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ine 제 37호 (2008년 06월)

M&A규제와 외자유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본

일본 정부엔 유식자(有識者) 회의라는 것이 많다.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종의 자문 기구다. 그중 하나인 대일투자유식자회의가 최근 ‘기업들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정부에 권고했다. 외국 자본에 의한 일본 기업의 매수를 지나치게 억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다. 유식자회의는 이와 함께 ‘외국 자본 규제에 대해서도 근거를 명확히 하고 투명하게 집행할 것’도 건의했다.

외국 펀드 등의 적대적 M&A에 대해 완강했던 일본 정부의 그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제언이다. 일본 정부는 선진국 중 그 어느 나라보다도 외국 자본의 내국 기업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기업들도 외국 자본의 경영권 인수 시도에 극력 저항해 왔다. 그러던 일본이 왜 태도를 바꾸려는 걸까.

이는 기업들의 지나친 경영권 방어로 일본에 대한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가 늘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국인 직접 투자액 잔액 비율은 2006년 말 현재 일본이 2.5%에 불과해 30~40%에 달하는 영국 프랑스는 물론 10% 수준인 한국에도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한 M&A 규제와 외국인 직접 투자는 반비례 관계다. M&A 규제를 강화할수록 외국 자본은 그 나라 투자에 매력을 잃는다. 그렇다고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를 위해 M&A 규제를 마냥 풀 수도 없다. 그랬다간 알짜 자국 기업이 국적도 불분명한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일본은 지금 M&A 규제와 외국인 투자 사이에서 고민에 빠져 있다.

적대적 M&A에 요새 구축

외국 자본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M&A 철옹성’이다. 기업들은 포이즌 필(poison pill: 독약 조항) 등으로 경영권 방어책을 쳐 놓았고 정부는 보이지 않게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를 후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일본 식품회사 불독소스를 적대적 M&A하려다 두 손을 들어 버린 미국 사모 펀드 스틸파트너스 사례다. 스틸파트너스는 작년 5월 주식공개매수(TBO)를 통해 불독소스의 지분을 늘려 경영권을 인수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물론 불독소스 경영진은 스틸파트너스 인수에 강력 반대했다. 스틸을 제외한 주주들에게 신주인수권을 부여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방안을 지난해 6월 주주총회에 올렸다. 경영권 방어안은 주주 80%의 찬성으로 도입됐다. 스틸파트너스는 차별적인 신주인수권 부여는 ‘주주 평등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일본 법원에 신주인수권 발행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러나 일본 고등법원(2심)은 스틸파트너스가 아닌 불독소스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고등법원은 판결에서 “스틸파트너스는 기업 가치를 제고하기보다는 단기적 주식 시세 차익을 노린 ‘남용적 매수자’로 볼 수 있다”며 “이에 대항해 주주들이 매수자를 차별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주주 평등주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본 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라 불독소스는 곧바로 스틸파트너스를 제외한 주주들을 대상으로 1주당 3개의 신주인수권을 발행하고 스틸파트너스엔 신주인수권 대신 현금 23억 엔(약 230억 원)을 지급했다. 일본 기업이 외국 기업의 적대적 M&A에 대항해 신주인수권으로 방어한 것은 불독소스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스틸파트너스의 불독소스 지분은 당초 10%에서 한 자릿수로 줄어들어 적대적 M&A는 사실상 실패했다. M&A 시도가 좌절된 스틸파트너스는 최근 불독소스의 보유 지분 전량을 팔고 철수했다.

2006년 한국의 KT&G 지분을 집중 매수해 경영 참여를 시도하기도 했던 스틸파트너스는 일본 기업 인수 시도에선 번번이 어려움을 겪었다. 스틸파트너스는 지난해 일본 기계 업체인 텐류세이쿄(天龍製鋸)의 공개 매수도 시도했으나 경영권 확보에는 실패했다. 또 맥주 회사인 삿포로맥주를 인수하겠다고 공개 제안한 뒤 시장에서 18%까지 지분을 매집했지만 회사 측의 경영권 방어책 도입으로 무산됐다.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증권에 따르면 불독소스처럼 포이즌 필을 경영권 방어책으로 갖고 있는 일본 기업은 현재 634개사에 달한다. 전체 상장사의 16%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상장사 중 포이즌 필을 도입한 회사 비율 8.5%의 두 배에 이른다. 2004년까지만 해도 이 방어책을 갖춘 일본 회사는 2개사뿐이었지만 최근 급증한 것이다.

최근 영국계 헤지 펀드인 ‘더 칠드런스 인베스트먼트(TCI)’가 일본 최대 전력 회사인 J파워의 지분을 9.9%에서 20%까지 늘리려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철회를 요구한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TCI의 계획에 대해 “공공질서 유지를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외국 자본 ‘불만 폭발’

‘M&A 철옹성’ 일본에 대해 외국 자본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일부에선 불만을 공식적인 비판으로 표출하고 있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주요 해외 기관투자가들이 일본 기업에 M&A 방어책 철회 등 기업 지배 구조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것.

미국의 최대 공적연금인 캘퍼스(캘리포니아 주 직원퇴직연금)와 영국 최대 연금 운용 회사인 하미즈, 캐나다 최대 기관투자가 브리티시콜롬비아 인베스트먼트 등 미국과 유럽의 기관투자가 6곳은 최근 공동으로 일본 기업의 지배 구조 개혁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은 동시에 투자 대상인 일본의 상장기업 500여개 사에 이 같은 요구를 서한 형태로 보냈다.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특정 국가의 기업 지배 구조를 문제 삼으며 공동으로 입장을 내놓기는 이례적인 일이다.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일본 기업들이 차별적인 신주인수권 발행 등 포이즌 필을 도입해 외국계 펀드의 M&A 시도에 강력 저항하고 있는 데 대한 역공으로 풀이된다. 기업의 M&A 시장을 놓고 외국계 펀드와 일본 기업 간 정면충돌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일본 기업에 요구하고 있는 첫 번째 사항은 M&A 방어책을 즉각 철회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 기업들이 상장기업의 소유자가 주주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주주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경영권 방어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불가피하게 경영권 방어책을 도입하려는 경우엔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제3자 위원회를 설치해 방어책을 심사하도록 요구했다.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개혁도 들고 나왔다. 6개 외국 기관투자가들은 ‘주주의 권리 보호나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선 모든 상장기업에 최소 3명 이상의 독립적인 사외이사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론 미국처럼 이사진의 절반을 사외이사로 채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관련 기업 간 상호출자를 통한 주식 교환 보유에 대해서도 ‘의결권 행사를 왜곡할 수 있다’며 해소를 요청했다. 자본의 운용 효율이 낮은 기업 등에는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으로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하미즈의 시니어 자문역인 마이클 코나즈는 “우리들의 제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업 경영진에 대해선 오는 6월 주주총회에서 재신임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 외국 기관투자가 6곳이 보유하고 있는 일본 주식 잔액은 총 2조 엔(약 20조 원)이 넘는다. 제3자의 단순 제언이 아닌 일본 기업 주주로서의 강력한 요구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 협박으로까지 비춰질 정도다.

컨설팅 회사인 리스크메트릭스그룹의 마크 골드스테인 일본연구소장은 “일본은 M&A에 대해 피해망상증에 빠져 있다”며 “이는 외국인 투자를 감소시켜 일본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일본 기업들은 ‘악질적인 기업 사냥꾼에 대한 제도적 방어 장치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부족하다’며 경영권 방어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M&A 시장을 열지 않으면 외국인 투자가들이 모두 떠날 것이라고 위협하는 외국 자본과 국가 경제를 위해선 외국 자본으로부터 자국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기업 사이에서 일본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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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8-07-0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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