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중반.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 피터스버그 마을에는 두 악동이 있었으니 한 명은 톰 소여고, 또 다른 한 명은 허클베리 핀이다. 13세 소년 톰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 “학교 빼먹고 놀러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악동이다. 톰과 달리 허크는 학교와 교회를 전혀 가지 않는다. 온몸이 꽉 조여드는 답답한 옷을 입고 사람을 만들겠다는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길 잃은 어린 양으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허크를 꺼리고 좋아하지 않는다. 지저분한 옷을 걸친 채 맨발로 다니는 허크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 사이인 톰과 허크는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대통령으로 사느니 무법자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톰이 아니던가. 이런 이들이 어느 날 해적의 삶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둘은 집을 가출해 채집도 하고 낚시도 하면서 해적처럼 지내게 된다. 갑작스런 아이들의 일탈이 알려지자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심지어 톰은 마을 근처까지 갔다가 자신들의 장례식이 치러진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해적놀이도 시들해져 집에 돌아갈 방법을 궁리하던 차였는데 톰은 해적보다 더 재밌는 놀이를 궁리하기 시작한다. 바로, 장례식 시간에 맞춰 살아 돌아온 영웅처럼 귀환하기로 한 것. 그야말로 극적인 전개이지 않은가.

장례식이 시작되자 어른들은 톰이 짐작했던 대로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장내가 눈물바다가 된 바로 그 시점에 소년들이 등장한다. 원칙이나 규범보다 존재가 앞선다는 사실을 한탄에 가깝게 읊조리고 있던 어른들은 실제로 아이들이 나타나자 이들을 혼내기는커녕 그간의 모든 걱정과 허물을 뒤로한 채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심지어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가출이 대단한 무용담으로 포장돼 인기를 끌었다.

대개가 이런 식이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모험이 됐고 자잘한 놀이가 사건으로 회자된다. 그래서 톰과 허크의 놀이는 ‘모험’이라고 부를 만하다. 상상 이상의 놀이였고, 짐작 이상의 탈주가 됐기 때문이다. 톰과 허크의 모험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국가를 세웠던 미국인들의 원초적 향수를 자극했고, 19세기 미국 사회가 찾고 있었던 자유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충족시켰다. 악동들의 장난과 소년들의 기개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축축 늘어진 삶의 결들을 바짝 조이지만 위험 수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조금 다르다. 우선 허크는 학교도 교회도 다니지 않은 채 빈둥댈 뿐만 아니라 술주정꾼인 아버지로부터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이다. 따라서 허크는 부랑아나 불량소년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아버지의 포악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는 허크는 그 과정에서 흑인 노예 짐을 만난다. 이들은 사회적 시선을 피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가로지른다. 이는 그저 마을 밖 동굴 탐사 놀이나 해적 놀이와 같은 소년의 장난이라고 볼 수 없는 탈주다. 특히,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허크는 짐과 함께 도망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가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도망치는 노예를 돕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만한 행동이라고 익히 들었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혼자 도망치는 것보다 짐과 함께하는 것이 더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허크의 이런 걱정들을 상쇄할 정도로 짐은 정도 많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Life&]미국적 자유정신 투영한 두 소년의 모험기

“그래, 좋아. 지옥으로 가겠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돌봐주는 것은 물론, “죽으면 죽었지 은혜를 저버리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의리남이다. 물론,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짐의 무식한 언사는 허크를 불편하게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짐에게 진실한 우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가혹했다. 허크가 짐을 저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흑인 노예 짐을 밀고해야 하는 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고가 아니라 신고이자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는 자수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간 허크는 다른 이들의 물건을 몰래 가져와서 쓸 때에도 마음이 이토록 무겁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흑인 노예를 돕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섭고 불편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허크는 “그래, 좋아. 지옥으로 가겠어”라는 말로 모든 심적 갈등을 정리한다.

지옥에 갈지라도 짐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13세 소년의 용기. 한 소년의 탈주를 ‘미시시피 강의 오디세이아’로 만든 결정적 언사다. 가출한 소년과 그 소년이 두려워하는 흑인 노예가 발견한 것은 평등을 향한 인간의 결의이자 ‘공동체의 가치’다. 어눌하고 무식한 짐을 마을사람이 그런 것처럼 ‘니거(nigger, 검둥이)’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서 백인 아버지가 해주지 못한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됨으로써 있어야 할 가치를 앞당겨 재현한 것이다.

일본의 대문호인 오에 겐자부로는 아홉 살 때 이 책의 이 구절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지옥으로 가겠어’라는 미국 소년의 결심이 약 100여 년 동안 힘을 잃지 않고 절절한 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헤밍웨이는 “모든 미국 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부터 나온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펠프스는 “미국 정신의 실체”라고 평하기도 했다. 톰과 허크의 장난이 ‘모험’인 이유이며, 비록 소년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정신으로 읽히는 이유다.
한국에서도 <톰 소여의 모험>은 해방 이듬해부터 <똘똘이의 모험>으로 번역돼 라디오 방송극으로 들려지고 읽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겨 듣는 프로였다. 그러나 톰이 똘똘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바로 모험의 가치다. 도래하지 않은 가치에 대한 아슬아슬한 도전, 또 그 길에서 잃어야 하는 익숙한 구태. 따라서 톰과 허크의 모험은 때때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여전히 허크와 짐이 떠난 여행이 아직도 해석되지 않은 채 그저 먼 나라 이웃나라의 이야기로만 읽히고 있지는 않은가.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