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들의 백세인 모시기
RETIREMENT ● Longevity
[한경 머니 =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웰에이징연구센터장·석좌교수]

장수인 조사를 하면서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숙제는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인 효(孝)라는 개념의 현대화다. 나이 들고 심신이 불편한 분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분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당연한 가족의 일이었지만 점차 세상이 변하면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사는 일도 어려워지고, 자식이 없는 가정도 많아지면서 사회의 역할이 강조되고 경제적 부담이 크게 확대돼 가고 있다. 따라서 백세인 조사를 하면서 만나게 된 효도 사례들을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백세인의 경우는 자식의 나이가 이미 일흔, 여든에 이르기 때문에 나이 든 자식들이 어떻게 모시는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효도의 대표 사례로 거론돼 온 노래자(老萊子)의 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늙은 자식이 더 늙으신 부모를 모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노래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은자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흔이 넘은 부친을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추었고, 그릇을 들고 가다 어린애처럼 넘어지는 시늉을 해 부친에게 아직도 자식을 귀엽게 여기도록 하는 효도를 했기에 ‘노래반의(老來斑衣)’라는 고사를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로 농암(聾巖) 이현보가 있다. 농암도 일흔이 넘어서 100세 가까운 부친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으며, 더 나아가 지역의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재롱잔치를 열어드린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는 지역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지극한 효의 사례들을 보면서 한 가닥 안도의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전북 순창군 구림면 자양마을 백세인 유귀례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 부모형제들이 모두 아흔이 넘도록 장수한 보기 드문 대표적 장수 집안이었다. 유 할머니는 인상도 곱고, 말씀도 도란도란 잘해 조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도중에 며느리와 면담하던 조사원이 다가와 알려주었다. “이 가족은 매우 흥미로워요. 할머니와 아들 내외가 한 방에서 잔대요.” 일흔이 넘은 셋째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어머님이 질투가 많으신가 봐요. 자식 내외와 같이 자자고 하다니?” 며느리는 무슨 소리냐며 실은 어머니 연세가 여든이 됐을 때부터 혹시 주무시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아들 내외가 모시고 자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년 넘게 한결같이 한 방에서 모시고 잤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러한 일이! 어르신이 주무시다 혹시 사고가 날까 걱정해 생활의 불편함을 모두 떨어 버리고 이런 삶을 기꺼이 택한 것이었다.

아, 이것이 바로 효로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지금도 돈이 생기면 1000원짜리로 바꾸어 두었다가, 손주들이 왔다 갈 때면 1000원씩 나누어준다며 시어머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도 “아들이 잘하니, 며느리도 잘하고, 손주들도 잘해”라며 자식들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고부간에 서로를 칭찬하는 모습은 그렇게 흔한 풍광은 아니었다. 당신의 고희에 큰 손주가 사다준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자랑하며, 어려운 살림에도 큰 손주가 동생들을 교육시켜 유학도 보내고, 공무원도 되게 한 공로를 할머니는 잊지 않고 칭찬했다.

더욱 도시에 사는 증손자들이 찾아오면 서로 상할머니에게 다가와 그 곁에서 자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더더욱 놀라웠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부모가 받드는 효를 그대로 이어받은 손자, 증손자들의 가족사랑은 가슴으로부터 마냥 ‘어머니,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원 안흥면 산골 허름한 집에서 만난 백세인 윤명섭 옹은 밭일, 논일을 스스로 하고 장날마다 버스를 타고 나들이 나가 일을 보고 있었다. 윤 할아버지는 “살다 보니 너무 오래 살았어” 하면서 당신과 가까이 지내던 위친계 회원이 30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저승으로 가버렸다고 서운해했다.

백세인을 돌보는 아들은 부인이 집을 떠나버려 혼자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아들이 버거씨 병을 앓아 오른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은 지체장애인인 데도 불평 하나 하지 않고 아버지를 모신다는 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한꺼번에 식사를 많이 못한다고 하루에도 다섯 끼나 식사 상을 봐드렸으며, 제대로 반찬 대접을 못해 송구하다고 했다. 지금도 적은 액수나마 수입이 생기면 모두 아버지에게 드리고 이후 조금씩 필요한 만큼 타다 쓰고 있었다.

아직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자 “어른이 그래야 좋아하셔서 그냥 그런다”라며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반문했다. 온전한 사지를 갖춘 자식도 어려울 터인데, 그리고 일반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어도 힘들 일인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질문한 내가 참으로 부끄럽기만 했다.

으레 ‘돈이나 많이 생겼으면’, ‘깨끗한 집이나 있었으면’ 하는 통속적인 답을 기대했던 필자에게 아들은 “우리 아버지 건강하셔야 할 텐데.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며 우선 아버지가 건강하게 천수를 다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환경인데도 본인의 지체 부자유함은 전연 개의치 않고 오로지 백세가 되신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비는 자식의 참된 모습은 효의 진수가 아닐 수 없었다.

백세인을 모시는 자식이 일흔, 여든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심을 다해 어르신을 모시고 그러면서도 더 지극히 모시지 못함을 탓하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참된 효가 여직 남아 있음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이러한 봉양의 방법이 장수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노노케어(老老 care)의 전형이라고 본다. 결국은 모두가 장수하는 세상에서는 나이 덜 든 사람이 더 든 사람을 봉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 덜 든 노인이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이 든 어른을 모신다는 정성의 마음을 다지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고 본다.

옛날 고사에 나오는 노래자의 효도나 농암의 효도에 못지않게 우리 서민들의 가정에 뿌리 박혀 있는 참다운 효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훈훈한 전통이 보다 널리 파급된다면 눈앞에 성큼 찾아오는 초고령 장수 시대의 문제들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