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비운 가족경영으로 세계 시장 ‘문’ 연다
인터뷰/ (주)삼선CSA 노진복 회장·노홍동 대표·노홍제 상무

[한경 머니=이윤경 객원기자 ](주)삼선CSA는 1982년 설립된 방화문 제조업체다. 창업자 노진복(76) 회장의 선조들이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창호문을 생산한 이력까지 더하면 대대손손 ‘문’을 만들어 온 세월이 60년을 훌쩍 넘는다.

삼선CSA의 흔들림 없는 성장 배경에는 회사 곳곳에서 든든하게 제 몫을 하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

경기 김포시 양촌읍에 위치한 삼선CSA의 본사. 사방에 방화문이 설치돼 있어 사무실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제품을 볼 수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그중 가장 견고한 ‘문’이 열렸다. ‘문(門)의 대가’ 노진복 회장이 들어왔다.

세월과 충격에도 끄떡없는 방화문처럼 70대 후반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활력과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뒤이어 삼선CSA의 대표이사인 큰아들 노홍동 대표와 기업부설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차남 노홍제 상무이사가 자리에 함께했다. ‘연륜’의 1세대와 ‘혁신’의 2세대, 그들이 써 내려가고 있는 세대교체기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창호에서 방화문까지 집념의 세월

방화문은 불이 났을 때 불꽃과 유해물질이 집 안으로 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설계된 주택의 현관문이다. 삼선CSA의 방화문은 현대건설, 롯데건설, 대림산업, 현대산업개발, GS건설 등 국내외 대형 건설사에 납품돼 이들이 짓는 초고층 아파트에 사용된다.

지난 30여 년간 시장에서 신뢰가 쌓아 왔으며, 완벽한 제품을 만들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일념으로 업계 최초로 KS인증을 받는 등 경쟁력을 키워 왔다. 계열사인 삼선알미늄과 삼선CSA의 연간 매출은 1000억 원 규모. “1993년에 한 차례 부도를 겪은 뒤 무차입 경영을 하면서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출이 상승했다”고 노홍제 상무가 귀띔했다.

삼선CSA의 역사는 1960년대 창호지 가내수공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진복 회장의 일가친척들은 고향인 의령 봉수에서 창호문과 장판을 만들어 팔았다. 그 덕분에 농토는 없어도 시골에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노 회장은 더 큰 꿈을 펼치고자 상경해 알루미늄 공장에 취직했다. 영업직군에서 낮밤 없이 일하며 그는 대한민국 건설 붐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1980년대 초반은 서울 곳곳에 고층 빌딩이 올라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현대식 건물과 주택에 쓰이는 문은 철제로 만들어져 불이 나면 피해가 무지막지했다. 이에 노 회장은 방화문 연구에 돌입했다.

“화재 시 화염이 금방 집 내부로 옮겨 붙으니 방화문 설치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대두됐죠. 특히 아파트에 견고한 방화문 설치가 시급하다는 생각에 유럽 등 선진국의 일급 호텔들을 둘러보며 방화문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내 가족들이 살 집에 달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문을 만들어보자. 이것이 목표가 됐죠.”

1982년에 삼선강건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제품력에 승부를 걸었고 타고난 감각으로 주택과 건설 시장의 트렌드를 읽어 나갔다. 도어의 3면 또는 4면에 풍소란(바람을 막아주는 날개)을 적용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소음을 차단시키는 성능을 향상시켜 방화문업계 최초로 KS인증을 받는 등 차곡차곡 그 명성을 쌓으며, 6대 대형 건설사들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았다.

“촌사람이라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남 탓 안 하고 참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영업사원 시절엔 눈 감고도 서울 지리를 다 외울 정도로 열심히 뛰었고요. 어느 건설사가 어디에 어떤 아파트를 짓는지 정보를 캐치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던 습관이 사업을 하면서도 많은 도움이 됐죠.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에는 소홀하면서도 제품력만은 최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한 발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집사람한테도 많이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웃음) 그럼에도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가 뒤따른다는 걸 직원들에게 몸소 증명해 보이는 데는 성공했지요.”

1993년 예상치 못한 큰 부도로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 노 회장은 돈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는 지금까지 빚 없이 사업을 하는 것과 어떤 세금이든 제대로 낸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윤이 생기면 재투자를 했다. 더 많은 물량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구축한 덕분에 문 닫는 기업이 속출하던 IMF 외환위기 때 삼선 CSA는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회장님께서 솔선하시니 직원들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젠 조금씩 일을 내려놓으실 법도 한데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셔서 저희도 따라가기 숨찰 정도죠. 특히 중소기업은 사장이 모든 걸 알아야 직원들이 따라주기 때문에 부지런함이 미덕임을 늘 강조하십니다. 나그네에게 하나를 시키려면 주인이 99의 몫을 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새기고 있죠.”_노홍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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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아들·조카와 함께 키우다

삼선CSA가 2세 경영 기업으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던 건 자기 자리에서 묵묵하게 제 역할을 해주었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진복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바닥부터 일을 배워 온 동생과 아들들, 조카들의 하모니는 오늘날 삼선CSA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홍동 대표와 노홍제 상무는 대학 시절 현장에서 철판 나르는 일부터 배웠다. 노 회장은 아들들에게 시련을 겪어봐야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는 법이라며 회사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을 번갈아 가며 맡겼다.

“그 덕분에 저희 형제는 방화문을 들쳐 메는 덴 선수죠.(웃음) 둘 다 공장에서 10년씩 일을 하며 기반을 닦고, 4년 동안 영업을 배웠습니다. 현장의 경험들이 경영하는 데 밑거름이 됐죠.”_노홍제 상무

노진복 회장은 창업주가 힘들게 세운 기업이 후대로 지속되지 못하고 문을 닫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면서 함께 일하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첫째도 둘째도 화합을 강조했다. 그 옛날, 고향에서 친지들이 서로 협력하며 일을 하던 모습이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가족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책무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매년 명절 때는 온 식구들 3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릴 만큼 사이가 돈독하다.
욕심 비운 가족경영으로 세계 시장 ‘문’ 연다
노홍동 대표는 “누구 한 명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미덕이자 자랑”이라며 “조카인 내가 대표이사직을 맡는다고 했을 때 부사장이신 삼촌께서 열심히 응원해주셨고 이 같은 믿음에 부응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화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는 직원들에게 내리사랑으로 전달된다. 노 회장은 지난 30여 년간 수많은 고비를 같이 넘어온 직원들에게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다. 노 회장과 40년째 함께하고 있는 최고령 전무는 올해로 67세다. 노 회장은 신구의 조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신구 경영진들이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없죠. 1세대들의 경험치와 해결 능력에다 2세대의 새로운 시각과 실행력이 접목돼 긍정적인 시너지를 낸다고 할까요. 물론 사고방식이 달라서 의견 충돌도 있지만 고충으로 여기기보다는 세대교체의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삼선CAS는 공격적인 투자로 자동화 설비를 구축해 생산량을 향상시키고 있으며, R&D 기술연구소에서 끊입없는 연구개발로 제품성능을 확보하고 있다.

노홍제 상무가 맡고 있는 기업부설연구소에서는 삼선의 미래 먹을거리를 위한 연구·개발(R&D)이 한창 이뤄지고 있다. 한계가 뚜렷한 국내 시장을 넘어 베트남, 몽골, 러시아 등 해외로 시장을 확장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여전히 깡통문을 사용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한국의 고성능 방화문이 경쟁력을 지닌다. 삼선CSA는 각 나라별 특색에 맞춰 방화문 안에 들어가는 신소재를 연구·개발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보금자리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께서는 문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받쳐오셨죠. 회장님의 신념과 가치를 후대에까지 이어가는 것이 저희의 사명이자 목표입니다.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를 무대로 명실상부한 창호와 방화문의 대표 브랜드가 되도록 기술력으로 승부를 볼 겁니다.”_노홍동 대표

이윤경 객원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