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헌 작가·패션 칼럼니스트·스타일리스트|사진·정리 김창규] 남성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이 조명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장인들. 다섯 번째 주인공은 구두를 만드는 선비, 피렌체 구두 장인 최연승이다.


피렌체 작업실로 안내하는 최연승. 소박한 삶을 유지하는 그의 작업실은 2층에 위치한다.
피렌체 작업실로 안내하는 최연승. 소박한 삶을 유지하는 그의 작업실은 2층에 위치한다.
본 칼럼 연재로 취재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사람들을 만났다. ‘대한장인’으로 명명된 주인공들은 장인이라 불릴 만한 이들로, 서로 공유하는 성격적인 특징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집요함이랄까. 모든 이가 정도와 느낌은 달라도 깊이 파고드는 듯한 돌파력 혹은 놀라운 집중력 같은 것들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집합에서 조금은 많이 벗어난 듯한 이를 만났으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구두를 만드는 최연승이다.


그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를 정의하는 이미지를 찾다 보니 안빈낙도(安貧樂道), 유유자적(悠悠自適) 같은 선비를 묘사할 때 적용되는 한자어들이 떠올랐다. 한창 트렌드를 추구하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푹 빠져 과다한 정보에 따라 표류하는 동시대의 흔한 젊은이들, 삶의 방향성을 위해 지나치게 열중하고 고민하느라 이기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20대 중반의 청년들을 흔히 봐 왔다. 하지만 밝은 미소 속에서 느릿느릿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긴 호흡으로 걷는 최연승의 모습을 보면서 또래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나이를 의심했다.


해탈자들에게서나 봄직한 그의 넉넉한 태도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삶의 곡절을 겪어 일찌감치 득도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유야 어떠하든 그가 천직으로 택한 구두 만드는 일을 향한 태도와 삶을 즐기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나이에 그런 삶의 태도를 갖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어쩌면 이 칼럼이 이상적인 젊은 날의 삶을 향한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그렇게 강조했다는 안빈낙도에 대해 말이다. 피렌체에 살고 있는 20년쯤 후배인 청년으로부터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세상은 아직도 더 살아 볼 만하다.


발 사이즈를 측정 중인 최연승
발 사이즈를 측정 중인 최연승
스스로 길을 택하는 삶의 태도
최연승은 1992년 서울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님께서 여전히 금융업에 종사하고 계시니 그의 삶은 보통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그냥 굴곡 없는 철부지 부잣집 아드님의 스토리로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검정고시로 고졸에 준하는 자격을 얻은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또래들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교 2·3학년의 나이에 이미 서울의 유명 편집매장에서 활동적인 세일즈를 하던 사실까지 들으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도 조금은 달라진다. 하지만 그를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는 또 다른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생 겪어 보지 못할, 매우 독특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피렌체 생활 중 잠시 고국을 찾았을 때 심정지를 일으켰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어머니가 심폐소생술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지금 구두 만들기를 즐기고 있지만, 평범한 삶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런 경험은 아마도 그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간절하면서도 선물 같은 지금의 삶. 그가 좀 더 신중하고,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며 진지하게 삶을 마주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아닌가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제작 중인 구두와 작업 도구들이 놓인 최연승의 작업대
제작 중인 구두와 작업 도구들이 놓인 최연승의 작업대
고객들의 사이즈 정보를 담은 구두골과 부자재들은 구두 제작의 기본이 된다.
고객들의 사이즈 정보를 담은 구두골과 부자재들은 구두 제작의 기본이 된다.
슈메이커로서의 성장 과정

그가 처음으로 구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편집매장에서 일하던 2010년경 해외에서 생산돼 비싼 값에 팔리던 고급 구두와 마주하게 된 직후라고 한다. 잘 만들어진 구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견고함, 갑피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가죽의 터치와 컬러, 그리고 그 구두가 만들어 내는 스타일의 변화를 보면서 구두라는 공예품이 가진 깊고 심오한 세계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는 이후 국내의 다양한 구두 전문 매장들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구두의 제법과 나라별로 다른 스타일의 제화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구두 만들기를 배우기로 결심을 했지만 아직 군 미필이라는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입대한 후 틈나는 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제대를 앞둔 시점에 피렌체의 유명 슈메이커 스테파노 베메르(Stefano Bemer)가 설립한 구두 학교로 방향을 정하고 제대 후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베메르는 지금은 고인이 된 피렌체 하이엔드 슈즈의 전설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두에 매료된 많은 이들에게 구두 만드는 공정을 가르치는 교육 시스템을 잘 갖춘 곳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영화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구두 제조 과정을 배우고 공방에서 수련생활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연승도 그곳의 교육과정을 마친 뒤 견습공으로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하는 발 사이즈 측정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하는 발 사이즈 측정
발 사이즈를 측정한 상세 정보
발 사이즈를 측정한 상세 정보
견습공이라는 위치가 낮은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극소수의 졸업생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로, 그의 꼼꼼한 손놀림과 솜씨를 일찌감치 알아본 학교 측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견습공 과정을 거치며 제화 학교와 수습생활까지 도합 2년 6개월가량 슈메이커로서 기본기를 닦았다. 이후 또 다른 저명한 피렌체의 구두 브랜드인 만니나(Mannina)에서 추가적인 제작 경험을 했고, 다음으로 로마에 근거지를 둔 세계적인 구두 브랜드 마리니(Marini)의 외주 작업에도 꾸준히 참여하면서 제화 기술 전반에 대한 지식과 기술적 측면을 섭렵했다. 솜씨 좋기로 소문난 크고 작은 브랜드들의 외주 공정까지 맡으면서 자신만의 미의식을 부지런히 쌓아 나가고 있다.


구두 장인이 된 그와의 추억
취재차 방문했던 피렌체에서 필자는 최연승에게 자신의 삶을 반영할 만한 장소나 관심사를 소개해 줄 것을 부탁한 바 있다. 아무래도 심도 있는 취재를 하기 위해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함께 피렌체 인근의 아레초(Arezzo)라는 도시로 향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전에도 한번 다녀온 적이 있던 터라 기쁘게 응했다.


아레초는 앤티크와 빈티지 시장이 잘 형성된 곳으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잘 알려진 도시다. 아기자기한 이 도시의 풍광도 매력적인데, 이탈리아 국민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의 명작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도시다.


피렌체로부터 1시간 반쯤 걸리는 기차 안에서 이런 저런 살아가는 얘기와 앞으로의 계획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그 아름다운 도시엔 때마침 벼룩시장이 골목마다 길게 늘어져 있었다. 구석구석 그 벼룩시장을 따라 오래전 장인들이 사용하던 작은 자와 컴퍼스 등을 고르며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일치하는 사람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레초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찾아간 가장 맛있다는 식당의 긴 대기 명단을 확인하곤 바로 옆집으로 발을 돌려 여기가 두 번째로 맛있는 곳이라고 설명하는 그의 위트와 임기응변도 어쩌면 그의 태도를 반영하는 듯했다.

아레초역에서 최연승
아레초역에서 최연승
아레초에 다시 방문할 일, 그것도 최연승과 함께 다시 올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하니 1등 맛집의 식도락 경험이 간절한 필자에겐 그의 그런 빠른 전환이 많이 아쉬웠지만, 지나고 보니 이 역시 그가 소중한 삶을 편안하게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피렌체로 돌아온 뒤 최연승의 ‘최애’ 맛집이라는 피자집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고, 무엇보다 그렇게 부지런히 필자를 안내하는 그의 모습에서 차선과 차차선의 선택에서도 충분히 만족하는 삶, 미련을 두지 않는 미련하지 않은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며칠 뒤 본인이 기거하며 개인 작업을 진행하는 피렌체의 집으로도 초대를 받았는데, 관광지 이면의 한적한 2층 방에 소박한 음식을 차리고 차와 와인을 마시며 나누던 대화들도 기억에 생생하다. 구두 만들기를 위한 발 사이즈 체촌 방식은 특히나 구두 장인들에겐 겸허와 겸손을 요구한다. 바닥에 몸을 잔뜩 구부리고 발과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해 수치화하는 작업은 기다리는 필자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 발을 붙들고 조아리며 수차례 온몸을 구부리는 상황은 큰 권세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나 편안한 일이 아니던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옮기기 위해 수십 분간 땀 흘리는 그를 보면서 구두 만들기의 모든 공정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다시금 하게 됐다.


본래 이 칼럼이 소개될 봄의 한가운데 즈음에는 그가 서울에 찾아와 구두의 첫 번째 피팅을 제공하고 더 많은 사진을 찍어 칼럼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하지만 전례 없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하며, 특히 이탈리아 전 지역이 봉쇄된 사실은 우리 국민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한 이유로 구두도, 유쾌한 이 청년도 다시 만나는 일이 기약 없이 미뤄졌다. 나만을 위해 디자인된 우주에 단 한 켤레밖에 없는 구두가 너무나도 궁금하고 기다려지지만, 전전긍긍 상황을 재촉하는 것은 아마도 최연승의 구두를 기다리는 태도는 아니리라.


최연승의 피렌체 맛집
최연승의 피렌체 맛집
지금도 문밖으로 나설 수 없는 이 상황을 묵묵히 이겨 내며, 아니 함박 미소와 함께 이 상황을 즐기며 더 좋은 구두를 만들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역병을 이겨 내는 삶의 지혜도 얻을 수 있는 듯싶다. 코로나19가 만든 단절이 어떻게 그와 우리 모두를 성장시킬지 궁금하다. 전 세계를 긴장시킨 시대를 이겨 낼, 나만의 구두를 기다리며 최연승과 이탈리아의 모든 장인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 작가이자 패션 칼럼니스트 겸 스타일리스트 이헌은 홍익대를 졸업하고 미국뉴욕주립대(SUNY),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 머천다이징(Fashion Merchandising Management)을 공부했다. 국내외 패션 브랜드의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으며, 네이버 블로그 ‘IL GUSTO DEL SIGNORE(일 구스또 델 씨뇨레)’에서 ‘한국신사’라는 필명으로 클래식한 남성 취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더 패션 아이콘즈(THE FASHION ICONS)>의 감수자로 <맨즈웨어 도그>의 번역자로 참여했다. 저서로는 <신사용품>,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