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를 잊어버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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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건망증이 심해 조기 치매가 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스스로 생각할 때 건망증이 심해 치매 아닌가 생각되는 것을 ‘주관적 기억력 감퇴’라고 한다. 보통 주관적 기억력 감퇴는 있지만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이 특별한 이상을 못 느끼면 건망증은 있으나 치매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정말 치매에 걸리게 되면 본인의 증상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치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치매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서글프게 누구나 기억력이 조금씩은 떨어진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도 자기들끼리 모여 기억력이 너무 떨어졌다며 걱정하는 것을 본다. 건망증은 감성에너지가 소진되면 나타나는 뇌 피로 증상,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뇌를 스마트폰에 비교하자면 감성은 스마트폰의 배터리에 해당한다. 아무리 본체가 최신형이고 우수해도 배터리가 소진돼 버리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깜빡깜빡 하게 되는 것이다.

감성에너지가 번아웃 돼 나타나는 건망증, 지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백화점에 차를 가지고 간 것도 잊고 택시 타고 집에 돌아오는 해프닝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웃고 지나가면 그만이고 ‘내 뇌가 지쳐서 그래, 치매 아니야’라며 안심시켜주면 된다. 정말 문제는 삶의 의미와 가치가 기억되지 않고 날아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날 인생을 돌아보니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도 건망증이다. 내 소중한 삶의 가치가 제대로 저장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것은 까먹더라도 내 삶의 가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치료이론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다. 프랭클 박사의 말이 힘을 갖는 것은 그가 겪은 고초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고생하게 된다. 매일 아침 남녀가 섞여 발가벗겨진 채 일렬로 늘어 세워져 신체검사를 받고 검시관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 가스실에 끌려가 싸늘한 시체가 돼야 했다. ‘하루살이보다 못한 삶’이란 이야기처럼 그다음 날 생사를 모르는 극도의 불안과 인간 존엄성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수년을 보낸 것이다.
삶의 가치를 잊어버린 당신
바쁜 삶과 ‘거리 두기’ 연습

그런데 그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이런 환경에서도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자신이 삶의 목적과 가치를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에 대한 건망증은 가장 소중한 욕망에 대한 좌절인 셈이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의 가치를 날려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상식으론 하루하루 집중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아닐까 싶은데, 프랭클 박사의 의미치료이론에서는 거꾸로 이야기한다. 삶의 가치를 잘 느끼기 위한 테크닉으로 역설적 의도(paradoxical attention)를 이야기했는데, 한 마디로 너무 열심히 살면 오히려 삶의 가치를 잘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드하게 바쁜 삶과 유격을 두는 ‘거리 두기’ 연습에서 삶의 가치가 오히려 잘 느껴지고 기억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삶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런데 성취의 콘텐츠를 갖는 것과 그 콘텐츠를 즐기는 것은 다른 프로세스다. 두 프로세서의 균형이 필요하다. 열심히 노력해 수많은 인생의 성과물들을 획득했으나 그것을 음미하고 잘 즐기지 못한다면, 덜 성취했지만 그것을 잘 즐기는 사람보다 삶의 만족감이 떨어진다.

성취를 위해 달려갈 때는 전투 시스템이 풀가동되고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불안한 마음은 전투 시스템이 작동 중이라는 증거다. 주변의 위기 상황에 잘 대응하기 위해서다. 삶의 가치에 집중할 때는 이완 시스템이 작동된다. 그리고 주변은 보이지 않고 내 앞의 소중한 콘텐츠에 대한 몰입이 일어난다. 거리 두기는 주변을 경계하는 불안한 마음을 몰입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현대인들은 진화 과정상 거리 두기를 잘 못하는 조상들만 살아남은 셈이다. 아름다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몰입하고 즐기고만 있으면 옆에서 달려오는 코뿔소에 받혀 생명을 잃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몰입보단 불안-생존 시스템의 가동에 능숙한 조상들의 후예가 우리들인 셈이다.

그러나 생존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니 우리는 삶의 가치에 몰입해야 한다. 몰입은 여유에서 일어난다. 몰입은 지금 현재에 대한 집중인 반면 불안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하루 15분만이라도 거리 두기를 통한 삶의 가치에 몰입하는 것이 어떨까.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다. 봄의 변화를 조용히 느끼는 것, 그것도 몰입이다. 할 일은 태산같이 쌓여 있지만 조용히 커피숍에 가 커피 한 잔 하며 시집을 읽는 것도 몰입이다. 몰입을 할 때 자연스럽게 이완이 일어나고 내 삶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콘텐츠에 대한 집중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가치가 내 감성 기억에 저장된다.

가치의 저장은 인생 후반에 몰아서 할 수 없다. 오늘 내 삶의 가치는 오늘 몰입하고 저장해야 오늘이 나에게 의미 있는 하루가 된다. 몰입 없이 바쁘게만 살면 허무란 건망증이 찾아 오기 쉽다.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