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따위를 신느니, 불편해도 구두를 벗지 않겠다”고 외쳐 온 품격 있는 신사에게.
다양한 브랜드에서 선보이는 벨벳 슬리퍼들.
다양한 브랜드에서 선보이는 벨벳 슬리퍼들.
많은 비즈니스맨들의 사무실 책상 아래에는 슬리퍼 한 켤레가 자리하고 있다. 통기성이 좋아 발에 땀이 차지 않고, 무엇보다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이힐을 신고 출근하는 비즈니스 우먼들의 불편함도 잠시 해소시켜준다. 반면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비즈니스 웨어 차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좌식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와 달리 어느 곳이건 입식으로 설계한 서양 문화권에는 다양한 슬리퍼가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구두’라는 한 가지 이름만을 사용하는 카테고리에서도 로퍼, 옥스퍼드 슈즈, 브로그 슈즈 등 다양한 개별 명칭으로 지칭하는 만큼, 슬리퍼 역시 여러 종류다.
처치스의 소프트 솔 레더 슬리퍼.
처치스의 소프트 솔 레더 슬리퍼.
가장 격식을 갖춘 슬리퍼는 앨버트 슬리퍼라고도 불리는 벨벳 슬리퍼다. 앨버트 슬리퍼라는 이름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앨버트 왕자 이름을 딴 것인데, 그가 처음 고안했기 때문이다. 슬리퍼라고 하면 당연히 뒤꿈치가 트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인과 달리 서양에서는 슬립온 스타일의 가벼운 실내화도 슬리퍼로 통칭한다. 벨벳 슬리퍼는 스모킹 재킷(과거 남자들이 흡연시 입던 일종의 턱시도 스타일의 재킷)에 착용해도 될 만큼 높은 포멀 지수를 자랑한다. 일반적인 구두와 달리 아웃 솔이 얇으며, 발에 직접 닿는(양말을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인 솔을 세심하게 신경 쓴 것이 많다. 앞 코 부분을 화려한 자수로 장식한 것이 많은데, 이는 귀족들이 자기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은 것에서 유래했다. 주요 생산 브랜드로는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브로드랜드와 이에 버금가는 전통을 지닌 보힐 앤드 엘리엇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미국의 스텁스 앤 우튼, 스페인의 스켈퍼스 등을 만날 수 있다. 벨벳 슬리퍼는 이러한 전문 브랜드뿐 아니라 전통을 추구하는 영국 신발 브랜드들에서도 대부분 선보이고 있다.
파우치와 안대를 함께 제공하는 트래블 키트는 파르팔라 by 유니페어.
파우치와 안대를 함께 제공하는 트래블 키트는 파르팔라 by 유니페어.
뒤꿈치가 막힌 슬립온 스타일의 벨벳 슬리퍼가 불편할 것 같다면, 처치스나 크로켓 앤 존스에서 만드는 소프트 솔 레더 슬리퍼를 눈여겨볼 만하다. 구두처럼 매끈한 가죽으로 만들었지만, 부드럽고 푹신한 착용감을 지녔다. 외출용 신발로도 손색없는 벨벳 슬리퍼와 달리 실내에서만 신을 수 있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사무실 바닥이 꽤 청결한 편이라면 파르팔라의 트래블 슬리퍼도 고려해볼 만하다. 가죽으로 만든 양말을 연상시킬 만큼 편하며, 로퍼로 착각할 정도로 멋지다. 본래 기내용 슬리퍼로 제작된 것으로 가볍고 휴대하기 쉬워 해외 출장이 잦은 비즈니스맨에게 유용한 아이템이다.


기획 양정원 기자│ 글·사진 김창규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