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mirror) 2: 회화의 거울

화가들은 외부 세계를 회화로 옮기기 위해 거울을 자주 사용한다. 자화상을 그릴 때는 물론이고 그림 속에 거울을 그려 넣어 그 거울에 비친 또 다른 공간을 제시하기도 한다. 회화는 세상의 모습을 포착해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로 여겨지기도 한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 1434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 1434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전통적으로 회화는 삼차원의 현실세계를 이차원의 평면 위에 유사하게 옮겨 놓은 것이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이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선원근법(투시도법)을 발명했다. 1425년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광장에서 세례당을 그린 그림을 거울에 비춰 실제 건물과 일치시킴으로써 원근법의 타당성을 증명했다. 이후 선원근법은 공간의 재현에 있어 가히 혁명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며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은 화가에게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본 장면만을 그리도록 강요한다. 화가가 어떤 장면을 원근법에 따라 화폭에 옮길 때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눈앞의 공간만을 그릴 수밖에 없다. 즉 시야에서 벗어난 옆이나 위, 뒤쪽은 재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화가들은 그림 속에 거울을 그려 그곳에 반영된 또 다른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공간을 확장하곤 했다.


시각의 한계에서 벗어나 공간을 열어주다
거울이 공간 확장을 위해 사용된 예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바로 ‘아르놀피니의 결혼’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가 그린 이 작은 그림은 토스카나의 상인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신부가 결혼 서약을 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실내의 공간과 가구들이 원근법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가운데 두 사람이 정면을 향해 엄숙하고 우아한 자세로 서 있다. 모피로 가장자리와 안감을 댄 풍성한 겉옷은 이들의 부유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천장의 샹들리에부터 바닥의 개와 나막신, 창문과 창가의 오렌지까지 모든 사물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묘사됐다. 이러한 온갖 세부들은 일상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성함, 충실함, 순수함 같은 결혼의 미덕을 상징한다.
‘아르놀피니의 결혼’ 세부
‘아르놀피니의 결혼’ 세부
그런데 화가는 결혼식을 표현하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의 중심에 볼록거울을 그려 그 속에 반대편 공간을 담았다. 거울 속에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사이에 어떤 두 사람이 조그맣게 묘사돼 있다. 이 방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결혼식의 증인일 테고, 그중 한 사람은 화가 자신으로 추정된다. 거울 위 벽에 ‘얀 반 에이크가 이곳에 있었다. 1434년’이라고 적힌 글이 이를 뒷받침한다. 화가는 길고 뚜렷한 서명으로도 모자라 거울을 이용해 원근법의 초점에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시도는 그림의 중심이 부유한 상인이 아니라 사실은 예술가인 자신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거울은 시각의 한계에서 벗어나 공간을 열어주고 장소와 인물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줄 뿐 아니라 화가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200여 년 후 스페인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는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그려 거울, 회화, 화가의 관계를 좀 더 복잡하게 설정했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일했는데 그 당시 스페인 왕궁에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이 소장돼 있었으므로 이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시녀들’은 화가의 작업실을 무대로 궁정의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림을 잘 살펴보면 하나하나 의문점이 생긴다. 어린 공주는 시녀들과 함께 이곳에 왜 왔을까? 돌려놓은 캔버스 앞에 서 있는 화가는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그림의 주인공은 공주인가, 시녀들인가, 아니면 화가인가? 이에 대한 답은 공주의 머리 위쪽 벽에 걸린 네모난 액자 속 이미지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펠리페 4세와 왕비의 상반신을 보여주는데 희뿌옇게 처리된 부분으로 미루어 거울로 짐작된다.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는 실제로 그림 앞쪽에 서 있고 화가가 이들을 그리는 중이며, 공주는 화실에 놀러 와서 모델을 서는 부모를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림 속의 화가가 바로 벨라스케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이렇게 자화상을 그리려면 반드시 거울이 필요하다. 벨라스케스는 등장인물들 앞에 커다란 거울을 놓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봐야 한다. 요컨대 이 장면은 전체가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인 것이다. 그림 속 화가가 그리고 있는 것은 국왕 부부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장면, 즉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이 그림과 유사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국왕 부부는 실제로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 큰 거울 앞에 있다면 그들의 뒷모습이 그려졌어야 한다. 또 뒷벽에 걸린 거울에도 큰 거울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반영됐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흔적들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럼 뒷벽의 거울은 진짜 거울이 아니라 환영인가, 아니면 실물 대신 초상화를 비추고 있는 거울인가? 어느 편에서 생각해봐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한다.
‘시녀들’ 세부
‘시녀들’ 세부
거울이 만들어낸 수수께끼 같은 미궁
‘시녀들’은 두 가지 거울, 즉 보이는 작은 거울과 보이지 않는 큰 거울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미궁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인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는 거울이 공간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화가와 관람자의 위치를 일치시켜 동일한 관점을 갖도록 유도했다. 반면 ‘시녀들’에서는 거울이 화가와 관람자를 분리하고 관람자가 보는 것과 화가가 보는 것이 다를 수 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관람자를 혼란에 빠뜨리며, 명확해 보이는 회화공간에 대해 오히려 의심을 하도록 부추긴다.

벨라스케스는 ‘시녀들’을 거울과 하나가 되게 하고 세계의 반영으로서 거울로 은유되는 회화 자체를 그렸다. 르네상스 회화와 달리 이토록 불합리한 그림을 통해 화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거울처럼 회화도 세계의 진실을 확고히 붙잡을 수 없음을 나타내려 했을까? ‘시녀들’에서 회화의 진실은 화가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에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비밀의 열쇠는 그림 속 화가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벨라스케스가 아니라 그림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세계의 벨라스케스다. 화가 자신도 현실에서는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그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혹시 그는 반영의 재현인 이 그림 속 모순된 표상들 틈새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자기를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