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흔히 죄의식을 탐구한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는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끔찍한 격리를 느낄 뿐이다. 이 책이 1866년에 쓰였지만, 카뮈와 베케트로 이어지는 20세기 ‘고독의 문학’의 위대한 선조로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다.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극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1703년 러시아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수도를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곳이 이른바 성 피터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다. 365개의 다리가 놓인 러시아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곳, 그만큼 수많은 사상과 문화, 예술이 유입되는 도스토옙스키와 차이콥스키의 제2의 고향이자 유럽의 창이라 불리는 도시다.

그러나 1861년 러시아의 농노해방을 기점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밀려드는 대중으로 인한 열악한 주거난과 실업 문제, 이로 인해 야기된 매춘과 고리대금업 등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혼란과 균열 속에 놓이게 된다.

지독하게 무덥던 7월의 어느 날, 한 청년이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걷는다. 창녀촌이 운집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한복판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한 사람들의 역겨운 냄새와 악다구니가 쏟아진다. 청년은 이 도시가 끔찍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적개심과 경멸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청년은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는 듯 초연하게 거리를 걷는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다. 언제든 돈을 빌릴 수 있는 유대인 못지않은 부자이지만 아주 인색한 전당포 노파에 대한 생각뿐이다. 이 청년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계획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이 청년이 보기에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나 이(蝨)만도 못하다. 거리에는 가난한 청년과 삶에 찌들어 미래를 포기한 대학생, 돈이 없어 의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환자, 매춘을 마다하지 않은 가난한 여성들로 가득하다. 만약 전당포 노파가 죽어 그 돈이 다른 곳에 쓰인다면, ‘어쩌면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청년의 이름은 라스콜리니코프다. 우울증 환자처럼 얼굴에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청년. 하지만 그가 원래부터 이렇게 말이 없고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다. 몇 달째 방세가 밀려 있고, 집주인과 부딪힐까 봐 두려워하며 주눅 든 상태가 계속되면서 소심하고 불안한 얼굴빛을 띠게 됐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사건을 계획하면서 오히려 그간의 절박한 사정에 대해 무감하게 반응했다. 넝마 같은 옷으로 거리를 걸어 다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또 노파 살해 계획을 하면서 알 수 없는 흥분이 더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은 열기에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과 생각이 자주 뒤죽박죽됐고, 그런 만큼 더 불안하고 초초하기도 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어쩌면 나폴레옹 같은 변화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사건 당일이 됐다.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두드리자 노파가 문을 빠끔히 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안녕하세요? 알료나 이바노브나”라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심술궂은 노파는 한 청년의 불안한 낯빛을 발견하자 언제나 그렇듯이 조롱의 빛을 얼굴에 띠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조롱의 빛이 무엇인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문을 박차고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얼굴은 이미 창백한 상태였으며 실은 손까지 떨고 있었다. 심지어 노파가 이런 상황을 꼭 짚어 가며 “이상하다”고 말하자 청년은 현기증에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서랍 속에 가득 차 있던 노파의 돈은 챙기지도 않았다. 제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웠다. 집에 와서 그대로 열에 들떠 잠들었다. 이가 딱딱 맞부딪힐 정도로 온몸이 덜덜 떨려오기도 했다.

한국에서 <죄와 벌>만큼 잘못 이해되는 작품도 없다. 벌레만도 못한 노파를 대신할 수 있다는 몽상을, 관념적인 청년의 사유 정도로 곡해하는 논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죄와벌>의 문면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만큼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불안하고 소심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생명에 관한 소박한 진실
그저 그는 당시 유럽에서 풍미하던, 세상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나뉘며,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사람의 행위는 사회를 더 낫게 만든다는 초인사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또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만큼 처참한 삶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비참한 상태를 넘어서고 싶었던 청년, 부활과 구원을 상상했던 대학생. 그러나 그 몽상이 악행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죄와 벌>은 마지막까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벌인지 묻는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벌’이란 말인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재판 과정만 참고하면 그가 행한 죄는 노파를 죽인 것이고, 그가 받은 벌은 살인에 해당하는 죄이나 그가 평소 행한 행동 등이 정상참작 돼, 7년간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벌이 내려진다. 누가 보더라도 약한 처벌이다.

그러나 법적 논리를 통해 죄를 밝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게 이 소설의 목적이 아니다. 청년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죄이고 벌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소냐’를 통해서만 죄가 무엇인지 겨우 짐작하게 된다. 소냐는 “노파가 가진 가치를 저울질하며 삶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생명은 그 어떤 다른 가치를 통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

그러므로 벌레만도 못한 노파의 삶의 길이를 판단하는 것은 어찌됐든 궤변이며 변명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한 인간의 가치를 돈이나 능력 등의 가치로 평가할 수 없다. 생명은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는 소박한 진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한 것은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 선술집, 매춘굴 속에 얽혀 있는 악취와 소음, 증오와 분노, 불안과 공포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찌됐든 라스콜리니코프의 비극은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극이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일러스트 김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