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Second Act] “야생화 찍으니 모난 마음도 둥글어집니다”
예순을 넘은 노인이 심마니가 삼을 찾듯 야생화를 찾아 산으로, 들로 카메라와 장비를 지고 다닌다. 마음에 꼽았던 꽃을 발견하면 그 자태를 담기 위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낮은 포복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은퇴 후 야생화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의 모습이다.

“야생화를 찍으러 다니다 보면 모난 제 마음이 둥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한낱 미물인 야생화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사진을 찍을때 이렇게 공을 들이는데 부하직원들에게는 잘못한 부분만 들추려 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절로 들거든요.”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은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비서로서 한때 정치권에도 발을 담글 만큼 대단한 현역시절을 보냈다. 허허벌판이던 인천 송도를 지금의 신도시로 가꾸는 데에 일조했고, 2012년 대선 때는 정치권의 콜을 받기도 했다. 화려한 인생의 전반기를 뒤로한 채 그는 요즘 전원생활에 푹 빠져 있다. 두 달 전 6년간 거주하던 송도의 아파트를 팔고 20여 년을 살았던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의 단독주택으로 다시 이사를 온 것. 그동안 관리되지 않은 정원을 가꾸는 데만 해도 하루가 모자를 지경이다. 또 일주일의 절반은 지난해에 매입한 춘천의 작은 농가에서 텃밭을 일구며 보낸다.

“요즘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실감해요. 분당과 춘천으로 다니다 보면 한 주가 쏜살같거든요. 틈틈이 인천에 사는 손주들도 보러 가야 하고요.”(웃음)

전원생활을 시작하니 그의 오랜 취미인 야생화 사진 촬영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인생 2막을 풍요롭게 하는 사진

그가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쥔 건 2002년부터다. 건설 회사 재직 시절 비즈니스 골프에서 몇 차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한 그는 다시는 골프를 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취미이자 일이었던 골프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사진이 메줬다.

“그 무렵이 필름을 인화하던 때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였어요. 카메라만 있으면 필름 값 들 일이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죠.”

그는 아내가 좋아하던 야생화부터 찍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사진을 시작한 아내는 이제는 새(bird) 사진에 매료돼 새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야생화에 매료된 것은 오히려 그였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니 맨 눈으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을 가져다줬다. 컴퓨터에 옮겨와 몇십 배로 확대하니 꽃의 아름다움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 나비가 꿀을 찾아 꽃술에 대롱을 꽂는 모습처럼 과학시간에 책으로만 보던 장면들이 그가 찍은 사진을 통해 컴퓨터 화면에 펼쳐졌다. 그 세계는 무척 신비로웠다.

“원래도 진화론을 믿지 않았지만 꽃들의 자태는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크고 화려한 꽃이나 작고 소박한 꽃이나 모두 각각의 존재가 다 고유하다고 느껴집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듯 야생화의 매력에 빠지니 야생화에 대한 공부도 시작됐다. 야생화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학명, 성질, 효능 등을 백과사전을 꿰듯 줄줄 얘기할 수 있게 된 것. 그는 최근에 사진 찍은 애기똥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애기똥풀이란 이름이 참 재밌죠? 줄기를 꺾어보면 아기 똥 같은 흰 액체가 나온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매년 농약을 쳐도 이듬해면 다시 노란 꽃잎이 땅을 비집고 나와 농부들에게 애를 먹이는 꽃이기도 하죠. 충남 논산의 관촉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은진미륵 뒤편으로 노란 애기똥풀의 자태가 장관을 연출했어요. 야생화의 매력은 역시 은은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애기똥풀을 비롯해 홀아비바람꽃, 깽깽이풀, 처녀치마, 개불알꽃 등 야생화 이름은 유독 해학적이다. 조 부회장은 이렇게 재미있는 이름 속에서 학명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아름다운 이름의 학술 명칭은 열에 아홉이 일본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서글픈 역사 때문이다. 당시 일본총독부는 조선식생조사령을 내리고 일본의 식물학자들은 야생화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식물들을 모조리 조사해 일일이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일례로 아름다운 꽃에 걸맞은 예쁜 이름을 가진 금강초롱의 학명은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다.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라는 일본 식물학자가 금강초롱을 처음 발견해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준 일본 총독 공사인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학명으로 올린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부사의 한자 이름을 그대로 빌려 금강초롱을 일본식 이름인 ‘화방초’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의 학명에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남은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몇몇 식물학자들과 함께 학명을 바꾸는 노력도 해봤는데 국제규정상 학명을 바꾸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안타까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부터는 한 인터넷 매체에 그가 찍은 사진과 글을 연재하고 있다. 어느덧 50회를 바라보고 있는데 100회를 채우면 사진과 글을 모아 책을 낼 생각이다. 연재할 사진을 추리기 위해 예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면 아쉬울 때가 많다고 한다. 조금 더 애정을 기울이지 못한 것, 조금 더 많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는다는 것이다.

“사진이란 게 단순히 말하면 애정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얼마나 피사체에 공을 들였는지 남들은 몰라도 제 눈에는 확연히 보이거든요. 다시는 증명사진을 찍듯 사진을 찍지 않기로 다짐했죠. 그런 아쉬움이 남아 요즘에는 야생화 철을 따라 예전에 찍었던 꽃을 다시 찍으러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들꽃마을’이라는 동호회에도 가입해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있던 동호회에 가입해 회원으로 활동하는 정도였지만 몇 년 전 동호회 사이트 비용 대부분을 투자해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동호인들의 사진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동호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함께 출사를 다니면서 사진전도 꾸준히 열고 있다.

“은퇴 후 텅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취미가 참 중요해요. 특히나 저는 배우자와 같은 취미를 갖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셈이죠.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는데 아내와 함께 취미를 공유하니 자연스럽게 대화할 일도 많아요.”

손자바보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사진과 함께 그의 인생 2막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2명의 자녀가 낳은 손주들이다. 조 전 부회장은 손주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자신의 블로그에 ‘손자바보의 육아일기’라는 글도 연재하고 있다. 부모가 쓰는 육아일기가 아닌 할아버지가 쓰는 육아일기라니.

“손주들은 노년의 저희 부부에게 최고의 축복이에요. 자식들은 키우는 데 힘이 들어 재미를 몰랐다면, 손주들은 그저 사랑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니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요.”

그의 손주 사랑이 지극한 만큼 손주들도 할아버지를 부모 이상으로 따른다. 아직은 유치원생인 어린 나이임에도 할아버지와 일주일 넘게 지내도 부모를 찾는 법이 없다는 것. 헤어질 때가 되면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엉엉 울음을 터뜨리거나 심지어 숨어버리기까지 한다. 일주일 이상 할아버지를 못 만나면 상사병이라도 걸린 듯 할아버지를 찾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손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비결이 뭘까? 그는 그 답이 바로 며느리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손주들과 친해지려면 자주 봐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며느리들이 시댁에 오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아이들을 보내지 않으려 한다면, 보고 싶은 손주들을 그저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다.

“며느리가 저희 집에 오면 저희는 무조건 외식을 해요. 메뉴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정하죠. 저녁시간이면 며느리들에게 폭탄주 한두 잔 말아주기도 합니다. 며느리가 시댁에 와서 밥하고 설거지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니 손해 볼 것 없는 일이 되는 거죠.”

며느리에 대한 이해가 곧 손주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열쇠인 셈이었다. 최근 그는 송도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분당 집으로 다시 옮겨 왔다. 은퇴한 60대 부부가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비용 면에서 적지 않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업을 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아파트를 정리해 보탬이 되고자 했다.

“처음에는 함께 살자는 아이들의 부탁을 거절했어요. 6년간 시부모와 좋은 관계로 지냈는데 한 집에서 살다가 정이 틀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죠. 그런데 며느리가 저희 부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결국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사하던 날, 정리되지 않은 짐을 뒤로하고 며느리를 거실에 앉혔다. 그리고 한 가지를 당부했다. 바로 며느리 된 도리와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더라도 며느리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에 눈치 보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로 부담스럽지 않아야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올해 여름에는 손주들과 춘천에서 할아버지표 여름캠프도 준비하고 있다. 손주들과 일주일을 보내면서 아이들이 계획하는 것들을 하나 둘 실행에 옮길 작정이다. 물고기 잡기, 레일바이크 타기, 밤에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짜장면 먹기 등 손주들을 위한 계획표에는 어느새 16가지나 들어갔다. 두 손주는 할아버지인 자신을 포함해 ‘우리는 삼총사’라고 부를 정도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아이들과 노는 게 쉽지만은 않을 터.

“물론 힘들죠. 하지만 힘들지 않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힘들어도 함께 놀아줘야 아이들이 더 찾아올 수 있는 법이죠.”

우문현답이었다. 조 전 부회장은 인생 2막에 화려함 대신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행복을 택했다. 그가 택한 행복은 작지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공들이지 않고서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됐다.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