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라고 할 만한 지배적인 종교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를 좁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특정한 신을 섬긴다든가, 특정한 종교의식을 정기적으로 치른다든가, 특정한 종교 건물을 자주 찾는 것을 종교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를 신앙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생활방식이다. 따져보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종교의 자유가 구현된 사회에 살고 있다.

성가실 정도로 열렬한 포교 활동이나 다른 종교를 폄하하는 태도가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나서서 전 국민에게 특정한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압도적인 종교가 사회 전 부문을 좌지우지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를 특정한 신앙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종교를 갖든 말든 각자의 마음이니까.

우리 역사에서는 종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으므로 우리가 그런 종교관을 갖고 있다고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다. 문제는 남들도 그러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일종의 모태 신앙을 취하고 있다. 종교는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회가 취하는 노선과 방향은 물론 개인의 일상생활도 규정한다. 더구나 종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치관이자 풍속이기 때문에 쉽게 없애거나 바꿀 수도 없다.

그런 종교의 의미를 우리 식으로 해석한다면, 전통적 규범과 의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몇 차례 있다. 13세기에 1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은 것이 최초이고, 36년간의 일제강점기와 1945~48년 미군정이 지배했던 기간이 그것이다.

모두 우리 정부가 없었고 외국의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를 받은 시기다. 이때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생활방식까지도 외부의 강압으로 변화시켜야 했다면 당연히 범민족적 봉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예컨대 외국의 지배자가 우리 민족에게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란 바로 그런 의미다.

그렇게 보면 20세기 벽두에 발칸반도를 왜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발칸 지역은 정정이 무척 복잡했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늦은 세계 진출과 식민지 확장을 위해 발칸을 세력권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 역시 부동항을 찾아 유라시아 동쪽을 헤매고 있었으므로 발칸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또한 터키(투르크)는 발칸의 전통적 패자였으므로 나름대로 종주권을 내세웠다.

발칸 자체에서도 세르비아는 이 지역의 최강국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을 통합하고자 했다. 이 모든 패권주의에 맞서 서유럽 세계는 발칸을 어느 측에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정세 때문에 발칸은 언제라도 뇌관만 건드리면 터질 폭탄과도 같았다. 그 뇌관이 바로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총격을 당한 사건이었고 그것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시사에는 역사가 숨어 있다. 그 복잡한 정세의 배후에는 발칸의 오랜 역사가 얽혀 있어 사태가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핵심에 바로 종교가 있다.

문제는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발칸 북부에 세운 신도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데서 시작한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 새 종교를 이데올로기적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붕괴 직전에 있던 로마제국을 다시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탄생한 지 이미 300여 년이 지난 탓에 기독교는 단일한 신앙이 아니라 여러 신앙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에서 최초의 공의회를 열고 직접 사회를 맡으면서 종교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사실 그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도가 됐다).

이때 삼위일체론이 채택되고 다른 신앙의 갈래들을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외관상 통합은 이루었지만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 문화가 그저 정치적 결정만으로 하루아침에 통합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싹튼 종교적 분열의 조짐은 결국 교회의 동서 대분열로 나타난다. 때마침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제국은 동서로 분열됐고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한다. 이후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10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종교도 동방정교로 로마가톨릭교와 거의 분리된다.

그래도 같은 기독교의 두 갈래였기에 두 종교는 서로 완전히 적대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다툼과 경쟁을 벌였으나 십자군전쟁 같은 이교도와의 충돌에서는 어렵지 않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15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에 멸망한 뒤부터다.
외국의 지배자가 우리 민족에게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란 바로 그런 의미다.
외국의 지배자가 우리 민족에게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란 바로 그런 의미다.
동로마의 오랜 영토였고 종교적으로 동방정교에 속했던 발칸반도가 삽시간에 이슬람교권이 돼버렸다. 당연히 마찰과 충돌이 없을 수 없었으나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 지배층은 기독교 신앙을 말살하지 않는 선에서 피지배층과 타협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 지역은 전통적인 동방정교, 일부 로마가톨릭교, 신흥 이슬람교가 뒤섞여 ‘종교의 도가니’를 형성하게 된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 원래 돼지는 유목민들이 끌고 다니기 어려운 가축이었고 돼지고기는 훈제도 되지 않는 탓에 오래전부터 서남아시아의 유목민들이 먹지 않았다.

이 전통이 굳어지고 종교적 정당화까지 더해져 결국 돼지고기는 더러운 고기로 낙인 찍혔다. 물론 기독교에는 그런 금기가 없다. 그런데 발칸의 한 노천 식당에서 기독교도가 돼지고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고 해보자. 그 모습을 보고 이슬람교도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모세의 십계명부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누구나 하루에 다섯 차례씩 자신이 어디에 있든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도 무아딘이 미나레트에 올라가 육성으로 기도 시간을 포고한다. 기독교도라면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다.

두 종교의 신자들은 서로 감정이 부딪친다. 더구나 현대처럼 종교적 관용이 중요한 가치관으로 등장한 시대도 아니었다. 이런 상태로 투르크의 지배가 400여 년이나 지속되면서 문화적 모순과 충돌은 점점 첨예화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발칸의 사정이 복잡했던 배후에는 단순히 국제적인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만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적 분열이 있었다.

현대 세계에서도 국제적 분쟁의 기저에는 종교, 그리고 종교가 낳은 문화·역사적 반목이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가 대립하는 팔레스타인 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이웃한 인도-파키스탄, 이란-이라크의 알력에도 종교적 차이가 작용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처음부터 종교적 차이로 국가적 분립이 이루어졌다. 인도는 전통적인 종교로 힌두교를 채택하고 있지만 14세기부터 무굴제국이 지배했기에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다. 이 분립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의 분열을 낳았다(파키스탄은 인도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이 이주해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다).

이란과 이라크의 갈등은 민족적 차이도 있지만(이란 민족은 셈족이 대부분인 중동에서 유일하게 페르시아, 즉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이슬람교의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가 대립해온 역사를 반영한다.

시아파는 이슬람교 초기에 남아 있었던 모계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관습에 따라 마호메트의 딸인 파티마와 사위인 알리를 종교적 적통으로 여기는 종파였고, 수니파는 마호메트의 사후 현실적 권력을 획득한 4대 칼리프를 적통으로 여겼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오랜 종교적 갈등에서 형성된 대립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 첨단의 시대에 아직도 해묵은 종교를 놓고 다투다니.” 이렇게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종교를 좁은 의미로 바라보는 편협한 관점이다.

종교 분쟁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첨단의 문제’다. 군사적 전쟁과 경제 경쟁의 시대가 가면 결국 최후로 남는 분쟁의 요소는 가치관과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과거 역사에서도 종교 때문에 빚어진 전쟁은 ‘고결한 전쟁’에 속했다. 물론 전쟁을 미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생활방식을 놓고 싸운다면 영토나 자원을 놓고 싸우는 것보다 한결 고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일러스트·추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