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Nature, 캔버스에 아크릴릭·자개, 70×70cm, 2016년
After Nature, 캔버스에 아크릴릭·자개, 70×70cm, 2016년
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박희섭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별은 어둠 없이 빛나지 않는다.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 나만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별빛과 가장 닮은 재료 중 아마도 금조개가 으뜸이겠다. 껍데기가 금빛처럼 윤이 나서 주로 자개를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전복의 껍데기다. 흔히 전통적 공예 재료로 여겨지던 나전을 접목시켜, 독창적인 회화 양식을 만들어낸 작가를 꼽으라면 박희섭이 빠지지 않는다. 박희섭은 나전(螺鈿) 기법을 활용해 ‘특별한 정원(庭園)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 제목은 <애프터 네이처(After Nature)>다. 우리가 아는 자연에 대한 단상 그 너머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오묘한 빛을 지닌 자개를 주된 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개는 조개껍질의 가장 안쪽, 조개의 은밀한 내부지요. 조개껍질의 투박하고 단조로운 바깥과는 달리 그 내부는 수백 년 동안에도 변치 않은 신비하고 영롱한 빛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자체가 오묘한 자연입니다. 저는 그 자개를 시간을 초월해 자연과의 동화를 염원하는 소재로 보았습니다.”

자개는 무지갯빛을 발하는 특유의 색광(色光) 현상으로 존재감이 돋보인다. 자개가 지닌 이 특유의 매력과 흡입력은 박희섭 작가의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박 작가가 자개를 사용한 지는 1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엔 오방색을 기본으로 한 한지 바탕에 자개를 수천 개의 선 또는 점으로 이어 붙이다가, 지금은 캔버스 천에 자개와 아크릴 채색을 혼용한다. 물론 여전히 자개가 주인공이며, 나전기법을 활용한다. 전통적인 나전기법 중에 원하는 문양을 아교나 풀로 붙이는 첩부법(貼附法)이나 나전을 잘게 썰어 뿌려 붙이는 살부법(撒附法) 등을 적절하게 응용한 기법을 구사한다.

전통과 현대, 수공과 자연, 독특한 질감과 오묘한 빛깔, 집중과 반복. 박 작가의 작품을 만났을 때 떠오르는 인상들이다. 지극히 동양적인 재료와 소재로 노동집약적인 장인정신의 덕목을 갖췄으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의 세련미까지 품고 있다. 아마도 그 안엔 ‘자연의 영원성’ 혹은 ‘끝나지 않은 꿈’이라는 동양정신의 이상향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작품엔 동양의 선비들이 감상하길 즐겼던 괴석(怪石)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괴석은 단순한 암석이 아니라, 자연의 감정을 드러낸 거울과도 같은 신비한 존재감이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돌과 바위를 무척 좋아했다.

중국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 왕춘천(王春晨) 교수는 “박희섭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심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캐치해 한국풍의 회화 양식을 창조해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작가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예스럽고 오래된 소재로 작가만의 독창적이고 이상적인 ‘자개산수 정원’을 연출해냈다. 동양에서 정원 (庭園)은 참 남다른 정서를 자극한다. 왜 그런 동양의 정원엔 나무와 돌, 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까. 박희섭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정원엔 어떤 비밀이 담겼을까.

“동양에서 정원이 갖는 존재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닌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 흡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정원에 담고 있다고 합니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물의 정원 속에서 자신들이 유토피아로 통하는 신선의 세계, 곧 ‘동천(洞天)’에 들어가는 것을 꿈꾼 것으로 해석됩니다. 자개는 이미 생명을 다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그 영롱함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개를 사용해 나무와 괴석, 물과 같은 정원의 소재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이 정원에서 찾고자 했던 자연의 힘을 제 작품에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작품을 통해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오늘날 우리 영혼의 안식처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박 작가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타고난 색채 감각이다. 바탕색은 화려하고 강렬하지만 시각적으로 전혀 피로감이 없다. 왠지 모를 고급스런 격이 느껴지면서도 검박한 끌림이 공존한다. 그의 남다른 색채감은 유년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오랫동안 전통 주단(紬緞)집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다. 한복이 지닌 유려한 발색의 묘미를 체득한 덕분이다. 한복의 색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반해 한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전통 염색 수업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보면 박 작가만의 색채 DNA 태동은 40여 년이 된 셈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굉장한 집중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특유의 청아한 발색이 돋보이는 바탕색부터 쉽게 얻어지질 않는다. 간단히 요약하면,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옅게 칠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한다. 마치 한국화의 전통 채색화 밑 작업 기법과 투명 수채화의 특성을 합친 격이다. 의도한 바탕 색채를 얻은 다음에 자개를 붙여 나간다. 이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화폭 위에 수백, 수천의 점 또는 선의 자개들을 하나하나 아교(阿膠)를 사용해 붙여 나간다. 공필화(工筆畵)에서 수차례를 반복하며 선염하는 방식과도 흡사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시간을 낚다 보면 어느새 신묘(神妙)한 나무와 괴석, 물과 바람 같은 정원의 소재들이 형상을 드러낸다.
박희섭 작가의 전시 전경. 2015년 베이징 L갤러리 개인전
박희섭 작가의 전시 전경. 2015년 베이징 L갤러리 개인전
그림에서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나무와 괴석이 만나는 장면이다. 정확히는 나무뿌리가 괴석을 한 몸처럼 휘감고 있는 형국이 범상치 않다. 얼핏 오랜 세월 동안 바위 위에서 자란 반얀트리가 연상되지만, 박희섭의 동체화(同體化)는 전혀 다른 해석이어야 한다. 오히려 자연의 기원을 보여주는 듯하다. 돌과 나무가 제각각 무생물과 생물을 대표해 한 몸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꿈에 그린 이상향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대지(大地)와 대기(大氣)의 기운이 만난 것처럼 우주만물의 구성을 대신한다. 화면 전체에 점점이 흩어진 빛의 파편들은 시공을 초월해 넘다드는 바람의 흔적이며, 생명의 숨결이 된다.

“어느 시기, 어느 지역을 떠나 지금까지 미술사에 작게라도 이름을 올린 화가들은 분명히 그 지역 상황에 맞는 시대정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수묵화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그 후 입체나 설치 작업에도 도전해 왔습니다. 현재의 자개 작업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재료나 어떠한 기법이든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변화에 두려움 없이 창작의 도전 의지를 실천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박 작가는 지난 2008년부터 중국 베이징에 상주하며 창작 활동 중이다. 이미 중화권에서 수차례의 개인전과 많은 단체전에 참가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활동 배경이 동양의 정신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지에 적잖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올해엔 한국과 중화권 아트페어 몇 곳에 참여하고, 내년엔 3년여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작품 가격을 지난 2011년 동산방화랑 개인전과 비교하면, 10호(53×45.4cm) 크기는 150만 원에서 200만 원, 50호(116.7×90.9cm)는 700만 원에서 1000만 원, 100호(162.2×130.3cm)는 1300만 원에서 1700만 원 등으로 형성돼 있다.
자개로 재구성한 영혼의 안식처 ‘정원’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