고 몸이 울림통이 돼 많이 움직여야 소리가 제대로 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인지 여성 주자들이 많이 없는 악기죠. 그 어려움이 바로 더블베이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어려운 악기를 편하게 연주했을 때 대중이 느끼는 감동은 더 클 테니까요.”

더블베이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동생이 더블베이스 연주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농담 반 진담 반 ‘외로워서 한 배를 타자’는 심정이었다곤 하지만, 아버지가 그랬듯 더블베이스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동생 성미경 씨와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함께 온 가족이 한 무대에서 연주했던 2007년의 경험은 그에게도 관객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이 됐다.

“동생은 제가 봐도 재능이 있어요. 어떤 면에선 저를 보고 따라왔기 때문에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것도 있을 거예요.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제가 연주할 때 반주를 해주시곤 했는데, 국제 콩쿠르에 함께 나가 반주상을 받기도 하셨어요. 다시 한 번 가족들이 함께 연주하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한편으론 가족끼리 하면 많이들 싸운다고 해서 걱정되는 면도 있어요.(웃음) 다만 하게 된다면, 이젠 제가 주도적으로 무대를 재밌게 기획해서 만들어보고 싶단 욕심은 있네요.”

더블베이스 연주자를 넘어 그는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더블베이스만 보고 살아오느라 그간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에 대한 미련의 표현일 수도 있겠고, 뒤늦게 깨달은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감을 더욱 만끽하기 위한 길일 수도 있을 터. “지금까지와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기대감을 갖게 했다. 얼마 전 소속사 계약이 끝나면서 무대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일들을 위한 준비 시간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무엇을 하든 결국은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를 더욱 빛나게 하겠지만, 다만 개인적으로는 당장 그의 독주 무대를 많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울 따름이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