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지가 따로 형성되지도 않았고, 중세의 고풍스러운 느낌을 가질 만한 골목 하나 제대로 없는 곳, 그래서 꽤 많은 유럽 사람들은 런던을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도시’라고 부르지만 반년만 살아보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임을 발견하게 된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런던 타워는 1066년 처음 건설된 후 감옥과 병기고, 왕실의 보물 창고 등으로 사용됐다. 타워 브리지를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인 데다가 템스강 유람선 선착장도 있어서 늘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런던 타워 브리지는 런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1892년에 완공됐다. 지금도 화물선이 지나가면 다리가 83도까지 올라가는 개폐교다. 미국의 한 억만장자가 런던 브리지를 구입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시 재정이 어려웠던 런던시는 매각을 고민했었지만 런던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경 머니 기고 = 이석원 여행전문기자] 인구 820만 명, 영국의 수도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다.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고작 350만 명, 파리(230만 명)나 로마(270만 명), 마드리드(330만 명)와 비교해도 런던은 엄청나게 큰 도시다.

게다가 유럽의 주요한 도시 중 마천루라고 할 만한 고층 건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런던이 유일하다. 런던을 볼 때마다 유럽의 대도시 중 서울과 가장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곳이 많기 때문이다. 런던은 독일의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됐고, 전쟁이 끝난 후 재건됐다.

그런데 런던은 완전히 또 다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낡은 옷을 벗어 던진 새로운 유럽’이니 ‘유럽에서 가장 활력 넘치는 젊음의 도시’니 하는. 런던을 처음 가본 사람은 멋없는 도시를, 반년만 살아보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를 느끼게 된다고도 말한다.

◆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음악의 성지

런던은 바로크 시대부터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음악의 성지다. 런던에는 헨델도 있고, 엘가도 있으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는가 하면 레드 제플린, 퀸, 비틀스도 있다.

교교히 흐르는 템스 강물을 내려다보며 테이트 모던 갤러리 쪽에서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를 건넌다. 300여 년 전 이 자리에서 울렸던 한 음악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그건 독일 출신 바로크 음악의 대가인 헨델과 런던에 얽힌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독일 작센 출신인 헨델은 1710년 독일 하노버의 선제후인 게오르그 루드비히의 총애를 받으며 하노버 궁정 악장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는 런던으로 휴가를 떠났다. 짧은 휴가였지만 헨델은 런던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가 런던에서 작곡해 공연한 오페라 <리날도(Rinaldo)>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는 런던 상류층 부인들뿐 아니라 앤 여왕까지 눈물을 흘리게 했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밀레니엄 브리지는 새 천년을 기념하며 1998년에 건설되기 시작해 2000년 6월에 완공된 보행자 전용 다리다. 런던 조형 건축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루드비히 선제후의 독촉으로 어쩔 수 없이 하노버에 돌아갔던 헨델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다시 런던에 온다. 그리고 아예 눌러 앉는다. 헨델은 앤 여왕을 위해 ‘앤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를 비롯해 ‘테 데움(Te deum)’과 ‘유빌라테(Jubilate) 등도 작곡한다. 앤 여왕은 1711년 완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헨델이 작곡하고 지휘한 연주를 듣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새 왕은 조지 1세. 그런데 그 조지 1세는 다름 아닌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 후사가 없던 앤 여왕에게 루드비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래서 하노버 선제후를 겸해 영국의 국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헨델이 뒤통수를 친 그 인물 아니던가.

헨델은 꾀를 하나 낸다. 조지 1세가 열 척의 배를 띄워 템스강을 유람할 때 그는 또 다른 배에 50명의 오케스트라를 태우고 음악을 연주한다. 바로 ‘수상 음악(Water Music)’이다. 3개의 관현악 모음곡인 ‘수상 음악’은 1시간 분량인데, 이 음악에 탄복한 조지 1세는 두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하노버로 돌아오지 않은 헨델을 용서했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 세인트 폴 대성당은 원래 목조 성당이 있던 자리에 1666년 화재로 전소한 후 1669년부터 다시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됐다. 런던의 랜드마크를 이루고 있고, 지하 납골당에는 넬슨 제독과 웰링턴 장군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2만8000여 명의 무덤이 있다.]

1761년 출판된 헨델의 전기에서 소개된 이야기다. 그러나 음악사가들은 헨델의 전기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본다. ‘수상 음악’이 작곡된 게 1717년이다. 그런데 조지 1세는 이미 1714년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헨델의 <리날도> 공연을 관람했다. 정황상 이미 조지 1세는 헨델을 용서한 것이다. 헨델과 조지 1세의 관계를 이용해 헨델 입장에서 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문화 도시로 재건
밀레니엄 브리지는 이름 그대로 2000년을 기념해 영국의 건축가 노만 포스터가 설계한 보행자 전용 다리다. 다리 한쪽 끝, 2000년에 세워져 초현실주의와 팝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미술품들을 전시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와 짝을 이뤄 런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그 다리의 반대편 끝을 지나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세인트 폴 대성당. 1669년에 건축을 시작해 1711년 완공한 세계에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성당 앞 광장에 있는 앤 여왕 동상은 이곳이 헨델의 영광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영국 왕실의 심장부인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에 이르면 런던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앞 ‘그린 파크(Green Park)’에는 헨델의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런던은 유럽의 대도시 중 녹지 면적이 가장 넓은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내 곳곳에도 넓은 녹지 공원이 많다. 하이드 파크, 세인트 제임스 파크, 켄싱턴 파크, 그리고 그린 파크 등 그 숫자가 50여 개에 이른다. 그린 파크를 굳이 ‘그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린 파크에는 그야말로 ‘그린’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넓은 공간에 다른 색깔의 꽃조차 구경하기 힘들다. 온통 푸른 나무와 풀들로 가득하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는 헨델의 후원자였던 앤 여왕의 동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앤 여왕은 영국의 정당 정치의 기반을 확립했다.]

1749년 4월 27일, 조지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조지 2세는 아버지보다 더 헨델을 좋아했다. 그런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1740~1748년)’을 승리로 이끌고, 헨델에게 축하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의뢰한다. 그 곡은 그린 파크 야외무대에서 초연됐다. 연주가 끝난 직후 그린 파크 하늘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렸다. 그 곡은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Royal Fireworks)’다.

헨델은 야외에서 연주될 이 곡을 24대의 오보에와 12대의 바순, 9대의 트럼펫, 9대의 프렌치 호른, 3대의 케틀드럼, 숫자가 지정되지 않은 사이드 드럼으로 구성했다. 무려 100대의 관악기가 동원된 거대한 오케스트라였다.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이 있던 4월 21일은 런던의 역사가 기록한 첫 교통 체증의 날이기도 했다. 무려 1만2000명이 리허설을 보기 위해 몰리는 바람에 런던 길이 완전히 막혔다. “런던 브리지가 어찌나 막히는지 3시간 동안 단 한 대의 마차도 지나갈 수 없었다”는 신문 기사가 났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빅토리아 여왕 동상은 버킹엄 궁전을 마주보며 런던 여행 인증 스폿을 이루는 곳으로 영국 역사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위상을 과시하듯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난다]

그러나 연주만큼 훌륭한 불꽃놀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하늘로 쏘아 올린 불꽃은 화려했지만 지상의 회전 불꽃은 제대로 타지도 않았고, 급기야 야외무대에 불이 붙었다. 자칫 그린 파크가 홀랑 다 타버릴 뻔 했다. 헨델의 전기작가들은 헨델이 이 모습을 보며 조지 2세가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도 했다.

재밌는 것은 당시 버킹엄 궁전은 왕실 소유가 아니었다. 개인 저택이었다. 지금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주요 거처인 버킹엄 궁전이 왕실 소유가 된 것은 조지 3세 때인 1762년이다. 그러니 조지 2세는 남의 집 앞마당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하마터면 그 일대를 다 불태울 뻔했던 것이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그린 파크는 50여 개에 이르는 런던의 공원 중 가장 짙푸른 녹음으로 유명한 곳. 1749년 이곳에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연주가 실제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열렸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피카딜리 거리까지 런던 시민들이 아끼는 산책 코스 중 하나다.]

조국인 독일을 버리고 영국인이 되려고 했던 헨델은 결국 ‘왕실의 불꽃놀이’ 10년 후 사망해서 초서, 찰스 디킨스, T. S. 엘리엇, 윌리엄 워즈워스 등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 영국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함께 누운(실은 누웠는지 서 있는지 모르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묘지에 관이 너무 많아 눕히지 못하고 세워져 있는 게 많다고 하니) 예술가가 됐다.

런던을 여행한다면 지나칠 수 없는 음악의 성지가 또 있다. 고전음악이 아니라 현대 팝음악이다. 런던 중심부 북서쪽에 있는 애비 로드(Abbey Road) 3번지 애비 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와 그 앞길의 작은 횡단보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밴드 비틀스(The Beatles)의 1969년 마지막 녹음 앨범 <애비 로드>가 탄생한 곳이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버킹엄궁은 영국 왕실의 정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원래 이곳이 개인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1703년 건축됐다가 1762년 영국 왕실에서 매입했다. 매일 오전 11시 30분에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은 최고의 관광 상품이다.]

애비 로드는 비틀스와 핑크 플로이드 등 1960, 1970년대 브리티시 록을 풍미하던 밴드들의 대표적인 녹음 스튜디오의 이름이자 길 이름이고, 비틀스의 앨범 이름이기도 하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 전설의 비틀스 네 명의 멤버가 일렬로 길을 건너던 횡단보도는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따라한다. 그 사람들에게 길이 막힌 자동차들은 짜증도 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포즈를 취하라고 알려주기까지 한다.

비틀스의 앨범 <애비 로드>는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녹음된 마지막 앨범이다. 1970년 ‘렛 잇 비(Let it be)’가 마지막으로 발매되기는 했지만, 실제 녹음은 <애비 로드>가 마지막에 이뤄졌다. 그래서 비틀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애비 로드>는 비틀스의 그 어떤 앨범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비틀스의 마지막 흔적으로 유명한 곳. 앨범 재킷 사진처럼 사진을 찍으려는 여행자들은 늘 도로를 막지만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은 경적 한 번 울리지 않는다. 이 횡단보도와 애비 로드 스튜디오만 없다면 런던에서 가장 조용한 주택가일 것이다.]

런던은 오페라와 뮤지컬이 공존하고, 헨델과 비틀스가 함께 숨을 쉰다.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도 늘 가까이에 있고, 16세기의 종교 미술과 21세기의 팝아트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비록 전쟁의 아픈 역사 속에 도시가 파괴됐지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자존심은 폐허 위에 새로운 문화 도시를 재건했다. 그래서 영국은, 그리고 런던은 세계 앞에서 아직도 고개 똑바로 들고 문화와 예술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헨델을 죽을 때까지 붙잡을 수 있었던 그런 매력으로.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내려다본 템스강의 풍경. 300여 년 전 헨델의 명곡 ‘수상 음악’이 탄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헨델과 비틀스가 공존하는 런던
[바비칸 센터는 전후 복구된 영국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곳. 제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 지역을 복합 예술 공간으로 재개발해 1982년에 문을 열었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 그대로의 사용과 콘크리트 노출을 테마로 한 브루탈리즘으로 지어졌다. 한때 BBC가 선정한 ‘가장 흉물스러운 건물’로 뽑히기도 했지만 2001년 문화부 지정 2급 보존 건물로 등록돼 그 의미를 인정받았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공연장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0호(2018년 0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