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이 만든 땅,삶의 여정 담긴 감동

이기채 구들장논보존협의회장은 한 번도 객지 생활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특별히 소득이 많아서 한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그냥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기채 구들장논보존협의회장은 한 번도 객지 생활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특별히 소득이 많아서 한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그냥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Farm Report = 사람과 땅, 농업유산]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만난 농업유산의 가치는 눈으로 보이는 절경, 풍경이 한눈에 드러나지 않았다. 층층이 돌을 쌓아 만든 구들장논과 같이 사람들의 이야기와 정보를 하나하나 쌓아 나갈 때 비로소 보이는 ‘논과 밭의 힘’이 있었다. 그것은 투박하지만 묵묵하고 강인한 힘, 정겹거나 혹은 담백한 미학이다. 청산도에 활짝 핀 유채꽃보다 토란잎을 다듬는 할머니와 그 뒤로 돌담, 담벼락에 핀 호박 두 개가 마음속 정서를 울릴 수 있다는 감동의 재발견이다.
[완도=한경 머니 이현주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수구도 있어요. 실제로 내가 들어가 봤다니까. 수구 안에 들어가면 넓어요. 옛날엔 어린애들이 그 안에서 많이 놀았어요.”
전남 완도군에서 남쪽으로 19km 떨어진 면적 42.7k㎡의 섬. 그곳에서 만난 이성식(57) 완도군청 계장은 말했다. 그의 손이 돌 사이에 난 작은 틈을 가리켰다. 크기가 30cm에서 2m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통수로’다. 물이 흘러내리는 물길인데 이를 두고 생태, 지역경제, 경관, 공학, 문화재 등 관련 전문가들이 이구동성 극찬을 쏟아냈었다. 왜일까. 과거로 시간을 돌이켜 누가, 왜 이것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청산도는 반농·반어촌 지역으로,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행 배를 타고 50여 분 이동해야 한다. 사진은 '서편제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청산도는 반농·반어촌 지역으로,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행 배를 타고 50여 분 이동해야 한다. 사진은 '서편제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청산도 권덕리와 청계리 경계에 위치한 155m의 높이의 범바위 앞에선 나침반도 방향을 잃어버린다. 이곳에서 청산도의 사면을 조망할 수 있다.
청산도 권덕리와 청계리 경계에 위치한 155m의 높이의 범바위 앞에선 나침반도 방향을 잃어버린다. 이곳에서 청산도의 사면을 조망할 수 있다.
평범한 논과 밭, 알고 보면 경이롭다
최근 몇 년 사이 청산도는 한 마디로 ‘뜨는 섬’이 됐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slow city)로,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된 ‘서편제길’과 노란 유채꽃으로 유명세를 알렸다. 꽃이 피고 축제가 열리는 봄이면 배편에 빈자리 하나 없다. 올해는 4월 한 달에만 9만여 명이 청산도를 방문해 최대 기록을 세웠다. 청산면 인구수 2000여 명의 45배에 해당하는 수가 한 달 사이 청산도 땅을 밟았다.
봄에 비해 가을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완도항에서 청산도행은 뱃길로 50분. ‘느린 섬’에 들어서면 보다 고즈넉한 발걸음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사람들은 배에서 내릴 것이다. 푸른 섬이라는 지명 뜻처럼 푸른 바다와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릴 터다. 슬로시티, 서편제, 유채꽃, 바다가 사람들의 시선과 감정을 잡아 끈다면 세계농업유산이자 국가중요농업유산인 구들장논을 보기 위해 섬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구들장논은 반농·반어촌 지역인 청산도 가운데 안쪽 산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리 단위로는 부흥리, 양지리, 상서리 일원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해안가를 뒤로하고 분지 형태의 좁은 산길에 들어서면 오밀조밀 형성된 마을과 주거지 주변으로 쭉 펼쳐진 논과 밭을 마주하게 된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파도 형태의 곡선이 피어나는 모양이다.
구들장논을 방문한 9월 초는 추수를 앞두고 벼가 무성해 있었다. 세계가 인정한 농업유산인 만큼 어떤 절경이나 다채로운 색감을 기대했다면 다소 심심해 보일지도 모른다.
‘산속에 있는 논’은 그 자체로 선조들의 지혜로 불린다.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해 만든 계단식논(다랑이논)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서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곳이 필리핀, 중국이다. 중국의 하니 계단식논과 필리핀 이푸가오 계단식논은 세계농업유산으로 먼저 지정된 곳들이다. 국내에도 지리산 일원이나 경남 산청군과 함양군 일원, 남해 해안 일부 지역, 기타 산간내륙 일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청산도의 구들장논은 이것과 이름이 다르다. ‘구들장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4년 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면서다. 국내 다랑이논 전문가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계단식논과 구분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농업유산으로서의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청산도의 농지는 ‘계단식논’과 ‘구들장논’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구들장논은, 청산도 전체 농지 887헥타르(ha) 중 69.4헥타르(7.8%)다. 위쪽에서 볼 때는 똑같이 벼가 무성해 구분하기 어렵지만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이성식 완도군청 계장은 “다랑이논은 주로 흙을 사용했다면 구들장논은 돌을 쓴 게 차이점이다”라고 설명했다. ‘돌 위에 만든 논’이다. 더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통수로의 유무다. 구들장논은 필지당 2~3개의 통수로가 존재한다. 계단식논과 달리 물이 논의 표면이 아닌 ‘지하’로 흐르도록 특별한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청산도 양지리 마을 초입에는 헐어진 구들장논으로 만든 모형이 놓여 있다. 논의 단면을 보면 아래에서부터 크게 총 4개의 층으로 구성돼 있다. 하단 자리는 지름 20~50cm 크기의 큰 돌들이다. 그 위로 구들을 놓아 공간을 확보한 정방형의 통수로가 있으며, 그 위에 작은 돌과 진흙층이 섞여 있다. 가장 상단엔 벼가 생육하는 토양층이 20~30cm 두께로 있었다. 구들장논 모형이 있는 양지리 일대는 향후 구들장논 탐방길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청산도는 예로부터 돌이 많고 흙이 부족한 데다 모래가 대부분인 사질 토양이다. 작물이 영양분을 받지 못할뿐더러 물이 다 빠져 나가는 환경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경사진 땅에 논을 만들 때 흙으로 메우질 못하고 돌을 쓴 거예요. 벼가 자라는 최소 부분만 얇은 층으로 흙을 깔고 그 아래는 돌과 진흙을 섞어 물이 밑으로 빠지지 않게 한 겁니다.” 이기채(60) 구들장논보존협의회장의 설명이다.
그런데 왜 구들장논일까. “옛날 온돌방을 생각하면 됩니다. 통수로 안에 들어가 보면 넓적한 돌이 머리 위에 있고 버텨주는 돌기둥이 있어요.” 방바닥 밑으로 구들장을 깔아 연기를 통과시키면서 방을 데우는 것에서 영감을 얻어, 토양 밑으로 구들장을 깔아 물이 흐르도록 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그것은 또한 물이 있는 수원지(계곡)와 물을 중심으로 위 논과 아래 논을 ‘연결’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산 위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효율적인 ‘연속 관계’를 통해 위 논에서 곧바로 아래 논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 두고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랑이논에 가면 앞이 안 보일 정도의 규모에 압도당한다면 청산도는 규모가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농업유산으로 선정이 된 것은 그만큼 기술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돌 위의 논',구들장논의 앞면.통수로의 유무로 다랑이논과 구들장논을 구분할 수 있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돌 위의 논',구들장논의 앞면.통수로의 유무로 다랑이논과 구들장논을 구분할 수 있다.
사람과 땅, 농업유산 - 청산도 구들장논
돌과 돌 틈의 풀들이 가진 미학
구들장논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를 보면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구들장논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대개 산 위쪽이다. 평야 지대에 가까운 곳은 계단식논이다. 평야에 가깝고 흙이 있는 곳은 계단식으로 조성할 수 있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토질이 좋지 않고 보이는 건 돌산뿐이다. 그래서 없는 논을 만든 것이다.
작물이 자라는 데는 물과 햇볕뿐만 아니라 땅에서 올라오는 열도 중요하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합성만 있을 뿐 다른 논과 비교할 때 공중에 붕 떠 있는 형태로 지열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 차가운 계곡물이 닿으면 벼가 냉해를 입는다.
김미경 문화해설사는 ‘샛똘(논을 감싸는 형태의 돌길)’을 보여주며, “이건 농사를 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위에서 내려온 물은 샛돌을 한 번 감고 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물의 온도를 높여 냉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농사에 필요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대응하고, 채워 나가는 방식으로 오늘날 눈에 보이는 구들장논은 완성됐다.
남도 끝의 섬 지역에 누가 어떤 이유로 들어와 살게 됐는지 정확한 시작 시점은 기록에 없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청산도 입도 시기는 조선 후기(16세기 말)부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하인 함양 박씨가 부흥리 지역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1610년 제주 양씨가 구들장논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더해 구들장논의 조성 시기를 300~4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이기채 구들장논보존협의회장의 경우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평생 살았고, 한 번도 객지 생활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입대조(入代祖)가 그로부터 9대다. “나도 족보가 조금 되는 편이다”라고 웃는 그는 “1대를 30년으로 볼 때, 300년은 족히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상상해보자. 사람들이 육지에서 섬으로 이주할 때, 아마도 더 가진 사람은 더 좋은 땅에 자리했을 것이다.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또한 산 안쪽으로는 아래 평야 지대부터 집을 짓고 땅을 일궜을 것이다. 그마저도 얻지 못하면 땅 한 평을 얻기 위해 괭이를 들고 산으로 갔을 것이다. 농지는 그렇게 아래에서부터 점차 위쪽으로 개간이 됐을 것이다.
육지에서 이주해 청산도에 거주한 지 20년이 됐다고 하는 김미경 해설사는 이렇게 말한다. “양지마을을 기준으로 보면 앞쪽에 바다가 없죠. 400년 전에 이곳에 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분은 섬에 살지만 바다를 전혀 못 보고 일생을 살았던 주민도 있었을 거예요. 이분들도 바다를 꿈꿨을 거예요. 길이 없는 시절에 바다를 찾아서 뒤로도 가봤을 테고, 발견도 해봤지만 이미 그 앞에는 다른 마을이 있는 거예요. 양지마을은 섬 안에 살지만 바다를 내 맘대로 재산권으로 행사할 수 없는 분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운명적으로 땅에 기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요. 그분들 앞의 논은 계단식논이거든요. 너무 부러운 거예요. 뒤쪽 땅은 돌밖에 없는데, 물이 다 빠져나가니까 쌀농사를 못 짓는 거예요.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죽으나 사나 농사를 지어야 했고 논을 만들어야 했겠죠.”
그럼 왜 굳이 밭이 아닌 논이어야 했을까. 청산도는 그 옛날 육지와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섬 안에서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쌀은 해산물보다 귀한 음식이었다. 청산도에 지금까지 내려오는 ‘청산도탕’은 해물에 쌀을 조금 섞어 밥처럼 먹는 음식이다. 오늘날과 다른 쌀의 의미가 그들에겐 있었다.
“지금은 3부 능선 정도밖에 안 보이지만 저 산위에 7~8부 능선에까지 구들장논의 흔적이 있어요. 거기까지도 개간을 해서 농사를 지은 거예요. 저는 지금도 산에 올라가면 눈물이 나는 게 어느 시절에 누군가가 와서 지게를 지고 내 땅이라고 했던 흔적이 있어요. 밭이건 논이건 돌담을 쌓아 놓은 흔적을 보거든요. 어떤 부부가 자식새끼를 낳고, 고구마, 감자 같은 것을 삶아서 첫새벽에서부터 지게를 지고 올라와 돌을 골라내고 해질 무렵 다시 집에 가서 피곤한 몸을 뉘이면서 ‘오늘 내가 이만큼 땅을 일궜다’ 하는 마음은 당장 나 혼자 먹고 살려는 건 아니었을 거예요. 구들장논을 만들었던 어르신들이 자신의 후손을 위해 이 땅을 만든 거예요. ‘내 자손들에게만은 이 땅을 물려줘야겠다’는 마음에서 고생스럽게 만들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 그 마음을 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지나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그들만의 문화도 여전하다. 그중 하나가 초분 문화다. 땅을 다시 돌아갈 땅, 골토로 여기는 것이다. 이기태 회장은 청산도의 장례 문화에 대해 “바로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고, 땅 위에서 3년간 있다가 깨끗한 상태로 땅 안으로 들어갑니다. 얼마 전엔 육지에서 화장을 한 경우가 있었는데, 어르신들이 동네 회의를 통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해서 다시 초상을 제대로 치르는 일도 있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청산도에도 한때는 1만5000명의 사람이 살았다. 초등학교에는 3000명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았다. 그들을 교육시켜 육지로, 서울로 보낸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의 아버지가 청산도 구들장논을 만든 주역들이다. 돌 위의 논은 그야말로 절박함이 만든 기적이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 이후로, 이곳은 점차 인구수가 줄고 있다. 특히 농가 수는 그 수가 급격히 줄뿐더러 고령화로 인해 다음 세대로의 전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평균 나이 70대. 이대로 향후 10년이 흐른다면 유산으로서 구들장논의 가치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이미 농사를 짓지 못해 휴경지가 된 곳들이 점차 늘고 있는 현실이다. 구들장논의 휴경지가 늘어나고 유산적 가치가 훼손되면서 세계중요농업유산 모니터링 점검에서 지정이 취소될 위기에 처해 있다.
농촌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군에서 마련한 방안이 ‘구들장논 오너제’다. 연 3만 원이면, 구들장논에서 만든 쌀과 밭에서 나온 여러 작물을 받아볼 수 있다. 실제 오너제를 이용하고 있는 백승석 한국농어촌공사 과장의 말이다. “구들장논은 아무래도 물 빠짐이 있기 때문에 쌀의 품질이 최고라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품질 좋은 쌀을 먹는다고 하면 일본에서 수입해서 먹고, 넓은 평야 지대에서 나온 쌀을 먹죠. 소비자 입장에서 구들장논에서 생산된 쌀을 받을 때는 단순한 쌀이 아닌 오랜 시간 쌓여 온 삶의 자취가 담긴 하나의 유산으로 받는 거예요. 모르면 단순한 논이고 쌀이지만, 알고 보면 폭풍 같은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청산도 청계리, 양지리, 부흥리, 상서리에 구들장논이 특히 밀집돼 있다.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 가운에 75~79세에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있다.
청산도 청계리, 양지리, 부흥리, 상서리에 구들장논이 특히 밀집돼 있다.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 가운에 75~79세에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있다.
산길을 타고 분지 형태의 지형으로 들어서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수백 년 전,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구들장논이 개간돼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길을 타고 분지 형태의 지형으로 들어서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수백 년 전,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구들장논이 개간돼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지에 보이는 논은 구들장논은 아니다. 구들장논은 산곳 곳곳에 조성돼 있는데, 8부 능선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평지에 보이는 논은 구들장논은 아니다. 구들장논은 산곳 곳곳에 조성돼 있는데, 8부 능선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