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상열

바람의 정원(Wind Garden), 캔버스에 아크릴릭, 125×125Cm, 2019년
바람의 정원(Wind Garden), 캔버스에 아크릴릭, 125×125Cm, 2019년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자연은 인내심 강한 예술가다. 억겁의 시간이 녹아든 창조물이 곧 자연이다. 김상열 작가는 바람의 흔적으로 그 자연을 그린다. 동양철학에선 마음과 사물의 하나 된 기운을 ‘심물합일(心物合一)’이라고 한다. 자연의 도(道)가 곧 마음의 도인 셈이다. 그래서 김 작가의 회화 작품은 자연을 바라보며 사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제안이다.


“작품의 큰 틀은 언제나 자연입니다. 나의 작품 속 자연은 단순한 재현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향한 사유의 공간이 되길 원해요.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이치처럼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발현되기를 바라며,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스며들 듯이 피어나길 바랍니다. 청명한 하늘,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햇살, 춤추는 수양버들, 가을 달빛을 품은 댓잎, 겨울의 움츠린 나뭇가지, 바람소리, 하얀 눈밭, 이른 아침 피어오르는 물안개, 연못에 담긴 물그림자 등 미묘하고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제가 오랜 시간 자연을 주제로 작업하는 가장 큰 이유일 거예요.”


자연은 적어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미술 형식이 생겨난 출발점부터 함께하고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그 자연의 모티브를 나름의 방식으로 옮기려 독창적인 조형 어법을 만들어 왔다. 김상열 작가도 마찬가지다. 김 작가는 2008~2009년 이후 <바람의 정원(Wind Garden)> 혹은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이라는 작품 제목의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창호지 너머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지켜보는 것처럼 볼수록 부드러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림들은 그가 자연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바람결에 몸을 실은 수양버들이 달빛에 비친 모습을 보았는가. 더없이 한가롭고 여유로우며 여여(與與)하다. 김 작가의 바람(정원) 시리즈는 명징한 여유의 정점을 보여준다. 무심한 듯 포착된 몇 줄기의 이파리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참으로 크다. 자연의 모든 얼굴엔 제각각의 아름다운 사연이 담겨 있다. 그 자연의 세계에선 단지 몇 소절의 음만으로 세상에 없는 음률을 선사하거나 몇 개의 단어로 세상의 모든 감성을 함축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절제미와 깊이감이 더해진 그림은 세상에 없던 고요를 선사한다.


“늘 생각나게 하는 작가? 다음 작업이 궁금해서 전시장을 꼭 찾게 만드는 작가, 작고 보잘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될 때 끝까지 밀어붙이는 근성 있는 작가, 의식 있는 작가, 책임감 있는 작가…. 간혹 좋은 작가의 기준을 적어봅니다. 작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거나, 대중적인 인기 작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어쩌면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푸념처럼 내뱉었던 ‘붓을 놓지 않고 버티는 것 또한 재능’이라고 했던 말이 더 좋은 답이 될 수도 있겠어요.”


김 작가의 고민은 ‘신비로우면서도 경외심 가득한 자연의 미감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화면에 옮길 수 있을까’였다. 그의 선택은 붓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감성의 일명 ‘그림자 회화’는 단순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완성된다. 감상자들은 김 작가의 작품을 보며 한국화의 먹그림인지, 사진 혹은 판화 기법인지 헛갈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캔버스 바탕에 아크릴 물감으로 완성 수작업의 결과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붓을 놓고 버텨낸 창의적 인내심’의 보상이다.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80.3Cm, 2015년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80.3Cm, 2015년
<비밀의 정원> 시리즈의 제작 과정 첫 순서는 바탕 작업이다. 캔버스 물성이 사라질 때까지 표면을 곱게 처리하고, 어두운 바탕색을 여러 번 덧칠한다. 그 위에 자연에서 채집된 오브제(대개 여러 종류의 이파리나 여린 나무줄기)를 원하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연출해 올려놓는다. 이 과정이 끝난 후 오브제가 놓인 화면에 흰색 물감을 분무(噴霧)해 지워 나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형상’을 얻어낸다. 가까운 주변 자연환경에서 채집된 이파리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생명을 얻는 과정이다. 마치 안개 낀 비밀스런 정원에 초대된 듯 미묘하고 몽환적인 장면이 곧 김 작가의 ‘그림자 회화’다.


블랙, 블루, 레드, 옐로. 표면적으론 단색(單色) 화면이지만, 바탕의 주조색 그 이면엔 많은 색이 잠들어 있다. 작품 제목처럼 캔버스에 뭔가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꿈을 꾸는 듯이 연출된 화면은 빛과 그림자의 모호한 경계선을 보여준다. 한국화의 발묵법(潑墨法)을 연상시키거나,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은 단색의 사진 작업에 비유될 만하다. 철저하게 ‘회화적 손맛’을 제거해서 ‘회화 같지 않은 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해외에서도 그의 작품은 동양적인 색다른 미감 때문에 호감을 얻고 있다.


“2012년 캐나다 퀘벡주 몬트로올의 한 갤러리의 수석큐레이터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어요. ‘1년 후에 프랑스로 건너가서 갤러리를 운영할 예정인데, 프랑스에서 당신의 초대전을 갖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그에 앞서 우선 자신이 소속된 캐나다 갤러리에서 제 작업을 먼저 소개하고 싶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비밀의 정원> 시리즈를 시작한 지 약 4년째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해외 갤러리의 관심은 반가웠지만 무작정 작품을 보낸다는 것이 망설여졌어요. 여러 점검과 조처 끝에 퀘벡 지역에서 전속작가로 활동하기로 계약하고 작품을 보냈어요. 지금은 그 큐레이터도 프랑스 칸에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좋은 친구가 됐습니다.”


국내 작가라면 누구나 작업에 대한 해외의 반응이 궁금할 것이다. 그것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나 기획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더없이 큰 기쁨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될 것이다. 김 작가 역시 그 같은 경험이 줄곧 자연에 대한 주제를 작품에 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지금의 <비밀의 정원>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1년 5회 개인전 이전인 2006년 3회 개인전과 2008년 4회 개인전의 <섬(Island)> 시리즈부터 이미 자연의 모티브가 작품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10월에는 ‘2019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부대행사로 열린 경주솔거미술관의 대형 기획전에 초대돼 개인전을 가졌다. 김 작가는 이 전시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경주는 그가 고등학교까지 나고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꿈이었던 소년이 고향의 가장 큰 전시장에서 초대전을 받았으니, 입신양명(立身揚名), 금의환향(錦衣還鄕)인 셈이다. 내년엔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초대개인전이 연이어 예정돼 있다. 드디어 김 작가의 비밀 정원에 꽃을 피워줄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일까. 작품의 전시 가격은 10호(53×45.5cm) 200만 원, 30호(90.9×72.7cm) 600만 원, 50호(116.8×91cm) 800만 원, 100호(130.3×162.2cm) 1600만 원 선이다.


아티스트 김상열은…



그림자 회화, 동양적인 색다른 미감
1966생. 영남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과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2000년 ‘백색지대(白色地帶)’라는 테마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1년 이후엔 <비밀의 정원(Secret Garden)> 시리즈로 현재까지 16회의 개인전, 이태호·이인·김기수 등과의 2인전, 23회의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또한 ​2019 아트스페이스 나눔(NANUM) <선 면 그리고 색>전(갤러리 마크 기획), 2019 아트스페이스 HOSEO 기획 <피어나다>전, 2018 행복북구문화재단 기획 <비전(VISION)>전 어울아트센터 (대구), 2018 자연의 현상 <12인의 신작전>(창원 마산아트센터), 2018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작품전 <그림을 봄>전(천안 예술의전당 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초대됐다. 작품의 주요 소장처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호서대, Artered gallery(뉴욕) 등과 다수의 개인들이 있다. 현재는 영남대 서양화과 겸임교수와 청도의 한 폐교를 활용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 중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정부미술은행 작품가격 평가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19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 2019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바람의 정원(Wind Garden)>,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122Cm, 2019년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