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유산, 가치의 깊이를 재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때로 무언의 몸짓이 더 힘이 있다. 농업유산이 그렇다. 지금 농업유산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 추구하는 방식, 담고 있는 가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가 있어서다.

삶의 터전에서 피워낸 꽃 ‘농업유산’
이상향으로 불리는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의 1516년 작 <유토피아>에서 시작된 말이다. 이름 뜻은 ‘없는+장소’다. 즉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장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한 열망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의 반대쪽에는 디스토피아가 있다. ‘나쁜+장소’라는 뜻이다. 세상 어디에도 이상향 따위는 없다는 냉소적인 시각으로, 소설 <멋진 신세계>·<1984>, 영화 <메트로폴리스>·<스타워즈> 등에서 암울한 현실로 많이 다뤄졌다.
지금 이 시대를 표현하는 단어들, 욜로(YOLO: 현재를 즐겨라), 1코노미(나를 위한 소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은 현실에 대한 피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가치 추구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 좋은 장소를 만들고 싶은 바람은 누구에게나 공통이 아닐까.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며, 그 관계 맺음이 곧 거주다”라고 했다. 실존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터를 잡고 살아가는 환경, 공간, 마을,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디스토피아 시대의 유토피아 찾기는 거주와 환경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농업유산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이유는, 농업유산은 바로 삶의 터전에서 피워낸 꽃이기 때문이다. 거주공간이자 경제적 기반으로 땅을 선택하고, 도시화,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역사를 쓴 이야기다.
그렇다면 농업유산이란 무엇이며, 부상하게 된 배경은 또 무엇인가. 어떤 가치와 정신을 담고 있는가.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가치는 현대화된 도시에도 유효한 것일까. 또한 농업유산의 한계와 과제는 무엇인가.
농업은 그동안 인간을 위한 식량 생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충실해 왔다. 현대화, 기계화, 대형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식량을 생산했고, 일각에선 ‘식량 안보’를 우려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먹을거리는 풍족하다.
그런데 배가 부르고 뒤를 돌아보니, 주변 환경이 예전과 같지 않다. 반딧불이와 같은 환경 친화적인 동식물들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각박해진 생태.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어떻게 해야 다시 예전과 같이 환경을 되살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고민에서 시작된 게 농업유산의 개념이다.
농업유산은 전통 농법을 고수하며, 보다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농업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을 발굴해 보전, 농업·농촌 자원을 유산화하는 작업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2002년 이후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을 주관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열망에 발맞춰 환경과의 동반 적응을 통해 생물 다양성이 잘 유지되고 있는 전통적 농업 지역을 차세대에게 계승한다”는 게 FAO가 밝힌 농업유산 제도의 목적이다.
세계중요농업유산과 별개로, 한국에서는 2013년부터 국가 중요 농업유산(이하 농업유산으로 통칭)을 발굴해 선정하고 있다. 배경은 비슷하다. 농촌에는 농업 활동과 관련된 오랜 전통과 유산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토 개발이 도시 중심의 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농촌의 자원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훼손돼 왔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농촌 지역 개발 정책의 전환기를 맞으면서 농촌 자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형성, 진화시켜 온 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적 농업 활동 시스템과 이 결과로서 나타난 유·무형 산물”에 대해 관리 보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청산도 구들장논을 시작으로 2017년 9월 현재 전국 7개 지역이 농업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지도 참고)
오충현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는 “농업유산은 농산물의 생산 기능보다는 전통적인 농업 방식이 친환경이나 생태 보전에 주는 효과를 중심으로 발달된 개념”이라며 “전통적인 농업 방식은 에너지나 농약 사용 등이 최소화되기 때문에 친환경이나 생태 보전은 담보될 수 있지만, 농업 소득을 담보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농업유산, 과거에서 찾은 미래
농업유산의 가치는 농업유산의 선정 기준에 따라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식량, 생계수단의 확보,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기능, 지식 시스템 및 적응 기술, 문화 가치체계 및 사회조직, 현저한 경관 등이 그것이다. 그중 최근 흐름을 반영한 핵심은 생태와 문화로 요약된다.
인간과 자연(생태), 인간과 인간(문화)의 치열한 관계 맺음으로 인해 동식물과 경관 등 주변으로까지 파생돼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방식이 농업유산이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다.
또한 농업유산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유성’, ‘정체성’으로 보인다. 한국의 농업유산 7개 지역은 5개의 선정 기준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유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만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자원이 있다. 그것은 ‘보전 속에 미래가 있다’는 미래 성장 전략과도 맥을 같이 한다.
윤원근 협성대 지역개발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무분별한 개발 방식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하면서 재생이나 보존의 가치를 점차 주목하고 있다”며 “특히 농업유산이 가지고 있는 보존의 가치는 미래 산업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성장의 동력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라고 말했다. 모든 경쟁 우위는 차이에서 온다. 다른 곳과 구분되는 강점과 차이점을 찾고 보존해 한국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것, 그것이 농업유산의 현대적 의미이지 않을까.
농업유산은 ‘과거에서 찾은 미래’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정체성을 바탕으로 미래의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는 툴(tool)이 된다. 농업유산의 태동 자체가 과거 농촌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농업유산을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에 과거를 돌아보는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미래 지향적인 가치, 즉 농업이 농민들의 생계유지에 기여하면서 주변의 생물 다양성과 독특한 경관, 문화 활동과 연결돼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미래 지향적이다.
최근 ‘팻 비즈니스’로 통용되는 동물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집 밖으로 확장하면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된다. 강에는 물고기가 살고, 산에는 나무가 있으며, 길에는 풀이 있다. 그렇게 다양한 생명체와 더불어 공생한다면,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공간을 마련할 것이며, 생태계는 건강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윤원근 교수는 “생명체의 복원은 우리 삶의 현장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로도 유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 모든 농업유산의 기술과 지혜는 ‘농업 시스템’에 모아진다. 농업 시스템은 기후나 지형적으로 도저히 농업을 할 수 없는 땅에, 인간의 각고의 노동력을 통해 무에서 유를 일궈냈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든 기적’인 셈이다. 가진 자원은 부족해도, 척박한 환경을 오히려 잘 활용해 기회로 활용한 농업유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해 보인다.
특히 농업유산은 문화유산과 달리, 특정 권력층이 아닌 평범한 민초들의 역사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 치열한 삶의 투쟁과 도전의 역사를 써 온 흔적이다. 그것이 다른 유산과 구분되는 농업유산의 차별적 가치이며, 농업유산 현장에서 주목해봐야 할 관전 포인트다.
글 이현주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농업유산, 가치의 깊이를 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