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으세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그리고 이 질문에 마음속에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는지 가만히 살펴보자. 부산, 제주도, 하와이 같은 구체적인 지명이 떠오른다면 이것은 여행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어디론가 정말 여행을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행지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느낌의 단어들, 예를 들어 ‘아주 멀리’, ‘지구 끝’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면 이것은 일반적인 여행의 욕구와는 다르다.

어떤 직장인들은 아예 “지구를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 방송국 여성 아나운서는 이 질문에 “주말에 한국말이 안 들리는 곳에 가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이쯤 되면 일반적인 여행의 욕구와는 상관이 없어진다. 주부들은 같은 질문에 어떤 대답을 많이 할까. 생각 외로 많이 나오는 대답이 “가족과 연결이 닿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다. 남편으로선 서늘하고 무서운 대답이다.

현실에 지쳐 이렇게 어디론가 도망치듯 숨어 버리고픈 욕구를 ‘심리적 회피 반응’이라 부른다. 병적인 현상은 꼭 아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현재가 즐겁고 재미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좋은 곳으로 옮겨 가고픈 것이다. 문제는 정말 먼 곳으로 간다고 해서 행복감이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데 있다. 실제로 과감히 기존 회사를 그만두거나 휴직하고 먼 곳으로 용기 있게 떠나는 이들이 있다. 자유와 쉼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중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떠났더니 오히려 머리가 더 복잡하고 피곤해졌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다 멀쩡한 직장만 그만두어 새로운 취직 걱정까지 스트레스로 더해져 피곤만 가중됐다고 호소한다. 직장을 박차고 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삶의 전환을 찾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인터넷이나 책에는 보이지만 대다수의 이야기는 아니다. 회피 반응은 뇌가 지쳐서 찾아온 것인데 멀리만 간다고 해서 지친 뇌가 충전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자신이 다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한 예로 불면증을 들어보면 불면증은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 며칠 밤을 꼬박 새우는 병이 아닌가? 그런 불면증에 특효약이 있으니 ‘강의를 들으러 가라’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오지 않은 잠이 잠을 자지 말아야 하는 강의실에 가면 쏟아져 내린다.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기에 우린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자려고 하면 잠이 안 오고 잠을 안 자려 하니 잠이 오니 말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 반응을 담당하는 뇌가 논리적 언어로만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뇌의 한 반쯤은 아주 이상한 언어를 쓴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를 쓰는 컴퓨터를 한 대 더 갖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고 잘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속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것이 우리 뇌 안에 있었나 하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우린 이 이상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콘텐츠를 가끔씩 본다. 바로 꿈이다. 내 머리에게 내가 만든 콘텐츠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상징적인 언어로 가득하기에 무지하게 어려운 예술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꿈을 꾼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꿈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지 우리는 매일 꿈을 꾸고 있다.

건어물녀 증후군엔 ‘활성화 전략’
그렇게 꿈 내용처럼 이상한 마음 컴퓨터를 우리 뇌 안에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이 논리컴퓨터 이상으로 우리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잠을 재우고 깨우는 수면센터도 마음 컴퓨터에 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수면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통제는커녕 자려고 하면 더 오지 않게도 만든다. 마음은 논리 컴퓨터가 명령을 하면 때론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하기도 어렵고 더 나아가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을 알기도 어렵다. 마음 컴퓨터는 논리적 언어가 아닌 느낌으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회피 반응도 이와 같은 마음의 상징적 표현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느낌은 마음이 자신이 지쳤다며 충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것도 대표적인 회피 반응이다. 건어물녀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 만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의 특징을 빌려 온 것인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는 미혼 여성이 집에만 오면 운동복에 머리를 동여맨 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맥주에 건어물만 먹다 보니 정말 몸과 마음이 건조한 건어물로 바뀌어 간다는 이야기다. 본인이 건어물녀 증후군에 걸린 것 아니냐며 호소하는 여성들이 실제로 많다. 소시지빵 증후군이란 신조어도 있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잘나가는 남편이 주말에 집에만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몸을 이불에 돌돌 말아 소파에 누워 TV만 보는 모습이 소시지빵 같다며 답답한 심정에 아내들이 만든 말이다.

건어물녀, 소시지빵 같은 회피 현상에 특효약으로 행동활성화 전략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마음이 있어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행동이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의욕은 없어도 억지로라도 과거의 즐거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것을 다시 행동으로 옮길 때 마음에 에너지와 삶의 의욕이 차오른다는 것. 정말 끝내주는 날씨의 4월이다. 건어물, 소시지빵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말고 봄을 즐기러 나가보자.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