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이후에는 건강, 여가, 돈, 인간관계의 관리가 더욱 중요해진다. 그중 관계만 놓고 이야기할 때 부부 사이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한창 일로 바쁜 시기에는 아침과 밤에 잠깐씩 마주치는 것이 전부지만, 은퇴 이후에는 30~40년 동안 하루 종일 마주보며 지내야 한다. 결국 노년에 의지할 사람은 반려자뿐이다.
[lifestyle design]부원병(夫源病) 예방하려면
요즘 많이 변했다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집안 분위기는 다분히 가부장적이다. 가정의 대소사에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독단적인 결정을 하기 일쑤다. 가장 외의 가족 구성원은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에는 그 권위가 보장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위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권력은 그동안 소통을 통해 신임을 쌓아온 아내에게 이양되기 시작한다. 아내뿐 아니라 자식 중에도 내 편은 별로 없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 남편들은 반란을 도모하기도 한다. 최근의 황혼이혼 사례를 보면 남자들이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혼인 기간 3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이 2004년 4600여 건, 2009년 7200여 건, 2014년 1만300여 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남편이 먼저 청구하는 건수가 40%에 이른다. 그런데 남자의 황혼이혼은 여자와 다른 점이 많다는 분석이 있다. 여자는 가족에게 희생한 자기 삶을 찾기 위해 이혼하지만, 남자는 비참하게 버림받기 전에 선수 치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실제 남편이 먼저 황혼이혼을 청구하는 경우를 보면 벌써 아내가 수도 없이 이혼을 요구했거나 본인이 하지 않아도 조만간 이혼청구를 당할 상황이 상당수라고 한다.

방법은 결국 하나다. 아내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노력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 여자와 남자의 생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생겨 그동안 미뤄두었던 부부 간의 살가운 시간을 갖겠다는 남편의 생각이 아내에겐 고통이 된다. 아이들에게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는 자신만의 시간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할 때도, 백화점을 갈 때도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내에겐 간섭처럼 느껴진다. 다정하게 시도하는 대화가 아내에겐 짜증나는 잔소리로 들릴 뿐이다. 철저히 아내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

자주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스스로 할 일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이것이 돈 말고도 일거리를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인간관계의 폭을 지역사회로 넓히고 자녀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선 안 된다.

여자는 남편을 잃고도 15년을 더 산다
퇴직 이후에 한적한 전원의 삶을 꿈꾸는 남편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아내가 먼저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돌아다니기 힘들고 가까운 이웃도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 지친 남편은 도시가 지겨워 떠나고 싶겠지만 수십 년간 집에서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만 해온 아내는 이제야 도시생활을 즐길 때가 된 것이다. 격리된 삶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부부가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진다는 점이다. 늘어만 가는 남편의 잔소리가 아내에겐 고문이 된다. 은퇴한 남편이 원인이 돼 생기는 ‘부원병(夫源病)’은 무서운 병이다. 아내가 바라는 좋은 남편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남편이다. 병원이 멀다는 것도 전원생활의 취약점이다. 고령이 되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의료 서비스다. 의료비 준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신속하고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혼자 사는 연습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여자는 남편을 잃고도 평균 15년 이상 산다. 남자는 건강과 경제적 여건을 갖췄다 하더라도 아내가 있어야 만족감을 느끼지만 여자는 남편이 없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본 에히메대 의학부 연구팀이 한 농촌마을의 60∼84세 노인 3136명을 4년 반 동안 추적조사 했더니, 부인이 없는 남자 노인의 사망률은 있는 경우보다 80%나 더 높았다. 반면 남편이 있는 여자 노인은 없는 경우보다 사망률이 55%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쯤 되면 여자에게 남편은 수명을 갉아먹는 귀찮은(?) 존재라고 해석해도 될 듯하다.

한편 남자가 상처한 후 혼자 사는 기간이 평균 9.7년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을 잃고도 독립생활을 할 수 있지만 남자는 거의 불가능하다. 직장생활 말고는 거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직장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해 온 남성의 경우 아내가 먼저 사망하면 스트레스가 크게 증가한다. 인간관계의 폭을 가족, 친지, 지역사회로 넓히고 아내와 공동으로 가계 관리를 하며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집안 살림을 미리 익혀두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이상적인 부부관계는 은퇴 이후가 아니라 평소에 아끼고 신뢰하는 관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가정에 소홀해선 안 된다. 남자는 특히 스스로 가족들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으로서 인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주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노고에 대해 공치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아내를 존중하고 아내만의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

지철원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