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체어와 그 시리즈.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를 위해 디자인했다.
미스 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체어와 그 시리즈.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를 위해 디자인했다.

내 집으로 들어온 바우하우스 ①

[한경 머니 = 문혜원 객원기자] 올해는 독일 바우하우스가 문을 연 지 100주년 되는 해다. 건축계는 물론 문화예술계가 이를 기념하는 행사로 떠들썩하다.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차츰 바우하우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모던한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의 모던디자인 명제에 열광하고 있다.


1편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역사와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바우하우스 제품을, 2편에선 현재 바우하우스가 영향을 미친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우하우스는 ‘짓다’란 뜻의 ‘바우(bau)’와 ‘집’을 뜻하는 ‘하우스(haus)’가 만나 집을 짓는다라는 의미의 조형예술학교다. 1919년 문을 열어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불과 15년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역사였지만 바우하우스의 철학은 건축은 물론 가구, 소품, 활자, 로고에까지 문화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폐교 이후 교수(마스터)들과 학생(도제)들이 유럽 전역과 미국에 흩어지며 바우하우스 정신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케아, 애플, 무인양품 등은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다.


전자제품 디자인의 혁신을 일으킨 애플의 창업주 스티븐 잡스는 스스로를 바우하우스의 후예라고 칭했다. 바우하우스의 이념대로 장식을 배제한 기능 위주의 간결한 디자인은 애플이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케아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심플하고 간결한 디자인이 회사의 주요 가치다. 가격 면에서도 대량 생산과 조립식으로 모두에게 부담 없는 것이 바로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무인양품 역시 마찬가지다.


‘한 세기의 철학은 다음 세기에는 상식이 된다’는 말처럼 현재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100년 전 바우하우스의 엄청난 시도와 파격적인 실험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철제 의자의 첫 탄생, 대량 생산으로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해 디자인의 정수로 꼽히는 바실리 체어.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해 디자인의 정수로 꼽히는 바실리 체어.
1900년대 초반에는 가구를 제작하는 소재로 나무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바우하우스 시대에 와서야 스틸 프레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의자 다리는 3개 혹은 4개로만 여겨지던 것에서 2개를 줄인 캔틸레버(외팔보) 의자가 탄생한다.


속이 빈 스틸관을 ‘디귿(ㄷ)’ 자로 구부려 스틸의 견고함에 기대어 뒷다리가 없어도 체중을 받칠 수 있는 구조다. 스틸의 탄성이 체중을 자연스럽게 지탱해주는 한편, 뒷다리가 없는 탓에 허공에 떠 있어 보인다. 조형적으로 긴장감을 주면서 경쾌한 인상을 주는 디자인이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듯한 디자인이지만 그 원류는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디자인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수제자였던 브로이어는 심플하고 실용적인 바우하우스 모던 가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체스카 체어(Cesca chair, 1928년)는 1926체어와 마찬가지로 뒷다리가 없는 디자인이다. 이 의자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최초로 대량 생산의 시작을 알린 제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목재를 장인이 하나하나 다듬어 제작했다면 스틸 소재를 사용하면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체스카 체어는 차가운 인상을 주는 스틸 프레임에 따뜻한 느낌의 우드와 케인을 엮어 만들었다. 대량 생산 덕에 가격은 확 낮아졌고, 당시 많은 중산층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가구가 됐다. 현재 체스카 체어를 생산·판매하고 있는 독일의 가구 회사 놀(Knoll)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해 체스카 체어의 좌판과 등판 부분에 여러 가지 소재와 색깔을 입힌 디자인을 출시해 판매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끄는 건 바실리 체어다. 브로이어가 1925년에 디자인한 이 의자는 자전거의 디자인이 수십 년간 변함없다는 점에 주목했고 스틸을 구부려 형태를 잡고 최소한의 가죽만 사용해서 좌판과 등판, 팔걸이를 연결했다.


브로이어가 처음 이 의자를 만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이 의자가 빛을 보게 된 것은 바우하우스 교수이자 추상화가였던 바실리 칸딘스키 덕이었다. 그의 스튜디오에 찾아와 이 의자에 큰 흥미를 보인 칸딘스키 덕에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1년 후 이 의자는 바우하우스 전체에 비치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후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앞 다퉈 파이프로 된 가구를 디자인하기 시작함은 물론이다. 그 후 브로이어는 자신이 만든 의자의 가치를 알아봐준 칸딘스키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바실리 체어’로 부르게 됐다.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을 맡았던 근대 건축의 거장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도 스틸파이프로 만든 의자를 선보였다. MR 체어 시리즈는 체스카 체어처럼 뒤의 2개의 다리를 없애고 스틸 파이프의 탄력으로 체중을 지지하게 했다. 하지만 보다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다리 부분을 직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닌 둥근 반원의 곡선형으로 처리해 우아한 느낌을 주게끔 한 것.


미스 반데어로에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바르셀로나 체어다.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박람회 당시 독일 파빌리온에 앉을 스페인 국왕 부부를 위해서 디자인한 작품이다. 스틸 다리와 몸통에 40개의 가죽 조각을 붙여 만들었는데,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라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제품이다.


그는 가죽과 스틸만을 조합해 의자 외에도 스툴, 데이베드를 만들고 함께 어울릴 만한 바르셀로나 테이블까지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바르셀로나 체어는 비싼 크롬과 가죽을 사용하고 세밀한 곳까지 완벽을 기해 엘리트를 위한 럭셔리 제품으로 통했다. 또 사용자들이 이리저리 옮기지 않게 묵직하게 만들었다.


실용적인 조명에서 주방용품까지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빌헬름 바겐펠트는 ‘바우하우스 램프’라고도 불리는 테이블램프 WA24를 디자인했다. 장식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기능적으로 단순하면서 직설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대량 생산 체제에 적합하게 단순하고 현대적으로 디자인됐지만 본격적인 생산에 나선 것은 제품이 출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다. 독일의 제품 제작자인 발터 슈네플이 1976년 바겐 펠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프로토타입의 램프를 보고서 제품 생산을 제안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독일의 조명디자인 회사인 테크노루멘이 설립되며 바우하우스 램프를 생산하게 된다.


바겐펠트는 주방의 테이블웨어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주방용품 브랜드 WMF에서 유리와 스테인리스 테이블웨어를 디자인한 것인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WMF의 주방용품 대부분은 바겐펠트가 디자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에 디자인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되면서 기능적으로도 뛰어난 디자인을 자랑하는데, ‘맥스와 모리츠’로 불리는 소금·후추통, 버터 접시, 쌓아서 보관할 수 있는 스테인리스 달걀컵 등은 전설적인 디자인으로 꼽힌다. “좋은 가정용품은 노동자들에겐 충분히 구입할 만하고 부유층에겐 충분히 쓸 만해야 한다”는 그의 명제가 제품 디자인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카이저 이델램프는 바우하우스 금속공방에서 활동하던 크리스티안 델이 1933년 디자인한 작품이다. 카이저 조명 회사와 협업해 카이저 이델 시리즈를 출시했는데 고급 스틸을 가공해 핸드페인팅 방식으로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입힌다. 간결하면서 묵직한 이 디자인은 훗날 조명 디자인에 무수한 영감을 주게 된다. 카이저 이델 램프 역시 바우하우스의 실용성과 간결한 아름다움을 갖춘 램프라고 평가받으며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변천사

바우하우스① 모던 디자인, 인테리어 혁신 불러

바우하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지역을 2번 옮기게 되는데 그에 따라 세 시기로 나뉜다.


1919~1925
❶ 바이하우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가 문을 연 곳이다. 바우하우스는 2개의 조형학교인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아카데미가 통합하면서 생겼다. 초대 교장은 발터 그로피우스다.


1925~1931
❶ 바우하우스 데사우
1925년 바우하우스 바이마르가 폐쇄되자 데사우시의 지원을 받아 바우하우스 교사를 이전해 건설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민중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강철과 유리로 설계된 바우하우스 교사는 1년 만에 완공됐는데, 건축물과 강의실, 공방, 옥상정원, 학생용 스튜디오 등의 시설물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잘 드러내는 구조와 기능으로 1996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932~1933
➌ 바우하우스 베를린
19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 관계가 좋지 못해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는 미스 반데어로에가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건축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했으며 순수미술보다 공업생산에 초점을 맞춰 교육 체계를 탈바꿈했다. 이 때문에 순수예술 분야의 교육자들이 반발했고 내부 분란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나치의 탄압까지 이어져 1932년 데사우에서 쫓겨나 1933년 베를린에 새롭게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으나 1933년 나치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 피우게 된다. 이는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 건축부장으로,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데어로에가 일리노이공과대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부임하면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