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落香留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65X80cm, 2011년
花落香留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65X80cm, 2011년
[LIFE &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손동준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최근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단색화’가 세계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얼핏 서양미술의 모노크롬 회화 형식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한때는 ‘한국식 모노크롬’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Dansaekhwa’라는 한국식 발음이 고유명사로 인정받게 됐다. 겉보기에 엇비슷한 서양의 모노크롬 회화와 한국의 단색화가 무엇이 다를까. 가장 주된 요인은 ‘단순히 표면적인 색채 미학이 아니라, 내재된 한국적 감성이 우선한다’는 점이다.

불애 손동준(不涯 孫東俊)의 작품이 크게 주목된다. 동양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운필법(運筆法)과 서양 재료의 만남. 단순한 몇 가닥의 음악적 선율(旋律)들이 반복적으로 어우러진 화면은 적당한 여백과 어우러져 특유의 조형성을 구현해내고 있다. 손동준 작가가 구사하는 선(線)은 거칠면서도 담대한 역동성을 품고 있다. 마치 인생의 온갖 욕망과 격정을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으로 함축해낸 듯하다. 그렇다면 손 작가의 작품은 서예일까, 회화일까.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호적(戶籍)은 변하지 않듯, 그는 이미 태생부터 서예가이고, 지금은 넓은 의미에서 단색조 회화 기법을 다루는 페인터이기 때문이다.

손 작가는 다섯 살부터 서예를 시작해 20대에 이미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서예 관련 상을 휩쓴 ‘서예계 신동’으로 통한다. 고등학교 시절 별명은 ‘서예자전(書藝字典)’이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힌 덕분에,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전문을 서체자전을 보지 않고, 안진경의 해서 법첩(法帖)에서 직접 집자할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책 몇 페이지에 무슨 글자가 있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서예가들의 고향과 출생연도, 특성까지도 줄줄 외웠다. 결국 담임선생님의 권고로 한국에 처음 신설된 원광대 서예학과에 실기 점수 만점으로 입학하게 됐다.

대학 시절은 서예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모든 생활비를 해결했을 만큼 ‘인생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기’로 회상할 정도다. 이후 작가 활동을 이어가던 손 작가는 불혹(不惑)이 되던 해 ‘중국 정부 서법장학생 박사 후보 1호’로 중국 유학길을 결심한다. 손 작가가 유학한 곳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서법과(書法科)를 개설한 중국 수도사범대 서법문화연구원이다. 이런 유서 깊은 학교에서 졸업까지 4년간 학비와 기숙사비 전액 면제는 물론 매달 기본 생활비까지 받은 사례는 흔치 않다. 특히 지도교수였던 어우양중스(歐陽中石) 선생은 중국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서예가이자 학자로도 저명하다.

서예 본고장인 중국 원로 대가와의 운명적 만남, ‘외국인 정부장학생 박사 1호’라는 타이틀은 손 작가 개인을 넘어 매우 남다른 의미로 여겨진다. 현재에도 중국 랴오닝 성 판진 시 광샤예술촌에 유일한 외국인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다. 판진 시의 가장 번화한 시내에 위치한 이 예술촌은 중국 전역에서 선발된 100여 명의 작가들에게 작업실과 아파트를 제공한다. 또한 전시장과 각종 문화 관련 시설이 겸비된 대단위 복합문화단지다. 이곳 작업실 한쪽에도 ‘어우양중스 교수와 찍은 박사 졸업사진’이 걸려 있다. 그 덕분에 그의 작업실은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명소가 됐다.

“읽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서예가 아니라, 보는 즐거움과 느끼는 과정의 재미를 더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취지에서 최근 작품들은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필선(筆線) 또한 평면이 아닌 입체적 효과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조형적 구성 면에서도 기존의 구도나 붓의 운용법 등에 얽매이지 않으려 합니다. 궁극적으로 ‘서예는 꼭 문방사우(文房四友)여만 된다’는 통념을 극복하는 지점부터 다시 출발한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내면에 잠든 정신성을 어떻게 구현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큰 과제일 것입니다.”

최근 선보이고 있는 손 작가의 작품은 “나의 사상과 감정을 표출한 ‘서(書)+예
(藝)’를 찾고 싶다”는 작가적 욕구의 발현이다. 이런 시도는 이미 10여 년 이전부터 시작됐다.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서화가 왕탁(王鐸, 1592~1652년)의 법첩을 거꾸로 임서(臨書)한 작품을 대만국제현대서예전과 북경염황미술관의 기획초대전에도 출품했었다. 물론 겉보기엔 쉽게 ‘알아보거나 읽을 수 없는 작품’으로만 간단히 평가됐어도, 그 이면엔 손 작가만의 ‘창의적 실험’의 노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처럼, 작품의 근간은 ‘선율(線律)의 탐구’라는 모티브로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인 ‘선율(旋律)’을 서예나 회화의 기본 요소인 ‘획(劃)’의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서법과 회화의 융합을 통한 ‘서화일체론(書畵一體論)’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손 작가가 깨달은 결론은 ‘서예란 단순한 재능이나 기교의 능숙함보다는 그것을 표현한 작가의 내면성(학문적 수양)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서예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면성’에 주목하며,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천착에 매진하고 있다.
1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51X66cm, 2016년2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40X40cm, 2016년3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50X50cm, 2016년
1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51X66cm, 2016년2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40X40cm, 2016년3 花落香留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50X50cm, 2016년
손 작가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문구로 답했다. 글자대로 라면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로 서기 위한 그 믿음’은 무엇일까. 우선은 본인 자신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본인이 선택한 서예가로서의 삶에 대한 확신, 서예 자체가 지닌 깊은 의미에 진심어린 공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미술 전성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서예만의 홀로서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전국의 400여 개 화랑에서 서예가를 위한 순수 초대전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이나 유명 전시공간은 대관조차도 녹록지 않은 형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 작가처럼 전통서예가로서의 입지와 순수미술 회화작가로서의 길을 동시에 개척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예로 지난해에 한국 현대서예 대가인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년) 선생의 서예정신을 기려 제정된 ‘일중서예상’을 수상해 초대전을 가진 점은 서예가로서 입지를 인정받은 격이다. 그런데 ‘한국서단에서 최고의 명예스러운 수상기념전’에서 그는 전통 서예가 아닌, 서양의 회화 기법과 재료로 재해석한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이는 전시장을 찾은 수많은 서예계 인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이미 이뤄낸 결과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의 자세를 보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손동준은 ‘도전하는 삶의 자세’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다. 지난 2010년 중국 유학 전후에 화두처럼 달고 다녔던 고민들(전통이란 무엇인가, 서예란 어떠한 예술인가, 한국 사회에서 서예의 존재감이란, 현대사회에서 서예의 나아갈 방향은)에 대한 쉼 없는 천착은 그를 성장이 아닌, 성숙의 단계로 이끌고 있다. 작품 역시 그러한 깊은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연 서예가 단순히 ‘쓰다’라는 행위에 머무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 손 작가의 ‘신서화(新書畫)’는 미술계에서 점차 입지를 넓히고 있다. 손 작가의 작품은 풍성한 이력에 비해 작품 가격 형성은 낮은 편이다. 10호(53×45.5cm) 기준 120만~150만 원, 100호(160×132cm)는 900만~1000만 원 선이다.
운필회화, 정중동의 미학을 새로 세우다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ㆍ세종대 미술대학 겸임교수 및 수원대 미술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