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숙자 서강대 전인교육원 조교수] 즐거운 날이면 빠지지 않았던 국수는 한 끼 그 이상이다. 백석은 국수를 먹는 것이라 아니라 오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국수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서로의 따뜻함을 확인하는 일이자 삶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다.
[Great Teaching] 백석 <국수>, 국수 한 그릇의 ‘소확행’
만물이 생동하는 여름이다. 푸른 푸성귀들이 지천에서 제 빛깔을 뽐내며 식탁의 물선(物膳)을 풍성하게 하는 계절이다. 포실포실한 감자는 여름 한 끼의 점심으로 제 격이고, 시원한 수박은 해갈 들린 저녁에 그만이다. 윤기가 자르르하게 흐르는 가지를 쪄서 무쳐 먹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반갑고, 단단하게 보이지만 연한 속살을 가진 노오란 단호박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뿐이랴. 부추와 상추를 슴슴하게 무쳐서 두부전이나 도토리와 같이 내놓는 것은 그 빛깔의 어울림만으로도 지쳐 있는 심신에 활기를 준다. 여름 식탁은 이제 막 대지를 뚫고 나온 연하고 순한 맛들의 향연이다. 이 맛은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이다. 요즘 말로 ‘소확행’이다.

여름 한 끼의 식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은 ‘국수’다. 짜르르하게 새콤한 함흥냉면도 좋고, 히스무레한 듯 간결한 평양냉면도 좋다.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막국수도 좋고, 삶의 웅숭깊은 진국 같은 콩국수도 좋다. 잔칫날 빠지지 않는 음식이 ‘국수’이고 보면 ‘국수’에는 때로 맛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맛 이상의 무엇’이란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일처럼 마음의 매듭이 풀리고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맛’을 따라 전국 곳곳을 유랑하는 것이 맛 너머의 맛, 이를테면 잃어버린 무엇을 찾고자 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 한 편을 읽기 위해 이토록 돌려 가며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이유는 백석의 <국수>에 녹아 있는 ‘맛 이상의 것’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다. 1912년 태어난 백석은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언어 천재이자 세기의 사랑으로 이름 높았던 일제강점기의 시인이다. 대표적인 시로는 <여우난 곬족>,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국수> 등이 있다. 백석과 관련해 언급되는 말 가운데 ‘시’만큼이나 유명한 말은 “1천억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도 못하다”는 성북동 길상사 건축을 둘러싸고 회자된 김영한(자야)의 언급이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은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었는데 이것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면서 백석의 시에 비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백석은 김영한과 동거를 하며 사랑을 기약했지만 기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부부로서의 연을 맺지 못했다.


1940년, 시인은 홀로 만주에 간다. 당시 만주는 새로운 낙원이나 기회의 땅처럼 선전됐다. 어쩌면 일제 치하의 조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몰랐다.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에 들어가서 일도 해보고 땅도 빌려 농사를 지으려고도 해보았으나 짐작과는 달리 마음도 일도 몸에 붙지 않았다. 바로 이때 두 편의 시를 발표하는데 한 편은 <흰 바람벽이 있어>이고, 또 다른 한 편이 <국수>다. <흰 바람벽이 있어>와 <국수>를 같이 읽었을 때 ‘국수’의 맛과 의미가 좀 더 진하게 다가온다.

만주에 홀로 남은 시인은 어느 날 “흰 바람벽이 있어”를 얘기한다. 왠지 쓸쓸한 어느 저녁,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들었던 바로 그 순간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머니가 추운 날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는 생각과 또 어쩌면 내 사랑하는 사람이 대구국을 끓어 놓고 저녁을 먹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이다.


백석에게 ‘쓸쓸함’과 ‘따끈한 감주’, 그리고 ‘어머니의 손길’은 모두 연결돼 있다. 흰 바람벽에서 홀로 있다는 사실에 서글퍼지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다. 하지만 시인이 놓여 있는 현실에서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낙담이 더 익숙하다. 흰 바람벽 속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나 어머니가 없고, 따뜻한 밥상을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국수>를 읽어야 한다.

시인에게 한 끼의 밥은 한 단어로 요약되지 않는다. 밥은 배를 채우는 일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와 같이 ‘나누는’ 일이며, 밥상에 함께 둘러앉는 일인 동시에 그 반가움으로 일상의 평화를 지켜내는 일이다. 특히, 즐거운 날이면 빠지지 않았던 ‘국수’는 한 끼 그 이상이다. 시인은 흰 바람벽 앞에서 상상의 날개를 편다. 그 즐거운 상상은 천지가 부산스럽게 동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눈이 많이 나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에서처럼 동요하는 기미로 시작하는 것, 산새가 벌판으로 내려오고 토끼가 더러 눈에 빠지기도 하면서 무엇인지 미묘한 변화가 교차하는 것이다.


백석은 처음부터 ‘국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수를 먹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몸짓, 은근하게 들뜬 듯 흥성거리는 분위기 등으로 포착한다. 만물이 동요하고 사물이 동요하는 사람들의 몸짓과 함께 국수가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는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로 끝난다.

국수는 ‘먹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고 “먼 옛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만주의 흰 벽을 마주보고 앉아 거듭 떠올리는 것은 어머니가 배추와 무를 다듬으며 부엌을 들큰하게 달구었던 냄새이기도 하고 그 안에 놓인 따뜻함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국수’를 떠올리는 일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 온 사람들이 밥상 주위에 둘러 앉아 서로의 따뜻함을 확인하는 일, 그 삶의 안녕 속에서 쓸쓸함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국수’라고 답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여름 밤 지천에 널린 푸성귀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산새가 벌판에 내려오는 기미 속에서 포착되는 것,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는 것, 어쩌면 삶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일러스트 전희성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