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인간의 절친한 반려이자 애완동물로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아 왔다. 문화적으로 개는 보호, 충성, 신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 그림에 자주 나오는 왕실의 사냥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디에고 벨라스케스, ‘사냥개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 1635~1636, 프라도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사냥개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 1635~1636, 프라도미술관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는 정치적 성공과 실패, 향락의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세련된 감각을 지닌 탐미주의자로서 문화예술에 관심이 깊었다. 특히 미술 후원에 열정을 다해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절정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제왕의 교육을 받으며 지식과 운동을 연마했다. 무엇보다 승마와 사냥은 그가 가장 즐기는 스포츠였다.
펠리페 4세가 마드리드 근교 파르도 산에 사냥을 위한 별장을 지을 때, 총애하는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에게 거실을 장식할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초상화는 모두 세 점이었는데 각각 펠리페 4세, 그의 동생 돈 페르난도, 왕자 발타사르 카를로스를 묘사했다. 완성된 그림에서 그들은 모두 사냥복을 입고 총을 들었으며 곁에 어김없이 개를 데리고 있다. 개를 동반한 것은 사냥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실용적 목적이 전부는 아니다.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에 사냥개를 기꺼이 그리는 더 큰 뜻은 무엇일까?
이 초상화들 중 ‘사냥개와 함께 있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에서 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카를로스는 완벽하게 사냥복을 갖추고 바닥에 끌리도록 긴 총을 거꾸로 든 채 제법 사냥꾼 흉내를 낸다. 그 주변에는 개 두 마리가 보인다. 오른쪽에 몸의 일부만 살짝 드러낸 사냥개는 얌전히 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명령만을 기다리듯 준비된 자세로 눈을 떼지 않는다. 왼쪽의 또 다른 개는 몸집이 훨씬 큰데 바닥에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다. 듬직하게 버틴 자세가 바위처럼 굳건하다. 민첩한 개와 힘센 개, 이들은 때가 오면 용감하게 적을 공격하고 왕자를 위험에서 지켜줄 것이다.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이 그림이 제작될 당시 누나 넷과 여동생을 유아기에 모두 잃은 외아들이었다. 스페인 제국의 막중한 왕통을 계승할 유일한 적자인 것이다. 그에게 얼마나 큰 염려와 기대가 쏟아졌을지 짐작이 가는 바다. 두 마리 사냥개는 금쪽같은 왕자를 보호하고 황제가 될 당당한 면모를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용감하고 충직한 왕실의 사냥개
사냥은 중세부터 귀족만이 즐길 수 있는 오락이자 스포츠였다. 기사는 가장 중요한 미덕인 용맹을 사냥을 통해 증명할 수 있었다. 사냥에서 개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이자 동료였다. 르네상스 때부터 귀족의 사냥 장면을 그린 대형 회화가 등장했는데, 말 탄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사냥개들이 묘사됐다. 또한 개인의 초상화에 사냥개가 같이 있다면 그 인물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개인 초상화는 바로크 시대에 급격히 증가했는데, 왕이나 귀족 남성들은 사냥개를 동원해 사회적 지위와 용맹을 표현하곤 했다.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데포르트, ‘본, 논, 폰: 루이 14세의 개들’ 유화 스케치, 1702년경, 개인 소장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데포르트, ‘본, 논, 폰: 루이 14세의 개들’ 유화 스케치, 1702년경, 개인 소장
프랑스 왕 루이 14세도 개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유명하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증축하면서 사냥터를 크게 조성하고 동물원도 만들었다. 원래 베르사유 궁은 왕실의 사슴 사냥을 위해 지은 작은 별궁이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에 거주할 때 궁에서 100마리가 넘는 사냥개를 키웠다. 개들은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이 그 이름을 모두 기억했다고 한다. 루이는 사냥개를 데리고 사슴 사냥을 즐겼을 뿐 아니라 회의 도중에 개를 보러 나가기도 했고 손수 저녁밥을 주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애견들의 모습과 사냥 장면을 그림에 담고 싶어 화가를 찾았다. 왕의 눈에 든 사람은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데포르트(Alexandre Francois Desportes)라는 뛰어난 동물화가였다. 그는 사냥물과 꽃 정물화로 유명한 플랑드르 출신 화가에게 그림을 배운 다음 폴란드 왕실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1702년 데포르트는 루이 14세의 별장에 걸기 위한 개들의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그가 그린 그림은 총 6점이었다. 그중 한 작품을 보면, 멀리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서 사냥개 세 마리가 풀숲에 숨은 자고새 무리를 노리고 있다. 본, 논, 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개들은 얼굴과 몸매, 털의 모양, 점의 크기 등으로 특징이 구분된다. 화가는 날렵하고 유연한 자세로 목표물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사냥개의 본성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그림에 대만족한 루이 14세는 데포르트에게 상으로 저택을 수여하고 계속해서 왕실의 동물화를 맡겼다. 데포르트는 왕실 사냥에 동행하면서 스케치를 하고, 잡아온 전리품과 함께 재구성해 동물화나 정물화로 탄생시켰다.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데포르트, ‘꽃과 죽은 사냥감을 지키는 개’, 1715년경, 월리스컬렉션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데포르트, ‘꽃과 죽은 사냥감을 지키는 개’, 1715년경, 월리스컬렉션
루이 14세가 사망하던 해에 그렸다고 여겨지는 ‘꽃과 죽은 사냥감을 지키는 개’는 자연과 동물과 정물을 하나의 화폭에 표현한 작품으로 이 화가의 특기를 잘 보여준다. 꽃이 핀 대저택의 마당 한쪽, 무너진 기둥 사이에 사냥해 온 동물들이 놓여 있고 이를 사냥개 한 마리가 열심히 지키고 있다. 죽은 꿩이나 토끼들은 살아 있는 개와 대조를 이루며 생명의 덧없음을 나타낸다. 기둥의 화려한 주두 장식이나 기단부의 사자머리 조각이 집주인의 세력을 암시하지만 건물이 폐허가 됐으니 부귀영화도 허망할 뿐이다. 이 장면에 온기를 선사하는 것은 햇살에 물들어 부드러운 빛을 내는 연분홍 장미꽃들이다. 하지만 꽃의 아름다움도 곧 스러질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장미와 대비를 이루며 무성하게 자라는 양귀비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약성이 있는 양귀비는 잠, 망각,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유는 바로크 정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전달한다. 그러나 특히 이 그림은 천하를 호령하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죽음의 길에 접어든 루이 14세를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중심에 놓인 사자머리 조각은 태양왕 루이 14세를, 구부정한 사냥개는 평생 왕을 지킨 충직한 신하를 의미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 개는 화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데포르트는 인생을 반추하며 자신을 신임해준 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그림에 담지 않았을까?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