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72GC 헤드 프로 양찬국의 골프 이야기

양찬국 SBS골프 해설위원은 시니어 대회를 포함해 연 400회 라운딩을 하는 티칭 프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그는 25세에 골프를 시작해 4개월 17일 만에 싱글을 기록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골프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았던 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MAD ABOUT GOLF] 연 400회 라운딩, 노장불패 양싸부
양찬국 프로는 올 6월부터 석 달간 J골프에서 ‘양찬국의 노장불패3’을 진행했다. 10부작으로 제작된 ‘양찬국의 노장불패3’은 특히 시니어 골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50대와 60대를 직접 경험한 프로가 경험으로 체득한 실전 비기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 게 주효했다.

“시니어들은 몰라서 안 치는 게 아니라, 몸이 안 따라줘서 못 치는 거거든요. 저는 그 나이를 거쳐봤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게 가르치죠. 그러니까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티칭 프로들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고만 들거든요.”


나이 드는 건 퇴화가 아닌 변화
그는 대부분 레슨 프로그램의 가장 큰 문제로 ‘젊은 연예인의 보여주기 식 레슨’을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프로그램이 실속보다 겉모습에 치중한 경우가 많다. 대상이 모호한 레슨도 문제다. 일반적인 레슨보다는 초급, 중급, 고급, 유소년, 장년, 시니어 등 보다 세분화된 레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프로 선수들의 관점에서 레슨을 하다 보면 못 따라가는 많은 골퍼들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점에서 ‘양찬국의 노장불패3’은 시니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이해도 쉽다. 이를 테면 셋업의 완벽한 자세는 ‘등에 아이를 업었다’거나, ‘어깨에 총을 메고 소변을 본다’고 생각하라는 식이다. 퍼트를 할 때도 ‘폐타이어를 굴린다고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해가 빠르니까 받아들이기도 쉽다.

“저는 레슨할 때 외래어를 거의 안 씁니다. 젊은 프로들은 영어 표현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어요. ‘체중 이동’이라고 하면 될 걸 ‘웨이트 트랜스퍼(weight transfer)’라고 하거든요. 그래야 잘나 보이나 봐요.(웃음) 그런데 시니어 중에는 외국어 울렁증이 있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 분들한테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되죠. ‘스윙해 보세요’ 하지 말고 ‘때리세요’라고 하는 게 훨씬 편하게 들리는 거죠.”

대화형으로 진행하는 것도 그의 레슨의 또 다른 특징이다. ‘양찬국의 노장불패3’에는 대본도 없었고 분장도 하지 않았다. 프로듀서(PD)가 분량과 주제만 주면 거기에 맞춰서 양 프로가 알아서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골퍼를 만나서 직접 지도하듯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장점으로 방송이 끝나고도 그를 찾는 골퍼들의 요청이 줄을 잇고 있다. 짧은 방송 시간에 다 못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 그를 찾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레슨을 통해 시니어 골퍼들에게 ‘조금만 연습하면 나아질 것 같다’는 용기와 골프에 대한 열정 키우기를 희망한다.

“저는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지는 건 퇴화가 아니라 변화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분들한테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게 제일 중요하죠. 골프를 즐기러 왔으면 철저히 즐기면 됩니다. 한 타 한 타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서 골프꾼으로 살다
1994년 티칭 프로로 데뷔

그의 레슨을 듣다 보면 ‘통달했다’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25세에 골프에 입문해 40년간 골프밖에 모르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할 터다. 양 프로가 골프에 입문한 건 베트남전을 다녀온 해인 1974년이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골프채를 잡은 그는 4개월 17일 만에 싱글을 쳤다. 짧은 기간에 싱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연습 덕이었다. 그는 남들이 4년 17개월 연습할 걸 그 기간에 해치웠다고 했다. 그때는 밥만 먹으면 골프채를 잡았다.

싱글의 반열에 오른 후에는 상대할 만한 골퍼가 없었다. 함께 라운딩을 하던 아버지 친구들도 어느 순간 그의 동반을 반기지 않았다. 라운딩만 하며 돈을 따가는 그가 탐탁할 리 없었다. 당시 신문사 광고국에 근무하던 그는 주말이면 전국구 골퍼들과 내기를 즐겼다.

그러다 1980년, 그는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골프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미국에서도 골프장부터 찾았다. 무작정 찾은 골프장에서 그는 몇몇 교민을 만났다. 대부분 자영업을 하던 교민들은 아침에 상점 문을 열어야 한다며 9홀밖에 못 치지만 같이 치자고 했다. 그러면서 ‘타당 10달러 내기, 핸디 없이 스크래치로 하자’고 제안했다.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3번 홀까지 돌아보니 대부분 80대 초반의 골퍼들이었다. 프로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진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9홀을 다 돌자 그의 수중에 47달러가 있었다. 식사비와 그린 피, 레인지 연습비를 제하고 오후 라운딩도 가능한 돈이었다. 약이 오른 동료들은 가게가 문을 닫는 3시 30분에 다시 라운딩을 하자고 덤볐다. 대부분 체력이 약해 오후에는 더 힘을 쓰지 못했다. 오후 라운딩에서 그는 다시 60달러를 땄다.

그렇게 시작한 내기 골프는 주말까지 이어졌다. 주말에는 아예 작정한 듯 판돈을 50달러로 키웠다. 그날 그는 오전 18홀에서 200달러, 오후에는 450달러를 땄다. 소문이 나자 골프 치자는 교민들이 줄을 섰다. 그로서는 돈 안 들이고 골프 치고 용돈까지 챙기니 그만한 일이 없었다. 이민 초기 카페테리아를 시작한 아내는 골프만 치는 남편이 돈 한 푼 달라지 않아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때 만난 원수들 때문에 골프꾼이 된 거죠. 하루 종일 연습 볼 치고 오후에 라운딩하면 돈 주지, 주말에는 따로 또 돈 주지 얼마나 좋아요. 당시 기본 시급이 2달러 75센트였으니 일을 할 필요가 없었죠. 그 돈만 갖고도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요.”
[MAD ABOUT GOLF] 연 400회 라운딩, 노장불패 양싸부
지역별로 골프 멤버들이 30여 명 있었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이도 10여 명. 그 대신 많이 따지는 않았다. 많이 따면 아예 칠 생각을 않을 테니까. 하루에 가장 많이 딴 게 1만5000달러였다.

전역 군인인 아버지의 눈에 그런 그가 마뜩지 않았다. 하루는 그를 불러 “너, 노름꾼 다 됐구나”라고 야단을 치셨다. 정신이 든 그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1994년에 미국서 미국골프지도자협회(USGTF) 티칭 프로 자격증을 땄다. 티칭 프로가 된 후엔 골프장에서 레슨을 하며 고급 골퍼들과만 라운딩을 했다. 프로가 됐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벽에 눈 뜨면 연습장에 가고 하루 종일 골프백을 메고 다녔다. 그런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을까. 결국 그는 1997년 아내와 이혼에 이르렀다.

이혼 후에도 골프만 알고 살던 그에게 한국 에이스회원권 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 인천 스카이72골프클럽(GC)을 준비하던 차에 그에게 사업성에 대한 의견을 물어온 것. 골프장 설계안을 낸 사람의 프로필을 보내며 그가 설계한 미국 골프장이 어떤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 직후 그는 프로필에 나온 골프장에 가서 사진도 찍고 라운딩도 일일이 했다. 라운딩 후에는 직원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어떤 곳은 그가 설계를 한 곳이 아니라 몇 홀의 수리만 한 곳도 있었다. 전체를 설계한 것처럼 프로필에 쓴 거였다. 그런 내용을 스카이72GC 대표에게 전했으니 감동할 수밖에. 그게 인연이 돼 2000년, 스카이72GC 헤드 프로로서 한국에 들어왔다.

“티칭 프로도 하면서 처음엔 미국프로골프(PGA) 해설을 하려고 했어요. KBS 해설자 오디션도 봤어요. 그런데 해설을 하려면 PD들한테 술도 사고 그래야 한다더군요. 그건 또 적성에 안 맞아요. 친해서 술 먹자면 모를까. 다행히 그 인연으로 나중에 KBSN스포츠에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PGA 해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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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1만4000 라운드, 아쉬움 없는 골프 인생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도 미국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카이72GC에서 레슨을 하는 틈틈이 방송에 출연하고 경희대 체육대학 겸임 교수로 출강도 했다. 챔피언스 투어, 대한골프협회 대회 등 시니어 대회도 3주에 한 번꼴로 참가한다. 대회에 나간다고 성적에 목을 매는 건 아니다.

투어 프로라면 대회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만 그에겐 스카이72GC라는 직장이 있다. 그만큼 절박하지 않다는 얘기다. 1m 퍼트를 남기고도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다. 돈이 필요하면 티칭을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실 제가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라 적도 많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티칭 프로계에서도 많은 공격을 받았어요. 제가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티칭 프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요. 그래서 63세가 되던 2012년에 KPGA 티칭 프로 자격을 땄어요. 너무 배척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딴 거죠.”

최고령으로 KPGA 티칭 프로 자격증을 딸 정도로 체력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번 추석에도 새벽 5시 40분부터 하루 54홀을 돌았다. 몇 해 전에는 스카이72GC에서 20시간 50분 동안 72홀 치고 철인패를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 라운딩만 1만4000회. 그래서 아쉬움은 없다.

그는 다리 힘이 있을 때까지 골프를 칠 거라고 했다. 골프 칠 힘이 없으면 골프장 잔디를 깎으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그만큼 골프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 양 프로다.

“제가 골프에 빠진 건 베트남전의 영향이 큰 거 같아요. 베트남에서 26개월 있었는데 그때는 죽는 게 정말 무서웠어요. 스물네 살짜리가 뭘 알았겠어요. 옆 친구가 포탄 맞고 팔, 다리가 떨어지는데 ‘진격’이란 말이 귀에 들어오나요. 그러다 보니 도시에 들어가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데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사회에서 경쟁하며 머리 굴리는 것도 적성에 안 맞고요.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골프는 달라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책임에, 모든 결과가 저 하기 나름이거든요. 티 박스에 바람을 맞고 서 있으면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욕이 생겨요.”

그는 66세를 사는 동안 세 분께 감사한다고 했다. 첫째는 생명을 주신 신이다. 둘째는 늙은 프로를 거둬 평생 골프를 칠 수 있게 해준 김영재 스카이72GC 대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혼한 전 부인에게 감사한다. 이혼을 통해 그는 술, 담배를 끊었고 사람 노릇하며 살게 됐다. 그런 면에서 아내에게 고맙다고 했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