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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 정혜선 객원기자| 사진 서범세 기자] 10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간헐적 해외여행으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나간 직장인이 있다. 최근 <30대의 간헐적 직장 탈출기>를 펴낸 황재준 작가는 책과 여행을 나침반 삼아 ‘나’의 시간을 되찾았다.

황재준 작가 “여행은 직장인이 아닌 인간이 되는 순간”

가을볕이 좋았던 11월 초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만난 황재준 작가는 직장인답게 정장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한 손에는 출간된 지 일주일 된 자신의 책이 들려 있었다. 아직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며 겸연쩍게 웃는 그에게 책을 출간하게 된 이유에 관해 물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이레 밤을 보내는 동안 일기만 썼어요. 그 일기가 A4 용지 300쪽에 달하더라고요. 이 정도 분량이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기에 대한 책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출판사 8곳에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한 곳의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바로 디스커버리미디어다. 편집장과 책 출간을 논의하면서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그는 지난 5년간의 여행 기록을 책에 담기로 했다. “제가 여행을 통해 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독자들에게 자신을 찾는, 혹은 돌아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그간의 여행 기록을 책에 담게 됐어요.”


입사 5년 차
첫 유럽 여행을 떠나다


황 작가가 처음 여행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입사 후 5년이 지나서라고 한다. 5년간 일에 적응하며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모닝커피 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정말 그냥 불현듯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단다.


그의 책 <30대의 간헐적 직장 탈출기>의 첫 번째 여행지인 독일 남서부 하이델베르크를 시작으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철학자의 길에 서서 하이델베르크성 바라보기’라는 그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가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책 39쪽에 이 순간에 대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풍경에 내 모습을 얹어 재현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지난날의 희망을 이루는 일”이라고 적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많은 여행지 중에서 이곳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꼽았다.


황 작가의 여행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책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의 작가인 괴테가 나오고, 이탈리아 피렌체와 로마에서는 단테와 헤르만 헤세가 등장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읽는다. 남미와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호세 마르티를, 7일간 기차 안에 머물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는 푸시킨, 바이칼호수, 도스토옙스키 등을 만난다. 이렇듯 그는 여행할 때 습관처럼 책을 들고 간다고 했다. “가능한 여행지와 맞추려고 하지만 그때그때 생각나는 책을 가져가는 편이에요.” 자신의 여행에서 책은 소중한 친구이지만, 여행은 여행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순간에 얻는 것이 가장 많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무의미한 시간까지
소중한 추억이 되는 시간

황재준 작가 “여행은 직장인이 아닌 인간이 되는 순간”
황 작가는 지난 5년간 참 많은 곳을 다녔다. 버킷리스트의 여행지만 6곳이 넘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자주 가방을 쌌는지 묻자 직장인의 무게가 담긴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저에 대해 ‘인간’이 아니라 ‘직장인’이라고 말할 때가 있어요. 매일 12시간 이상 회사에 있고 모든 가치판단과 인간관계는 직장에 맞춰져 있죠. 여행은 그런 제가 ‘인간’이 되는 순간인 거 같아요.”


여행이 그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게끔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1년에 짧게는 3~4일에서 길게는 열흘 정도의 휴가가 주어지는 직장인으로서 황 작가처럼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 역시 많은 직장인이 활용하는 명절 연휴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열흘 이상이 필요한 유럽 여행의 경우 기본 3~4일의 명절 연휴에 휴가를 붙여 여행을 가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1년에 2번은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결혼해 혼자가 아닌 직장인이라면 연휴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여행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것도 공감이 어려울 수 있다. 결혼하게 되면 ‘나’보다는 ‘가족’을 위한 여행을 주로 가기 때문이다. 그의 책 챕터2 스페인·포르투갈 여행 편 ‘라만차의 풍차와 리스본행 야간 열차’에서 결혼을 몇 달 앞둔 ‘허 대리’가 결혼 전 유럽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황 작가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자신을 위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단 1시간이라도 그 여행에서 자신만을 위한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해보라는 것이다. 아니면 계획하지 않더라도 여행에서 나만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순간 하고 싶었던 것을 해보라고 권했다. “책을 냈을 때 기혼인 선배들이 많이 부러워했어요. 제가 혼자이기 때문에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가족과 함께여도 나를 위한 감성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40대를 위한 간헐적 가정 탈출기를 써볼 생각이다”라고 웃어 보였다.


황 작가는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책의 챕터3 미국 여행 편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의 미국 여행은 오롯이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10대부터 20년 넘게 좋아했던 코비 선수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어요. 여행 일정을 빼곡히 짜지 않아도 농구 경기를 보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도 여행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저 스스로 느낀 여행이었죠.”


그는 <30대의 간헐적 직장 탈출기>를 정독할 시간이 없어 발췌해서 읽어야 한다면 꼭 읽어야 할 부분으로 미국 여행 편을 꼽기도 했다.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모스크바까지 9288㎞를 달리는 76시간 기차에서 먹고 자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책을 읽거나 창밖 풍경을 보거나 사람 구경을 하는 정도지만, 그 시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황 작가는 말했다. “직장인이 열흘 휴가를 내면 갈 수 있는 코스예요. 정적인 것을 못 견뎌하는 분이라면 이 여행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차에서 무의미하게 있는 시간조차 소중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답니다.”


황 작가는 지난 열 달간 책을 쓰면서 여행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다고 했다. 굳이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여행기를 쓰면서 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어요. 제 주변을 좀 더 세심하게 돌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는 다음 책에는 매일 반복되는 그 하루하루가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싶다고 했다. 황 작가는 책의 말미에 썼듯 이미 ‘자신의 속도’로 내면의 여행을 시작했다.


황재준 작가의 버킷리스트

스페인의 라만차 풍차.
스페인의 라만차 풍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사이에 있는 이구아수폭포.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사이에 있는 이구아수폭포.
철학자의 길에 서서 하이델베르크성 바라보기
고등학교 1학년 독일어 교과서에서 하이델베르크성과 네카어강, 그 강에 놓인 칼테오도르다리를 담은 사진을 본 순간 꼭 가야 하는 곳이 됐다.

포르투갈에서 대서양을 바라보기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곶은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 바다가 대서양이다.

돈키호테의 풍차 앞에 맞서기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소설 <돈키호테> 속 그 풍차 앞에 서서 세상이 정한 길만 따라온 ‘나’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풍차는 묵묵히 들어줬다.

미국에서 프로농구(NBA) 직관하기
20년간 팬이었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 소식이 들리자 고민 없이 미국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이구아수폭포 가보기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인간은 폭포 물줄기 하나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아주 작은 존재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끝에서 끝으로 가보기
열차가 달리는 9288㎞의 길은 곧 인생이 된다. 그렇게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되고, 일상의 기억이 모여 인생의 추억이 되는 법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5호(2019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