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박은영 문학박사·미술사가] 숱이 풍부하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미인의 요건이요, 부러움의 대상이다. 대머리나 빈약한 머리숱을 보완하기 위해 흔히 가발을 쓴다. 오늘날 가발 착용은 미용의 목적이 크지만 역사상 발달한 가발 문화에는 보호, 위생, 권위, 관습 등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작자 미상,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1588년, 워번수도원
작자 미상,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 1588년, 워번수도원
왕실에서 부활한 가발 문화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사람들이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쓰는 풍습이 있었다. 본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길고 풍성한 가발이 왕이나 귀족의 격식 차린 의장의 일부로 정착했다. 로마 시대에도 성행했던 가발은 중세 때 쇠퇴했다가 16세기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선구적 사례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머리숱이 적은 것을 감추기 위해 썼다는 주황색 가발이 유명하다. 많은 초상화 속에서 여왕은 화려한 의상과 빈틈없는 화장, 그리고 일정하게 컬이 잡힌 짧은 가발로 치장하고 있다. 가발은 두꺼운 화장처럼 외모의 단점을 가리고 인물을 돋보이게 해 여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미용 장비였다.
17세기 프랑스 왕실에서 가발은 또다시 왕의 필수품이 됐다. ‘패션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는 멋쟁이였지만 사실 키도 작고 신체에 결점이 많았다. 병치레로 17세부터 머리가 급격히 빠져 거의 대머리가 된 것이다. 그러자 왕은 수십 명의 가발업자를 불러 다양한 가발을 만들게 했다. 루이 14세가 특히 좋아한 것은 길고 곱슬거리는 커다란 가발이었다. 어깨를 덮는 풍성한 가발은 대머리를 가려줄 뿐 아니라 머리 위로도 솟구쳐 키가 훨씬 커보이게 했다. 청년기 이후에 제작된 루이 14세의 초상들은 대부분 그처럼 크고 무거운 가발을 쓴 왕의 얼굴을 보여준다. 1701년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가 그린 초상화에서 왕은 갑옷을 입고도 치렁치렁한 검은 가발을 쓰고 있다. 63세의 나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부분, 1701년, 프라도미술관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부분, 1701년, 프라도미술관
왕을 따라 귀족들도 가발을 착용하면서 가발이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가발 만드는 기술이 미흡해 왕이 가발을 쓴 모습이 어색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왕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모두 가발 쓰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로, 당시 대머리는 매독과 같은 성병의 결과이기도 해서 수치로 여겨졌고, 그것을 감추려고 왕이나 귀족들이 가발을 썼다고도 한다.
가발은 미용 목적만이 아니라 잘만 관리하면 위생에도 도움이 됐다. 당시에는 머리를 자주 감지 않았기 때문에 머릿니가 들끓었는데 그것을 박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쓰면 이를 예방할 수 있고 가발에 이가 생기더라도 업자에게 맡겨 세탁하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어차피 남의 머리카락이나 말총, 염소털 등으로 만들어야 하는 가발은 값이 비싸 서민들이 사용하기 어려웠다. 가발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복장으로 여겨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토머스 하디, 요셉 하이든의 초상, 1791년, 런던 왕립음악학교
토머스 하디, 요셉 하이든의 초상, 1791년, 런던 왕립음악학교
유럽을 풍미한 남성의 가발
18세기가 되면 가발은 갖가지 형태로 정교하게 발전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특히 흰색이나 회색 분을 바른 가발이 유행했고 길이도 점점 짧아졌다. 여자들은 전체 가발을 쓰지 않고 부분 가발을 붙이거나 머리에 직접 분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중산층 이상이면 모두 사용할 정도로 가발은 일용품이 됐지만 폐단도 적지 않았다. 가발에 뿌리는 백분은 밀가루나 전분이 주성분이라 세균이 엄청나게 번식했다. 냄새가 심해 향수를 뿌려도 불쾌감을 피할 수 없었고, 분가루가 날려 양복을 허옇게 더럽히기도 했다.
토머스 하디(Thomas Hardy)가 그린 <요셉 하이든의 초상>을 보면 하이든은 하얀 가발과 검은 정장 차림으로 책을 들고 앉아 있다. 끝을 두 번 단단히 말아 올린 가발은 그의 풍모를 단정하고 격조 있게 만들며, 뭔가를 부드럽게 주시하는 시선과 함께 예술가의 지성인다운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그의 어깨와 옷깃을 뒤덮은 저 하얀 것은 무엇인가? 바로 가발에서 떨어진 백분 가루다. 초상화에 그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을 보면 분가루가 옷에 묻는 것쯤은 흔한 일이라서 흉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가발을 쓰려면 어쨌든 본인이 큰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여름엔 덥고 비위생적이며 값도 비싸고 손질하는 데도 신경이 많이 쓰였다. 게다가 가발을 만들 때 창녀나 죽은 사람의 머리털을 쓰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 불쾌할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도 그 시대 남자들은 왜 가발을 꼭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대머리를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알고 중요한 자리에 맨머리로 나가면 예절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사회 통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거의 모든 남자들이 공식 석상에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 아닐까. 실용성과 관계없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합의한 보편적 약속, 즉 일종의 문화적 코드인 것이다. 가발은 그렇게 200년 가까이 유럽을 풍미했다.

18세기 말, 가발은 구세대와 보수주의의 잔재로 여겨지며 급격히 쇠퇴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영국에서는 법관들이 여전히 가발을 착용한다.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발이라는 형식이 지켜온 격조와 위엄과 권위의 전통을 완전히 폐지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전통에는 실용성이나 편리함의 기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상징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