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ffalo 1, 스테인리스 스틸에 타이어, 600×210×230cm, 2010년
Buffalo 1, 스테인리스 스틸에 타이어, 600×210×230cm, 2010년
LIFE &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지용호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거대한 검은 짐승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떡 하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형상은 사자보다 더 거칠고, 버팔로보다 더 육중하다. 모두 폐타이어로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의 조각이다. 이것이 지용호 조각의 트레이드마크다. 일부 기사에선 ‘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조각가’ 혹은 ‘폐타이어 조각가 지용호’라고도 언급했다.

분명 지용호 작가는 유명하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 대학원 시절, 2007년 11월 뉴욕 필립스 경매에서 그의 작품 <상어(Shark)>가 무려 14만5000달러(약 1억7000만 원)에 낙찰돼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지 작가의 조각 작품은 홍콩의 타임스퀘어 광장,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포뮬러원(F1) 경기장, 스페인 아르코아트페어, 크리스티와 필립스 경매 등 전 미술 영역을 넘나들며 작품성과 상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처음부터 조각가가 꿈은 아니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무엇을 만들거나 그림을 많이 그렸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고향인 춘천엔 조소를 가르치는 미술학원도 없었으며, 그나마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미술학원에 처음 다녔다. 처음엔 수채화나 디자인을 하다가 3학년이 돼서야 서울에서 내려온 조소 선생님을 만나며 지금의 전공으로 바꾸게 됐다. 결국 늦은 시작에 입시 미술학원의 메카 홍익대 앞에서 재수를 거쳐 홍익대 조소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도 쉽지만은 않았다. 조소 작업은 다른 전공보다 돈이 더 필요했다. 처음엔 안정된 작품 활동을 위해 교수가 되길 기대했고, 교수가 되기 위해선 유학 경력을 쌓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떠났다. 늦깎이 졸업생 28세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세계 미술의 메이저리그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에야 어렵게 간 뉴욕에 체류할 목적으로 대학원을 준비했다고 쉽게 말하지만, 뉴욕대 대학원 시절은 지 작가에게 작가로서의 결정적 터닝포인트가 된다.

젊음의 열정 하나만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 제대로 꽂혔다. 운도 좋았다. 뉴욕 첼시에 있던 서울의 가나갤러리 레지던시 작업실을 지원받게 된다. 월세가 무려 1500만 원이 넘는 작업실을 혼자 쓰는 행운도 누렸다. 마침 한국 미술 시장이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맞았던 틈을 타 가나갤러리가 뉴욕에 지점을 개설하며 비즈니스 장을 확장했던 덕분이다. 신분은 대학원생이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갤러리의 전속작가, 뉴욕 메이저급 경매에서 큰 인기까지 거머쥔 성공한 젊은 작가의 아이콘이 됐다.

지용호가 스타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뮤턴트(mutant, 변종)’ 시리즈 덕분이다. 지 작가의 뮤턴트 시리즈는 ‘정말 강한 놈’의 상징이다. 2000년 초반 대학 졸업 작품 시즌부터 시작된 이 작품들은 ‘자존감을 대신하는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역경이나 힘겨운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보다 강인한 자신을 만들어내자는 주문의 결과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롭고 강력한 생명체의 창조였다. 마치 사라졌던 고생대에서 환생했거나, 저 멀리 깊은 우주 공간에서 옮겨온 듯 생경한 생물체를 마주하는 용기까지 보여주었다.
Jaguar 1, 스테인리스 스틸에 타이어, 98×59×47cm, 2003년, 작가 소장
Jaguar 1, 스테인리스 스틸에 타이어, 98×59×47cm, 2003년, 작가 소장
지 작가의 변종 동물 형상은 크기가 대개 압도적이다. 유사한 실제 동물보다 1.5배 정도 덩치가 크거나 근육이 눈에 띄게 발달해 있다. 또한 동세도 유달리 날렵해 보이고, 날카로운 이빨과 어우러져 더욱 거칠어 보인다. 말 그대로 특유의 동물적 원성만을 골라 진화한 상태다. 지 작가는 이처럼 날것의 감성과 질감을 연출하기 위해 특별한 소재를 찾아냈다. 흙이나 브론즈 같은 일상적인 조소의 재료가 아닌, ‘완전히 살아 있는 느낌의 재료’가 필요했다. 신화 속이나 또 다른 차원에서 왔을 법한 변이된 생명체의 피부 질감을 고스란히 전해줄 오브제여야 했다.

그렇게 선택된 재료가 바로 ‘타이어’였다. 지 작가에게 온갖 타이어는 제각각의 생명체들을 대변할 피부로 보였다. 가령 트랙터 바퀴의 타이어는 동물의 척추 등뼈나 가슴 근육이 되고, 지프차 타이어는 선 굵은 근육들, 자전거 타이어는 부드러운 뱃살이나 연한 피부조직 등으로 간별하는 식이다. 타이어 감별사가 따로 없다. 비록 버려진 폐타이어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평생을 달려야 하는 숙명으로 태어난 타이어가 생을 다해 버려졌지만, 지용호 감별사의 손끝에서 원시적 역동성을 지닌 생명으로 되살아났다.

그의 작품을 재료적인 특성으로 구분해보면 크게 ‘타이어, 전복 껍질, 유화 물감’ 등 세 가지 패턴으로 나눠진다. 우선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작한 폐타이어 시리즈는 15년 정도 이어온 ‘지용호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한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대상을 작가적 조형 감각으로 일정하게 변형 혹은 재현한 작품들이다. 이어서 5년 좀 넘은 전복 껍질 시리즈는 일명 ‘오리진 시리즈’의 작품이다. 일상적인 대상에서 모티브를 참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보는 이에 따라 가오리를 닮은 심해(深海)의 생명체나 미확인 비행체인 우주선을 연상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최근엔 새롭게 ‘유화조각(油畵彫刻)’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전 작품과 결별한 것은 아니다. 초기 폐타이어의 뮤턴트 시리즈, 중기 조개(전복) 껍질의 오리진 시리즈의 연장선이다. 얼핏 시각적으론 다르게 보여도 그 이면은 ‘윤회의 고리’처럼 하나의 큰 줄기로 통한다. 제3자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과 별개로 오로지 작가로서의 ‘창조적 감각’을 좇는 여정인 셈이다. 아마도 가장 최근에 완성한 ‘고흐 조각’이 좋은 예다. 조각과 회화, 입체와 평면 등의 상대적 차원의 경계를 넘나들고 병합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적 표현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뇌가 손끝에 있다는 말도 합니다. 저 역시 손끝에서 오는 감각이나 살아 있는 느낌을 중요시합니다. 결국 손맛의 작품인 셈이죠. 요즘 미술계를 보면, 개념 예술의 경향이 강세라 하지만, 저는 ‘개념 이전의 감각’을 더 우선합니다. 모든 콘셉트(conceot)도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마치 고흐가 그랬듯, 느낀 것을 그냥 손끝으로 만들고 그리다 보면,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것들이 더 큰 감동을 전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요?”

지 작가의 감각 좇기는 어쩌면 경직된 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결연한 항거 의지의 표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선 지극히 전통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디테일, 형언하기 힘든 역동성과 숨겨진 힘이 동시에 감지된다. 그것은 조각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작업의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입체 작품이 지닌 ‘눈속임 없이 그대로 드러냄’의 미학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스타일의 작업을 시리즈별로 보여주고 있지만, 흔들림이 전혀 없다. 특정한 유행이나 겉보기의 얇은 주제에 안주하지 않고, 그 너머의 ‘예술이 지닌 순수 미감의 근원’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 작가 작품의 가격은 흉상 크기가 보통 3000만 원 내외, 등신상 크기가 4000만~5000만 원 선이다.
폐타이어·유화 물감, 원초적 감각으로 환생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세종대 겸임교수,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