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공포감 없애기
RETIREMENT ● Second Life Essay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

수백만 명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를 맞이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은퇴 후 30~40년 생활을 두려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 과연 그 긴 세월을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는가 생각하면 공포감이 가득 차오른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베이비부머들은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휴식은 일과 더불어 가끔 있어야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니다가 주말에 등산 가고 골프 가는 것이 휴식이지 매일 일 없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재앙과 다름없다고 여긴다. 은퇴 후 가장 하고 싶다는 여행도 기껏해야 일주일이나 2주일짜리 패키지여행을 얼른 다녀오고 만다.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심정이 강하기 때문에.

은퇴 설계를 강연하거나 상담하는 현장에서 만난 중년들은 은퇴 후 3개월이나 6개월 정도를 쉬면 딱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1년 이상 쉬면서 재충전을 하겠다는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재충전 기간의 길이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은퇴 후에는 막연하게 사회생활을 계속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세우고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

김 모(62) 씨는 2년 전 공기업을 은퇴한 후 여행, 등산, 친목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지내다가 지인의 소개로 10개월짜리 한옥 집짓기 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배우다 보니 집짓기가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한옥학교 졸업 후 조경기사 자격증과 굴착기 운전 자격증을 더 취득했다. 요즘은 한옥학교 졸업생들이 건축 현장으로 계속 불러주고 있어서 아주 바쁘게 다니고 있다.

박 모(57) 씨는 고용노동부에서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영리단체 취업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년 전 회사를 나와서 재취업을 했지만 막상 출근해보니 자신이 근무하기에는 마땅한 곳이 아니어서 몇 달 만에 그만뒀다. 그는 집 근처에 있는 지방대학에 붙은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식비를 주는 6개월짜리 프로그램이었다. 박 씨는 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현장학습 때 열심히 일을 한 결과 그 비영리단체에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작은 급여지만 평소에 사회봉사를 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사회봉사를 하면서 경제적인 지원마저 받을 수 있어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이 사례들을 통해 보듯이 우리나라의 중년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삶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직장에 모든 것을 바치면서 얽매여 왔기 때문에 자신을 파악하는 데 취약한 상태다. 은퇴가 다가오면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막연하게 재취업이나 창업을 시작하면 얼마 못 가서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물론 새로 잡은 일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므로 얼마 다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퇴를 부정적인 사건으로 바라보지만 외국에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긍정적인 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퇴를 한문으로 숨을 ‘은(隱)’자와 물러날 ‘퇴(退)’로 표현한다. 영미권에서는 은퇴는 ‘리타이어(retir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를 리(re) 타이어(tire), 즉 ‘타이어를 새로 교체한다’고 해석한다. 은퇴는 현역에서 물러나 쉬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위해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다시 달린다는 말이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목적의식으로 달리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형태를 먼저 선택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은퇴연구소에서는 중장년들과 상담할 때 은퇴 후 자신이 원하는 삶의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비전),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정체성),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치), ‘나의 재능을 살려서 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재능 활용), ‘앞으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관계), ‘나는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가’(환경) 등이다.

과묵한 중년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을 생소하며 불편하게 생각한다. 이를 좀 더 감성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은퇴 후 꼭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버킷리스트), 젊을 때 포기한 꿈, 자신이 가장 행복한 일. 은퇴 후 재충전 기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을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은퇴를 뒤로 물러나 숨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하고 다시 달리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휴식, 배우자, 자녀들, 우정, 협력, 비경쟁, 배려, 여유, 소박, 자유, 관념에서 벗어나기, 안분지족, 버킷리스트, 자발적인 고독. 이런 단어들이 중년들의 워크숍에서 나온 긍정적인 개념들이다.

둘째는 자신의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은 현역형,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즐기고 싶은 여가형,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회봉사형,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탐험가형 등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선택하자. 잘못 생각하면 너무 지루하고 무의미한 삶이 될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고민해야 한다.

셋째는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배운 지식은 이미 수십 년간의 사회생활로 거의 소진했다. 그래서 중장년의 문서를 이해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실질 문맹률로 측정)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권이라고 한다. 평생교육원, 방송통신대, 폴리텍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은퇴교실, 취업이나 여가 아카데미, 인문학 강연을 개최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많은 지식과 사람을 알아가다 보면 자신의 삶을 그려낼 수 있다.

넷째는 꼭 현장에서 실습을 해보는 것이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그 진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농촌에서의 삶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도시형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초부터 취미로 시작한 시골 생활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목표와 스타일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하던 목공 활동은 어느새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며 내 갈 길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반드시 현장에서 긴 시간 체험을 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의견보다는 자신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은퇴 후 중년들이 맞이하는 30~40년의 삶은 중요하다. 은퇴 생활의 3대 리스크인 지루함, 무의미함, 가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치열하게 모색해야 한다. 남들의 의견이나 정보에 의존하게 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드시 자신이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찾아보자. 그래서 배우고, 일하며, 즐기고, 나누고, 함께하는 삶을 디자인하자.

우재룡 소장은…
국내 은퇴 설계 대중화에 기여한 은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은퇴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수천 명의 은퇴자를 컨설팅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무설계 무작정 따라하기>, <긴 인생 당당한 노후 펀드투자와 동행하라>, <오늘부터 준비하는 행복한 100년 플랜>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