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조각예술 거장의 동양적 윤회사상

한국을 찾은 이탈리아 조각예술의 거장 노벨로 피노티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장자로 불린다. “모든 것은 삶과 죽음, 환생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피노티의 말은 르네상스 미술이 품고 있는 휴머니즘의 작품 세계를 짐작케 한다. 그런가 하면 우윳빛 대리석과 청동을 소재로 살아 숨 쉴 듯 빚어낸 정교하고 유려한 신체 형상은 바로크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 앞에서 노(老)작가 스스로가 평생 자신에게 물었을 질문을 건넸다.
[ARTIST] 노벨로 피노티, 생과 죽음·사후 세계를 연결하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로댕 뮤지엄을 찾았을 때다. 뮤지엄 뒤편에 ‘칼레의 시민’ 조각상부터 찾았다. 백년전쟁의 끄트머리, 영국군에 1년간 저항하다 칼레 시의 유지 6명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남은 시민들의 말살을 막고자 대신 교수대로 끌려가는 역사 속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칼레 시 기득권층 6인의 표정에선 영웅의 의로움이나 결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발걸음은 땅속으로 꺼질 듯 무거워 보이고 스스로 목에 맨 밧줄에 끌려가는 얼굴은 공포와 실낱같은 삶에 대한 희망이 뒤섞인 딜레마의 악령만이 드리워져 있다. 도리어 인간다운 모습을 오롯이 담은 조각상에 오늘날의 관객은 감동했고 칼레의 시민만이 고매한 영웅정신을 훼손했다며 로댕의 조각상을 도시에 세우기를 거부했다.


서로 닮은 삶과 예술, 완전하지 않아 아름답다
예술이 인간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비로소 ‘숭고함’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의 연장선은 이탈리아 조각의 산 역사로 불리는 어느 조각가의 대규모 개인전을 찾은 순간 다시 이어졌다. 기사에 떠들썩하게 실린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noti, 75)’라는 이름 앞뒤를 수식하는 단어의 무게감은 거장 아티스트의 존재감을 예측하기에 충분했다. ‘현대 조각예술의 최고봉’이라거나 ‘이탈리아 조각의 시대적 흐름’이라는 등의 미사여구들로 분출된 노작가의 독보적인 클래스는 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기자를 짓누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한껏 들뜨게도 했다. 무엇보다 궁금했다. 평생 예술혼을 태워 살아온 아티스트가 현자의 지혜를 명쾌하게 전해줄 것만 같았다. 진정한 예술은 어떤 모습인지, 우리네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들 영감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기에 앞서 세계적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덜 알려진 작가의 지나온 발자취를 짧게나마 소개한다. 피노티는 1939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그림과 조각을 시작해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종교미술대전에서 최고상을 받는 등 수상 경력이 더해지며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미국 뉴욕의 아모리 갤러리에 발탁돼 세계 각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후 1966년, 1984년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탈리아 대표 작가로 참가했다.

피노티의 작품 세계를 한두 단어로 압축해 표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삶의 시작과 끝 여기에 보태 환생이라는 실타래로 얽혀 있다. 1960년대 초기 작품부터 피노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절단되거나 파편화 된 신체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통과 삶을 표현했고 탄생과 죽음의 끝에 환생이라는 동양적인 윤회사상을 담은 ‘해부학적 걸음’ 같은 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누비스 습작 2’, 1992년, 브론즈·180kg, 97×114×44cm
‘아누비스 습작 2’, 1992년, 브론즈·180kg, 97×114×44cm
신의 손을 가진 듯 마음껏 주물럭거린 후 펼쳐놓은 듯 수많은 피노티의 작품들은 로마시대 때부터 깎아 썼다는 카라라 지역의 대리석, 포르투갈의 분홍빛 대리석, 브론즈 등이 주재료다. 수천 년 동안 돌산의 일부분이었던 칠흑처럼 검거나 매끄러운 우윳빛을 발하던 대리석 파편들은 피노티의 손을 거쳐 생명이 더해진 장엄한 예술품으로 재탄생해 서울에 이제 막 도착했다.

빨리 당도할 수 있는 지름길부터 찾고 싶었던 기자의 우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대가가 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성마른 질문을 건넸다. 은발의 노작가는 모든 걸 쏟아내라는 알 듯 말 듯한 현답을 꺼냈다.

“저는 작업할 때 제 마음과 지성, 열정, 감정 이 모든 것을 작품에 녹여냈어요.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이 여러 가지 것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합니다. 대답이 충분했나요?”

이어지는 그의 나지막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한국에서의 첫 전시를 축하드립니다. 개인전은 처음이지만 한국과 인연이 깊죠.
“한국에는 처음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요. 2004년에 열린 부산 비엔날레에 제 작품 ‘거북 여인’이 선을 보였어요. 그리고 2013년에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파도비시립미술관에서 한국 작가 김영원 씨와 함께 대규모의 2인전을 열었어요. 뜻 깊은 전시였지요.”


이번 전시는 작가님의 그간 60년 세월을 총망라한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가요.
“제 작품 대부분은 인간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고 사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태어남, 죽음, 그리고 환생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대리석을 가지고 조각하는 작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면서 ‘탄생’이라는 시작이 존재하죠. 하지만 탄생은 어느 순간 죽음으로 이어지는데 ‘해부학적 걸음’이라는 작품이 이러한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해부학적 걸음’, 1968~1969년, 브론즈·1600kg, 148×1200×60cm
‘해부학적 걸음’, 1968~1969년, 브론즈·1600kg, 148×1200×60cm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던 도나텔로, 미켈란젤로를 잇는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제 작업실이 있는 피에르타 산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리석 산지입니다. 미켈란젤로도 이곳에서 돌을 가져다 조각을 했지요.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됐어요. 하지만 작가란 무릇 자신의 작품에만 빠져 사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품을 볼 줄 알고 다른 작가가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관심 있게 보아야 합니다. 제가 그분들의 뒤를 잇는다는 평을 받는다면 제 세계에만 빠져있음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신체 일부분을 절단하고 때로는 비틀고 자연과 함께 합쳐져 있습니다.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작품을 만드는 동안은 작가이지만 제 작품을 완성한 후 관객에게 선보이는 순간은 제 상상력과 창작 활동을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제가 어떤 것을 의도하고 만들었다 하더라도 관객을 만나는 순간 그때부터 그들의 상상력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 역할은 관객들이 직접 창의력과 예술적 영감을 얻게 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요. 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100%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관객이 자신만의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아니면 제가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것을 머릿속에서 창조할 수 있어요. 제가 작품을 잘라내고 서로 다른 것을 이어 만드는 것 모두 그 안에서 파생될 상상력을 위해서입니다. 뻔한 것은 매력이 없지 않습니까.”
‘무제’, 1965년, 브론즈·540kg, 97×236×59cm
‘무제’, 1965년, 브론즈·540kg, 97×236×59cm
작품에 드러난 사후에 대한 관심은 매우 동양적 시각입니다. 윤회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생의 이치를 생각하고 인간, 자연을 작품 안에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됐어요. 또한 1972년에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집트 신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것도 큰 이유입니다. 같은 해에 만든 ‘아누비스의 습작 2’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의 신입니다. 이 작품은 윗부분은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아누비스, 아래쪽은 사람의 몸이 붙어 있어 서로 이어져 있는 형태입니다. 생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죠. 앞으로도 저는 죽음과 환생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작품으로 만들어낼 생각이에요.”


작가님 스스로도 전생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저는 이집트인이었을 거라고요. 이집트 문화와 역사는 정말 대단하고 제 작품에 엄청난 영감을 줬어요. 작품 ‘나일 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은 자의 혼을 태운 카론의 배가 나일 강에 떠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피노티 작가의 성찰은 작품 세계 안에 삶과 죽음을 여러 양태로 표출됐다. “저의 예술 작품이 죽음과 사후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언급한 그의 말은 그간 쌓여 온 작품 세계의 깊이와 영역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케 한다. 광활한 그의 예술 세계의 경계는 삶과 환생에 대한 작품에 더해 좀 더 확장돼 있다. 피노티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겪은 가슴 아픈 개인사를 통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형상을 작품으로 내놓기도 하고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 ‘체르노빌 이후’ 작품 등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셰익스피어와 고흐, 카프카에게 바치는 헌사를 작품으로 만들었고, 딸과 곧 태어날 손자에 대한 사랑을 담은 조각 작품으로 생명의 신비와 감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참상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영광이 혼재하는 삶을 관조하듯 정신적 예술로 승화시킨 노벨로 피노티의 작품들은 그래서 관객에게 여운이 긴 감동의 파장을 전한다.
‘나일 강’, 1972년, 브론즈와 플렉시글라스·30kg, 180×42×30cm
‘나일 강’, 1972년, 브론즈와 플렉시글라스·30kg, 180×42×30cm
작품 ‘체르노빌 이후’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합니다.
“거꾸로 솟은 몸의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이지요.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겼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다른 형태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참혹하고 비극적인 상황 자체를 표현한 작품이죠.”


작품 ‘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를 잃은 기억을 담은 작품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 있었고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전장에 나간 군인이라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휴가로 집에 들렀는데 그날 독일 군인이 쳐들어와서 제 눈앞에서 사살 당했습니다. 이런 기억이 제 작품에 영향을 미쳐 왔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가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간 작가님에게 무수히 많은 영감을 준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작품도 흥미롭습니다.
“반 고흐, 셰익스피어, 카프카는 모두 제 영감의 원천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생각해보세요. 그의 문학 작품 안에는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어요. 사랑을 위해 죽음을 기꺼이 맞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실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카프카의 소설들 말입니다. 특히 어린 학생 시절에는 반 고흐에 푹 빠졌어요. 그의 작품, 정신세계가 밑바탕이 돼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한 작품을 적어도 3초 이상 보세요. 그런 다음 그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다시 5초 이상 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작품을 볼 때 그 시간은 이미 관객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 경험을 유추해 자유롭게 봐야 합니다. 언젠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대부분의 관객들이 곁눈질로 보고 쓱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눈길을 받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영혼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던 건 아니거든요.”


‘체르노빌 이후’, 1986~1987년, 화이트 카라라 대리석·450kg, 178×74×56cm
‘체르노빌 이후’, 1986~1987년, 화이트 카라라 대리석·450kg, 178×74×56cm
작가님은 60년 가까이 활동을 해 오셨고 현재 최고의 예술가라 불리죠. 지금의 자리에서 자신의 성장이 스스로 느껴지나요.

“실은 저 자신에게 매우 불만족스럽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지요. 지금까지 제 모든 예술적 영감을 단 하나의 작품에 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됩니다. 60년 가까이 예술가로 활동을 해 왔지만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갈 겁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 경지에 가까워질지는 그때 가야 알 수 있겠지요.”


다시 태어나도 조각가가 되고 싶으신지요.
“다시 태어난다면 시인이 되고 싶어요. 조각보다 힘이 덜 들 테고 몇 안 되는 단어로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악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음악가에게는 추상적인 의미라든가 형태학적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실제로 이날 노벨로 피노티 작가는 수많은 언론 매체의 다양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모든 예술은 음악적 특성이 있어야 해요. 작품의 리듬이나 흐름 안에 음악이 담겨 있고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하죠.”


언제 가장 행복하신가요.
“잠들기 전에 ‘내일은 어떤 작품을 만들까’, ‘어디서 영감을 얻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일 행복한 순간은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고 침대에 누워 곧바로 잠에 빠져버릴 때입니다. (웃음)”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지혜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