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번아웃 증후군으로 허우적댔죠, 그리고 산티아고로 떠났어요”
[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 사진 서범세 기자 | 산티아고 사진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번아웃 증후군으로 허우적댔죠, 그리고 산티아고로 떠났어요”
슬럼프의 심연에 가라앉았다. 누군가에게 실컷 울면서 힘든 삶을 고백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바로 정신과의사다. 어떻게 할까. 스스로 내린 처방전은 ‘4주간의 산티아고 길 순례’였다.정신과의사이자 행복을 연구하는 해피올로지스트인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52). 그는 “한때 지독한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서 허우적댔다”고 고백했다.

남들은 ‘아니, 정신과의사가?’라고 하겠지만, 의사도 사람이다. 급기야 상담 온 환자에게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밀려드는 후회와 스스로에 대한 미움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망연자실해 있던 그의 눈에 우연히 ‘나의 버킷리스트’라는 메모가 들어왔다. 그중 아홉 번째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길 순례’에 시선이 꽂혔다. ‘그냥 몇 주만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최근 김 원장이 펴낸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이봄)에는 그렇게 떠난 산티아고 길 순례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과 깨달음이 녹아 있다. 800km, 프랑스 국경의 작은 마을에서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까지 30일간의 길고 긴 산책이었다.

도망치듯 떠나온 길이었지만 그 길에서 답을 찾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일까’에서 시작한 철학적 사고는 이내 삼천포로 빠졌다. 밥은 무엇을 먹을지, 잠은 어디에서 잘지. 자꾸 생각은 변두리를 맴돌았다. “돌이켜보니 수없이 맴도는 잡념도 ‘나’에게 이르는 과정인 것 같아요. ‘비우겠다’가 아니라 어떤 생각에 몰입하니 비로소 비워졌습니다.” 나를 찾는 여행에는 충분한 시간도 필요함을 절감했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는 말처럼 순례 길에서 수많은 인생의 스승도 만났다. “느린 만큼 더 오래 걷는다”는 스위스 소녀 루스는 마치 동화 <토끼와 거북이>의 거북이처럼 느려도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빠른 비결이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줬다. “길은 완주한 사람들만의 길이 아니다”라며 미련 없이 돌아간 미국인 할아버지에게선 실패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엿봤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는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코골이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형편없는 잠자리에 들기 일쑤고, 옷 두 벌로 한 달을 입으니 남루해지기도 했다. 패잔병의 아픔도 혹독하게 겪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넘어 땅 끝 마을인 피니스테레까지 100km를 더 걷겠다고 도전했다가 그만 무릎 부상을 당했다. 한 걸음도 떼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야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관절 하나하나를 오롯이 느끼고, 몸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던 날, 한 달 새 삐쩍 마른 저를 보고 아내가 긴가민가하다가 눈물이 핑 돌았대요. 허름한 옷에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었거든요.” 그는 “쉽지 않은 순례 길이었지만 기회가 되면 또 걷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찾아 떠난 길, 왜 산티아고였나요.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고 해서 선인(仙人)이 되진 않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걷는 것은 즐거워요. 걷는 행위 자체가 엔도르핀 등을 자극하죠. 또 충분한 시간을 걷다 보면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걷는 길이 꼭 산티아고일 필요는 없죠. 제주 올레길도 좋고, 도심이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단지 쉬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족과 휴양지를 찾는 것이 좋았겠지만, 나를 찾는 과정이라면 혼자 걷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혼자 가니 가족의 소중함도 더 느끼게 되더군요.”

다들 힘들 때면 “떠나고 싶다”고 하지만, 진짜 떠나는 게 답일까요.
“꽉 찬 서랍은 정리하기 힘들잖아요. 일단 비워내고 나야 정리할 틈이 보이지요. 물론 4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고 번아웃이 앞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하지만 최소한으로 생기게 하는 예방법에 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번아웃은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데서 옵니다. 빈 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을 성취라고 가정해볼 때,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의 속도로 물을 채우려고 하면 번아웃이 오게 되는 이치죠. 부담감을 줄이고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 순례 길 이후 번아웃에 대한 면역력이 길러졌나요.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달라진 점이 바로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겁니다. 가령 예전 같으면 제가 의미를 두는 일이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지금은 생각을 바꿨어요.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훌륭한 의사선생님들이 많잖아요. 제가 못하는 부분은 그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일에 매달리는 것이 환경 탓이라고 하지만, 거부하려고 하면 줄일 수 있는 경우가 적잖습니다.”

일상 탈출로 인해 잃은 것은 없나요.
“중년에게 한 달 정도 일을 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실제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중년은 거의 없고 학생이나 아주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어요. 사실 의사도 한 달 진료하는 약 25일 중 하루를 쉬면 그만큼씩 수입이 줄어듭니다. 금전적 손해를 볼 생각으로 갔다 왔어도 정신적으로 얻은 깨달음이 값졌습니다. 하지만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가는 여행은 상당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나기 전에 그 모험 뒤에 마주할 손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꼭 반문해봐야 합니다.”

순례 길에서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표현했는데, 이후 더 화목한 가정이 됐나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을 둘러보는 것이 되더라고요. 걷다 보니 함께 걷는 사람과 속도가 다르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절감했죠. 돌아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무지 급한데, 아내가 제 속도에 맞춰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멀리 산티아고에 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나’를 만나는 방법이 있을까요.
“산티아고에서는 보통 하루 20km를 걸었습니다. 충분히 걷기는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성인이 1시간에 3~4km를 걸을 수 있는데, 2시간 걷다 쉬는 방식으로 하루 7~8시간을 걸으면 20km를 걸을 수 있어요. 옷은 편안하게, 신발도 워킹화를 준비합니다. 코스로는 숲속 길도 좋지만, 시내를 지나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치거나 다리가 아플 때는 카페나 바에서 음료도 마시며 쉬엄쉬엄 가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