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역설, 희망 오류

인생 포기한 자, 혹은 염세주의자같이 들리는가. 그러나 ‘내일 죽어도 그만’이라는 표현은 최고의 불안 상태인 죽음도 개의치 않는다는 진정한 용기의 발언이다. ‘내일 죽어도 그만’인 사람들은 ‘오늘’에 가장 집중하고 몰입해 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리스크로 점철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보일 게다.
[HEALING MESSAGE]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
일의 역설이란 현상이 있다.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연구를 살펴보면, 우선 각기 다른 회사 5곳에서 일하는 직원 100명을 모집했다. 직종과 직위는 다양했다. 그리고 하루에 7차례 무작위로 울리도록 한 무선호출기를 나누어주었다. 1980년대 연구라 스마트폰이 아니고 추억의 무선호출기가 사용됐다. 그리고 호출기가 울릴 때마다 실험에 참가한 직장인들이 짧은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했는데, 호출기가 울릴 때 하고 있던 활동, 현재 직면한 문제, 활용하는 기술, 그리고 동기, 만족감, 참여도, 창의성 등 심리적 상태를 전부 적도록 했다.

이런 실험을 한 이유는 사람들이 직장 안팎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그 활동들이 경험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상식적으로는 즐겁게 여가시간을 보낼 때 사람들이 행복감과 만족감을 더 느낄 듯한데 결과는 반대였다.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보낼 때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더 많은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 실험을 시행했던 심리학자는 ‘몰입(Flow)’이라는 책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시카고대 교수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자유 시간에 사람들은 지루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일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일하러 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는 사람들은 어떤 활동이 그들을 만족시켜주고 또 반대로 어떤 활동이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할지 예상하는 데 서툴다며, 이를 ‘희망 오류’라 명명했다. 희망 사항에 오류가 있다는 이야기다.


긴장의 축과 여유의 축이 균형을 이룬 삶
조기 은퇴해서 멋진 주택에서 노년을 보내는 것, 모든 이들의 꿈인 듯하지만 사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런 메시지를 처음 만들어낸 주인공이 과거 미국의 도시 개발자들이었다고 한다. 부동산 개발을 마케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 뇌는 편하게 내버려둘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할 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돼 있다. 사람이 현재에 몰입하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권태로움이다. 권태라, 바쁜 사람에겐 팔자 좋은 감정인 듯 보이나 실제론 팔자를 망치게 하는 감정이다.

런던에서 일하는 직장인 7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권태감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할 확률이 2.5배나 높은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권태감은 뇌가 변화를 느끼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반응이다. 변화가 너무 없거나 변화를 잘 못 느끼면 심장이 설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 뇌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일하는 것이고 하나는 노는 것이다. 뇌의 일하는 시스템은 완전히 끄고 계속 노는 뇌만 작동시키려 한다면 즐거움도 잘 느껴지지 않고 결국 권태로움만 찾아오게 된다. 학생 시절 시험 공부할 때 머릿속에 하고 싶은 일들로 가득 차는 것, 뇌가 권태감과 멀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험이 끝나니 시험 때 하고 싶었던 일들이 별로 내키지 않는 것, 상대적으로 뇌가 권태로워진 것이다. 긴장의 축과 여유의 축이 서로 균형을 잡고 작동돼야 삶의 가치와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

권태로움, 무기력감에서 벗어나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바로 오늘에 몰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저런 방법이 다 안 될 때 쓸 수 있는 ‘19금 성인용’ 필살기가 하나 있긴 하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란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청소년 자녀한테 ‘내일 죽어도 그만이란 마음으로 살아라’라는 말을 부모로서 할 순 없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로 현재에 대한 몰입이 줄어들어 무기력감을 느끼는 성인에겐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말이 막 살라는 말 같기도 같고 염세주의적 태도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이란 공포에서 자유로워져 오늘에 집중하자는 역설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만 있을 뿐
우리 뇌에는 ‘세상은 노력하면 완벽해질 수 있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와 같은 높은 삶의 목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열심히 사는 것과 삶의 목표가 높은 것은 다른 이야기다. 삶의 목표가 높아야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요즘 같은 저성장 리스크 사회에서 세상은 완벽할 것이라는 높은 기대는 무너지기 쉽고 이것은 곧 무력감으로 이어져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앗아간다.

현대사회를 리스크 사회라고 한다. 20세기 들어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모든 인류가 행복해질 유토피아를 꿈꾸었는데 오히려 원전 사고 등 믿었던 기계가 순식간에 큰 재앙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불안감이 오히려 증대된 상황이다. 리스크 사회는 불안사회이고 곧 우울사회다. 불안은 과도한 미래에 대한 집착이고 우울은 과도한 과거에 대한 후회다. 내 생각의 20%만 과거와 미래가 차지해도 우리 뇌는 행복을 잘 못 느끼는 것으로 돼 있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깡’을 심리학적 용기라 한다. 리스크 사회에 좌절하거나 불안해하면서 숨지 않고 오히려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오늘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만이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고 내일은 그 순간의 또 새로운 오늘일 뿐이다. 그러면 미래에 대한 준비는 하지 말고 막 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텐데 우리 현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미래만 생각하고 있기에 오히려 이런 과감한 필살기를 써주어야 균형이 맞는 수준이다.

가을 날씨가 좋다. 이 가을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단하셔도 된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란 건 죽음도 개의치 않겠다는 용기이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늘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만큼 모든 이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지독하게 평등한 심리적 사건도 없다. 불안의 시작은 죽음의 공포다. 오히려 그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을 때 오늘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우리 뇌가 설계돼 있다는 것, 신비로운 아이러니다.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