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Act  안창수 화백
화가로 ‘제2의 황금기’ 누리는 전직 뱅커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인생은 60부터란 말이 있다. ‘정말 그럴까’ 하는 물음은 동양화가 안창수(71) 화백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정말 그러네’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30년간 재직한 수출입은행에서 정년퇴직한 후 그는 만 예순의 나이에 붓을 잡았다. 어느덧 11년째 수묵화를 그리며 새 인생에 마주한 안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며 “수묵화는 뒤늦게 만난 내 죽마고우다”라며 웃어보였다.

“안창수 화백이 붓을 잡게 된 것은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퇴직 후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붓글씨로 시작했다. 붓을 잡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 닭의 해를 맞아 십이간지 중 자신의 띠인 닭을 그려봤는데 주변의 호평이 잇달았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배워본 적도 그려본 적도 없었어요. 제가 본 대로 그림을 그렸는데 주변에서 하도 칭찬을 하니까 ‘소질이 있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도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진지하게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지인들의 조언에 그는 이왕 배우는 거 잘 배우자는 마음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가 만 예순의 나이였다. 그저 취미를 보다 잘 살리기 위한 의도였기 때문에 6개월만 중국에서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를 중국에 2년이나 붙잡아 둔 것은 그리면 그릴수록 나타나는 그의 재능과 스승의 독려 덕분이었다. 그는 중국 유학을 시작한 지 첫 6개월 만에 유학생끼리 견주는 수묵화대회에 입선했다. 그 후로 그가 출품하는 작품마다 줄줄이 상이 따라왔다. 스승도 나이 때문에 자꾸 주저하는 그를 독려했다. 2년만 열심히 그리면 기술적인 부분은 습득할 수 있고 나머지는 자신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달렸다는 것. 그때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림만 수련했다.

“그때 어찌나 열심히 그림에 몰두했던지 오죽하면 대상포진에 걸릴 정도였어요. 학교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비행기 타면 2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2년간 단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그림에만 몰두한 결과 중국 서화대전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죠. 제가 가고 있는 길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답 같아서요.”

큰 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중국CCTV에 그가 작품을 그리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예순 넘어서 처음으로 TV에 출연한 거였어요. 은행에 다닐 때도 고위직까지 올랐었지만 TV 출연은 한 적이 없었거든요. 제 모습이 화면에 나오니 신기하더라고요.(웃음)”

중국에서 2년간의 수련을 마친 그는 다시 일본 교토조형미술대로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옛 작품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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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피나는 연습 끝에 2009년 말에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회는 금융인으로서의 안창수가 아닌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공표이기도 했다. ‘수묵, 죽마고우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연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은 후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동양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지난 8년간 10번의 전시회를 열 만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동양화임에도 색감이 화려하다. 동양화에서 흔히 강조되는 여백이 그의 작품에서는 필수적이지 않다. 화폭을 빼곡히 채운 색감과 세밀한 묘사가 안 화백 그림의 특징으로 꼽힌다.

그가 주로 그리는 대상은 꽃과 새, 동물들이다. 지난해 전일본수묵화수작전에서 외무대신상을 받은 <포착>은 호랑이를 그린 작품이다. 호랑이의 매서운 눈매가 살아 있는 듯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동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외무대신상은 총리대신상 다음인 2등상이지만 지난해에는 총리대신상 대상자가 없으니 그가 1등을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 11년 만에 이룬 것 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조금 더 일찍 붓을 잡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공을 들여 싹을 틔워야 하지만 그는 누가 보기에도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을 수도 있는 터.

“나이 때문에 주저하는 제게 중국의 스승님은 청나라 최고의 화가인 금농에 대해 얘기해주셨어요. 양주팔괴(揚州八怪: 양주의 대표 화가 8인)를 이끈 그 역시 쉰이 넘어서 붓을 잡았고 예순이 넘어서야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였죠. 또 있어요. 미국의 민속 화가 그랜드마 모제스(안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는 무려 76세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국민화가의 반열에까지 올랐어요. 이런 예들은 제 마음을 자꾸 다잡게 했고 지금까지 그림에 정진하게 한 원동력이 됐습니다.”

중국에서 공부할 때에는 학교에서 유명한 연습벌레로 통했다.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가 더욱 분발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연습과 공부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한 대학 평생교육원의 요청으로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강의와 화실에서 배우는 시간을 제하고서는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지금은 그림 속에서만 살고 있어요. 예전에는 친구들도 가끔 만났지만 이제는 그림이 제 유일한 취미이자 일이자 벗이 됐죠.”

일흔 화가의 새로운 꿈

지금은 화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그이지만, 그도 역시 한때 은퇴 후를 고민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금융인으로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큰 포부는 없었다.
“은행에 다니면서도 노후를 위한 재테크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안정된 월급을 받으며 두 딸을 시집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죠.”

그런 일흔의 화가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제가 살면서 이렇게 구체적인 꿈을 꿔본 적이 있었을까요? 안창수 하면 떠오를 만한 화풍을 개발하는 것, 그게 앞으로 죽을 때까지 고민할 문제인 것 같아요. 그게 제 꿈이기도 하고요.”
그와 인터뷰를 마칠 때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올랐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남들이 늦었다고 생각할 예순의 나이, 이것저것 따져보며 시간만 재고 있었다면 지금의 안 화백이 있었을까. 꿈을 향해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청년들만큼이나 순수하게 빛났다.

문혜원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