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마르케

이탈리아 중북부에 자리한 마르케(Marche). 부드러운 곡선의 언덕과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아드리아 해를 만날 수 있는 곳.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와인을 즐기며 라파엘로와 로시니를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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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는 이탈리아 중북부 동해안에 자리한 주(州)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쯤 된다. 아드리아 해와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길고 긴 여름휴가를 즐기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르케에 별장을 두고 있는 이탈리아인들도 많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이어지는 온화한 곡선의 구릉지대. 그 위를 느릿느릿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 이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절로 순해지고 느긋해진다.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와인
“마르케는 맛있는 요리 같은 곳이랍니다.”
1 에노테카에서 맛본 마르케의 달콤한 와인. 2 중세 분위기의 식당에서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3 페르모를 산책하다 노을에 물들어 가는 아드리아 해를 만났다.
1 에노테카에서 맛본 마르케의 달콤한 와인. 2 중세 분위기의 식당에서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3 페르모를 산책하다 노을에 물들어 가는 아드리아 해를 만났다.
어깨를 으쓱하며 셰프 울리아시가 말했다. 미슐랭 스타 셰프 마우로 울리아시(Mauro Uliassi)는 깊은 눈과 멋지게 쓸어 넘긴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다. 그는 항구도시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17세에 요리사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는 여자친구의 생일에 처음 요리를 시도해봤다고 한다. “수박에 주사기로 럼을 넣어 친구들에게 내놓았죠. 그 요리를 맛본 이들이 저를 감동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더군요.”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요리가 가진 힘을 믿어요. 아내는 제게 손에 영혼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가 요리의 힘을 믿듯, 나 역시 여행과 풍경이 가진 힘을 믿는다.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를 보다 선한 인간으로 만든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킨다.

푸른 하늘에 양떼 모양의 흰 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어디선가 바람은 불어와 깃털처럼 생긴 미루나무를 흔들어댄다. 이런 날씨에 ‘완벽하다’는 찬사를 붙여주지 않는 것은 불경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완벽한 날씨를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짙은 그늘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일 역시 최선의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탈리아 여느 지역이나 자랑할 만한 와인을 가지고 있듯 마르케 역시 마찬가지다. 우르비노(Urbino), 안코나(Ancona), 페르모(Fermo),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 페사로(Pesaro) 등 마르케 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다양한 와인을 맛보았지만, 예시(Jesi)라는 중세 도시에서 맛본 베르디키오(Verdicchio) 와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베르디키오는 ‘푸르다’는 뜻의 ‘베르데(verde)’에서 비롯됐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포도에는 푸른빛이 돈다. 와인잔을 코끝에 대고 깊은 숨을 들이켰다. 상쾌하면서도 분명한 신맛을 가진 향이 파고들어 미간을 살짝 찡그리게 만들었다.

“베르디키오는 숙성력이 탁월합니다. 빈티지가 좋기만 하면 10년은 너끈히 묵힐 수 있죠. 잘 숙성된 베르디키오에서는 농익은 사과향이 난답니다. 양조장에 따라서는 포도를 늦게 수확하기도 하는데 이는 산도를 낮추고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죠.”
4 동화처럼 예쁜 마르케의 골목길. 5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예시 시립 박물관. 6 코네로 해변(Conero Coast).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순백의 해변과 다크 블루의 바다가 어우러져 있다. 7 떠들썩하게 즐기는 저녁식사는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4 동화처럼 예쁜 마르케의 골목길. 5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예시 시립 박물관. 6 코네로 해변(Conero Coast). 산호가 부서져 만들어진 순백의 해변과 다크 블루의 바다가 어우러져 있다. 7 떠들썩하게 즐기는 저녁식사는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시음해본 베르디키오는 정말 맛있는 포도주였다. 깊은 맛은 없었지만 아주 상큼하고 향기로웠다. 금방 빚어 내놓은 것 같았는데, 아몬드 향이 나는 것도 같았고 여름의 쌉싸래한 풀 향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이탈리아인들은 다들 별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몇 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깨닫게 된 것인데, 그들은 정말 쉬는 틈틈이 아주 잠깐씩 일을 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침이면 점심에 먹을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점심 먹을 때는 저녁에 나올 요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저녁식사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맞다. 내일 먹을 요리와 축구, 그리고 휴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밤 11시가 되고 볼에 키스를 나누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니갈리아에서 맛본 셰프 울리아시의 음식도 인상 깊었지만, 안코나에서 맛본 탈리아텔레, 우르비노에서 맛본 알리오올리오와 치즈, 그리고 송아지 스테이크, 아스콜리 피체노에서 먹었던 아스콜라나 올리브 튀김도 잊을 수 없다. 이 음식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입 속에 침이 가득 고인다.

특히 아스콜라나 올리브 튀김. 이 음식은 올리브를 튀겨낸 단순한 요리로 마르케의 대표 음식이다. 올리브 씨를 빼고 그 안에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 가슴살, 채소, 토마토, 육두구 같은 것을 버무린 소를 채운 후 얇은 튀김옷을 입혀 튀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이 즐겨 먹은 음식인데, 짭조름한 맛과 고소한 기름 맛이 어울려 중독성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맥주나 와인과 함께 먹어야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마르케를 여행하는 동안 허리띠가 한 칸은 늘었는데, 주범은 아마도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댄 아스콜라나 올리브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과 만나다
마르케에 우르비노라는 도시가 있다. 주도인 안코나보다 더 유명하다. 우르비노가 유명한 이유는 화가 산치오 라파엘로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서구 회화의 지존의 자리를 지킨 인물. 그가 1483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자 1504년, 피렌체에 입성한다. 괴팍하고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사근사근한 성격의 라파엘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미남이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여리고 섬세한 외모의 소유자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길고 섬세한 콧날,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는 턱, 그리고 순하고 맑은 눈.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라파엘로는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할 정도로 절제하지 않고 연애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가 있었다. 그는 이 여인의 모습을 ‘라 포르나리나’, 그러니까 ‘빵집 딸’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여인이 5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라파엘로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우르비노 시내에는 14세기에 지어진 라파엘로 생가(Casa di Raffaello)도 있다. 중정을 품은 3층짜리 저택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화구를 놓곤 했던 자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도시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1998년 우르비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아마도 중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우르비노의 전성기를 이룩한 주인공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다. 이탈리아 최고의 용병으로 활약하던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으로 르네상스 초기에 지어진 궁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지었다.

몬테펠트로는 무식한 용병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이탈리아 역사는 그를 ‘성공한 용병 장군’이 아닌 ‘이탈리아의 빛(The Light of Italy)’으로 기억한다. 그는 궁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청했고 수많은 화가와 건축가, 공예가, 조각가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했다. 라파엘로를 비롯해 ‘회화의 군주’로 불리는 티치아노의 작품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 ‘세니갈리아의 성모’ 등 눈부신 ‘르네상스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오페라로 풍성한 마르케
지금까지 마르케의 음식과 와인, 그리고 르네상스의 미술을 즐겼다. 그렇다면 뭐가 남았을까. 음악이다. 음악을 즐기려면 페사로(Pesaro)에 가야 한다. 우르비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인구가 1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지중해 옆에 앉은 이 다정한 도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로시니가 태어난 곳이다. 1792년 페사로에서 태어난 그는 6세에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14세에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가 첼로와 피아노,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운 곳은 볼로냐 음악학교였는데 지루한 수업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8 로시니 음악학교에 세워져 있는 로시니의 동상. 9 옛 로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시. 9 옛 로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시.
8 로시니 음악학교에 세워져 있는 로시니의 동상. 9 옛 로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시. 9 옛 로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시.
시내 한편에는 1882년 로시니의 유산으로 세운 로시니 음악학교가 있다. 학교를 기웃거리다 어느 피아노실을 엿보게 됐는데, 호기심 어린 낯선 여행자를 발견한 학생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한 대목을 신나게 연주해주기도 했다.

로시니만 보고 페사로를 나오기가 아깝다면 페사로 해변을 찾아 뜨거운 마르케를 만나보자. 유럽에서도 인기 있는 해변이다. 각양각색의 파라솔이 빼곡하게 늘어선 해변은 마치 해운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해안을 따라서는 화려한 클럽과 부티크호텔들이 늘어서 있다.

마체라타(Macerata)도 흥미로운 곳이다.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Arena Sferisterio)은 원래 스포츠 경기장이었던 곳을 공연장으로 꾸민 곳인데 1921년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처음 상영된 이후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오페라 공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92년부터는 한여름에 서너 개의 오페라가 공연되는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기 시작했다.

“반원형 구조의 특이한 극장 형태가 음향을 완벽하게 전달합니다. 아무런 음향 장치의 도움 없이도 소리가 두 배가 돼 울려 퍼지죠.”

직접 만난 아트디렉터 프란체스코 미첼리는 “그동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해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 최고의 성악가들이 스페리스테리오의 무대에 앞다퉈 올랐다”며 “한국의 정명훈도 이곳에서 연주해주시길 바란다”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Plus Info.
[TRAVEL BUCKET LIST] 당신이 몰랐던,우리가 진정 즐겨야 할 이탈리아
인천국제공항에서 로마까지 알이탈리아 항공을 이용해 일본 오사카를 거쳐 갈 수 있다. 안코나공항에서 약 25분 거리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에 호텔 몬테코네로(hotelmonteconero.it)가 자리한다. 12세기 수도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호텔로 재단장한 것으로 고풍스러운 외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해발 550m의 산자락에 자리한 까닭에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장점. 아드리아 해의 멋진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예시(Jesi)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피아스트라 수도원(Abbazia Fiastra· www.abbadiafiastra.net)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법률을 따르는 곳. 수도사들은 여전히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 일반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도원을 돌아볼 수 있다. 수도원은 1800㎡에 달하는 자연보호구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카페, 레스토랑 등과 함께 어울려 있기 때문에 소풍 온 듯 수도원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는 로마보다 오래된 도시다. 아링고(Arringo) 광장의 산 에미디오(San Emidio) 대성당 안에는 르네상스 화가 카를로 클리벨리의 폴립티크화가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한 시청 내부에도 시립 미술관이 있다. 아스콜리 피체노의 뜨거운 햇빛이 부담스럽다면 시티 사이팅 열차 ‘아스콜리 익스플로러’를 타보자. 도시의 명소들을 손쉽게 돌아볼 수 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