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보고, 신화-전문가 3인 좌담회

전문가 3인 좌담회 “신화 정신 회복에 미래 있다”
[한경 머니 = 이현주 기자] 신화적 상상력은 여전히 21세기에도 유효할까. 오늘날 신화와 현대 사회를 잇는 연결고리와, 오늘날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키워드와 함의를 찾는 대화의 장이 열렸다. 동양 신화의 힘에 대해 공감하는 신화학자와 정신분석학자, 경영학자 3인이 모여 신화적 상상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헤쳐 하나로 모아지는 의견은 “신화 정신의 회복에 미래가 있다”는 결론이었다.

좌담 석철진 경희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위즈덤 최고경영자(CEO),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정재서 이화여대 명예교수 (가나다 순)

진행 및 정리 머니 이현주 기자(이하 이 기자) 오늘 이 자리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오늘날 유효한 신화, 특히 동양 신화의 힘을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동양 신화가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왜 동양 신화에 주목하셨는지 한 말씀 부탁합니다.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하 이 교수) 우리가 동양인인데 동양에 대해 모른 채 서양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을 모르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기 주체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 3인 좌담회 “신화 정신 회복에 미래 있다”

석철진 경희대 객원교수·위즈덤 최고경영자(CEO)(이하 석 교수) 세계화가 서구화와 등치가 된 것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산물이라면 요즘 경영 현장에서 얘기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은 그 나라의 가장 유니크한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미 큰 흐름이 바뀌었어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현장에서 유효합니다.

전문가 3인 좌담회 “신화 정신 회복에 미래 있다”


정재서 이화여대 명예교수(이하 정 교수) 동양 신화를 오늘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이유를 실감한 실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판타지 문학 작품이 많이 있는데요. 어느 출판인이 그중 유명한 한 작품을 해외에 소개하고 싶어서 <해리 포터>를 출간한 영국의 출판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쪽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해서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돌아온 답이 “한국에는 판타지 없습니까”였다고 해요. <해리 포터>와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다면서 새로운 것, 한국적인 것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던 거죠.

전문가 3인 좌담회 “신화 정신 회복에 미래 있다”

이 교수 많은 사람들이 동양 신화를 모르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의 방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일부 실학자들이 얘기를 했지만 주류 세력에서 우리나라 신화를 무시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일본이 우리 신화를 말살하면서 이자나기, 모모타로 같은 일본 신화나 서양 신화만 교육을 했고요. 또 개신교가 들어오면서부터는 한국이 신들 때문에 망했다고 하면서 미신을 퇴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는 귀신이나 무당 얘기를 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래 가지고 있던 엄청난 신화들을 다 죽여 놓은 겁니다. 특히 제주도는 우리나라 신화의 보고라 할 만큼 엄청난 신화들이 있는데, 최근에서야 이들 신화를 되살리고 대중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 셈입니다.

이 기자 동양 신화라는 영역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오늘날 어떤 점에서 의미를 갖는지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 교수 신화가 상상력의 보물창고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진단한 것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우리가 함께 공유했던 동양 신화는 근대 이후로 망각해 버린 것이죠. 일례로, 우리가 인어를 생각하면 인어아가씨를 떠올리고 인어아저씨를 떠올리진 않습니다. 그런데 동양 신화에서 인어는 아저씨예요. 상상력이라는 것도 풍토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안데르센 동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경도돼 있어서 상상력이 획일화돼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상상력의 제국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석 교수 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동양 신화가 무게감을 갖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내용은 새로운 상상력이었습니다. 서양 신화는 이미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어서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돼 있을 뿐 상상의 자극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동양 신화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보고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이 기자 오늘날 유용한 신화적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서는 신화의 어떤 키워드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구체적으로 연결이 돼서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 교수 제4차 산업혁명은 물질이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정신의학적 측면에서도 진단할 부분이 있겠는데, 최근 인문학 분야에서도 유전자 복제, 인공지능(AI)이나 로봇, 사이보그 등의 존재에 대해 포스트 휴먼 논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 존재성에 대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타자에 대한 인식입니다. 여기에 동양 신화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신화에서의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동양권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해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존하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반인반수는 인간을 벗어나는 존재로서 타자에 해당하는데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신농씨(농업의 신)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와 같이 소머리를 가지고 있는데도, 자비로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벽화에 세 번이나 나올 정도로 고구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고 숭배했습니다.


석 교수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른데, 공통적인 기본 콘셉트가 융합입니다. 제3차 산업혁명이 반도체를 디바이스로 하여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를 열었던 혁명이라면, 제4차 산업혁명은 가상(virtual)적인 세계와 물질(physical)적인 세계가 경계선이 허물어지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신화에서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또 다른 가상세계에서 만든 것이 피지컬한 것들과 교감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상상력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상상한 것을 어떻게 엔지니어링 해서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 즉, 상상공학(Imagineering=Imagine+Engineering)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이 교수 기계화되면 동시에 구체화(concretization)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소통할 때는 비교적 상상력이 다양하게 펼쳐지는데, 기계로 구체적으로 만들어 놓고 기계를 매개로 삼을 때는 그 안에 상상력을 가두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앞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지금보다 더 타락하거나 퇴화될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확장시키는 게 신화의 역할입니다.


정 교수 신화의 중요한 기능으로 교감 능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제 물질과도 교감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봅니다. 물질, 기계 모든 것이 다 연결돼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신화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이 모든 존재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 존재와 존재 간 연계성이 오늘날 사물인터넷(IoT) 시대에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서면 인간만이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발전을 했고, 신화도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구성합니다. 근대 산업화 시대까지는 주체 중심의 그리스 로마 신화적 사유가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앞으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서면 사물, 자연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동양 신화적인 마인드가 더 유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상상력이 진부해진 이 시점에서 그것과 상반된 위치에 있는 동양 신화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 교수 서양 신화의 뿌리는 쉽게 생각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이지만 이집트·켄트·게르만·유대·아랍 신화 등으로 다 연결돼 있거든요. 무수히 많은 신화들이 중세를 거치면서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 빠지고 종교화되면서 절대신만이 신인 것처럼 좁아진 것입니다. 우리도 동양 신화 하면 한·중·일 중심의 동아시아 신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좀 더 넓혀서 태국, 베트남, 몽골, 티베트 등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다양성의 시대라는 것이죠.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은 나와 타자가 대척관계에 있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나오거든요. 특히 우리의 신화는 신과 인간이 싸우지 않고 구별 짓지 않아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별도 별로 없습니다. 선한 신도 멍청한 행동을 하고 악한 신이 현명할 때가 있어요. 그게 트렌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변환하는 능력이죠.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신에게 벌을 받아 짐승이 되는데, 우리는 짐승이 신이 됐다, 인간이 됐다 변화무쌍합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도 그렇죠. 동양에서는 나무를 해도 자기가 할 만큼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아요. 자연에 대한 존중이 있어요. 또 역사가들에 의해 가필되지 않은 전통 신화는 여성성이 존중 받았어요. 단군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기록자의 의해 가부장제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데, 기록되지 않은 무가 속의 수많은 여신들은 페미니즘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오늘날 여성성을 빼놓고는 세상을 얘기할 수 없거든요. 그게 기계화된 시대에 동양 신화가 갖는 장점인 것이죠.

석 교수 지금 말씀하신 네 단어. 다양성, 변신, 존중, 여성성은 기업 경영에서도 중요하게 쓰는 키워드입니다. 다양성을 어떻게 포용해낼 것인지가 화두입니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기업은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등식화된 논리입니다. 융합은 다양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다양성, 창의성, 융합 이와 같은 개념들이 이미 신화 속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업이 강조하고 있는 신뢰 경영의 밑바탕에는 존중이라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마켓 셰어(market share)에서 마인드 셰어(mind share)로 점차 여성적인 감성이 중시되고 있어요. 왜 동양 신화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요한 화두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동양 신화의 중요한 기능은 ‘교감 능력’

이 교수 칼 융이 점성술(horoscope)을 연구하면서 여성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여성성이라는 게 무엇이냐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능력이 수용성(receptivity)입니다. 자궁으로 정자를 받고, 아이를 받고, 낳아서 키우는 능력. 또 수컷이 가져온 사냥감을 받아 음식을 만드는 능력은 엄청 중요한 능력입니다. 목표를 잡아 사냥을 하고 적을 퇴치하고 나의 가족과 부족을 지키는 게 남성성이라면 수용하고 변신하는 능력은 여성성이었던 셈이죠. 남성성이 발현되는 실적 중심적인 태도가 제3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능력이라면,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실적 중심이 아니라 자원을 가져와서 어떻게 변환할 것이냐가 관건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정 교수 실제 동양 신화에는 위대한 여신들이 많습니다. 중국의 여와나 제주도의 선문대할망 등이 창조신으로서의 위대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신화에서 주로 창조의 능력을 가진 신들은 남신보다 여신이 더 많았습니다. 남신은 전투적이고 파괴적인 데 비해 여신들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러한 여신 리더십의 핵심은 생산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에 있습니다.

이 교수 마고할미(=선문대 할망)는 노는 신이라는 점도 시사점을 줍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노는 신, 무서운 신, 나타나는 신 등의 개념이 있는데 서양 신은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고, 목적과 날짜에 따라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마고할미의 창조는 놀면서 만든 것입니다. 마고할미가 놀다가 오줌을 누니 바다가 되고, 손으로 땅을 훑으니 섬이 됩니다. 그게 오늘 필요한 정신입니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잘 노는 데서 창의성이 생겨요. 마고할미 정신이죠.

석 교수 얼마 전 다녀온 미국에서 새로운 학교들이 ‘실수하자(Let’s make a mistake)’라는 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실패는 창업정신에서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실패로부터 뭔가를 일깨워줄 수 있다는 것은 기업가 정신을 일으키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고할미 정신을 말씀하셨는데, 경영학적 함의를 드리면 구글이나 에어비앤비가 노는 것을 중시합니다. 거기서 새로운 창의성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선문대할망은 그렇게 완벽주의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적당히 하는 데서 새로운 게 만들어집니다. 그게 스웨덴에서 얘기하는 ‘라곰(lagom)’, 즉 적당히라는 뜻이거든요. 빈 여백 속에서 무엇인가 나오기 때문에 라곰이라는 화두도 오늘날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기자 다시 말해, 개인들의 시대가 부상하고 있고 그래서 평범한 개인들이 각자 신화다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더 진화하는 기술과 물질 앞에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라는 화두가 중요하게 던져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 교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만 보면 우리 문화가 폭력적인데, 현실에서는 밤중에 총 안 맞고 칼 안 맞는 나라가 또 한국입니다. SNS 자체에 폭력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거르고 완충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기계가 우리를 진화시킨다는 얘기도 합니다. 다만, 균형(balance)을 맞추는 게 중요한데, 그 밸런스가 바로 생태입니다. 물질이 좋아지면 심지어 도시도 녹화됩니다. 여기서 동양 신화를 얘기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태, 자연, 균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석 교수 물질과 정신에 대해 얘기가 진전되고 있는데, 경영학에서의 움직임은 채용 경향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글의 경우 그렇다면 물질을 중시하는 사람과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선호할까의 연구가 실제 데이터로 나와 있습니다. 구글의 초창기에는 기술, 엔지니어, 컴퓨터 전공자를 거의 90%까지 채용했는데 점차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진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전공자의 비중을 넓혀 왔습니다. 최근 트렌드는, 한 단계 더 뛰어넘어서 어떻게 아트와 사이언스 사이에서 컨버전스적인 생각을 갖는지, 융·복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지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엉뚱한 것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커피와 만나면 뭐가 될까”, “여기에 테크놀로지를 적용하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에 즉흥적인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뽑지 않는 쪽으로 경향이 바뀌어 가고 있지요.

이 교수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고통받는 신입니다. 영웅 신화에서 서양의 경우 남성 중심적인 영웅들이 적을 퇴치하거나 싸우는 모습을 그린다면 동양 신화에서는 버려지고 시련을 겪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오래 참고 견디고 용서하고 같이 나누면서 새로운 창조를 하는 여신들이죠. 바리데기의 경우 자신을 못살게 굴던 존재를 데려가서 다 신으로 만들어요. 퇴치하는 게 아니라요. 자청비 신화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남편까지 공유해요. 또 여자가 됐다가 남자가 됐다가 합니다. <세경본풀이>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정 교수 특히 우리 무속 신화에 여성 영웅들이 많습니다. 자청비 신화는 자웅동체적인 생각입니다. 그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서양의 사유 구조가 이항대립적이라면 동양 특유의 자웅동체적인, 양성 우호적인 생각이 대립의 사고를 융합의 사고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의 교감·자연과의 교감

이 교수 불교에서도 관세음보살이 8세기까지는 남자였습니다. 유교를 거치면서 여성 신이 없어진 겁니다. 또 세종의 며느리가 동성애자였죠. 그런데 세종이 사적인 것은 놔두자면서 용서해 버렸어요. 현대 과학자의 관점으로도 세종이 포용적이고 객관적인 군주였던 것 같아요. 전체 인구의 8%는 불완전한 성으로 태어나거든요. 동성애를 불법시하고 죄악시한다면 의지와 상관없이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보호를 못 받아요.

석 교수 신화가 오늘날 근대화와 서구화, 과학주의를 거치는 동안 황폐해져 버린 우리의 정신세계를 복원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이네요.


이 교수 신 대신 들어앉은 게 과학입니다. 거기에 지금은 자아의 행복이 곧 신이죠.

이 기자 다시 한 번 우리의 주제인 신화적 상상력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상상력의 다양한 종류가 있을 텐데,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할 때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석 교수 창의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창조의 행위(The Act of Creation)>을 쓴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가 말한 이연현상(bisociation)이라는 개념은 서로 다른 두 개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새로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 신화가 가진 상상 세계, 특히 동양 신화에 대해 얘기한다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치유적 상상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상과 연계된 상상력이죠.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이 자연과 교감할 때 조절이 되죠.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어떤 극단적인 감정은 자연에 한 번 담갔다 꺼내면 담백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교수 확장성도 중요한 개념입니다. 인간, 자아, 나로 갇히는 게 아니라 우주와의 교감, 과거와의 교감, 또 미래와의 교감을 통해 확장되는 것입니다. 신화에서 중요한 테마가 공간과 시간입니다. 도깨비 신화를 보면 만주에 갔다가 서울에 갔다가 제주에 갔다가 하는 일종의 퀀텀 리프(quantum leap)예요. 그래서 시공간이 뒤틀리고 늘어나고 확장되는 것이죠. 먼 고대에서부터요. 서양에서 말하는 용이 사실은 공룡의 흔적일 수 있어요. 공룡이 발자국을 남긴 것을 보고 먼 옛날 용이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 안에 갇힌 시공간을 깨고 공룡의 시대까지 돌아가는 것, 그게 신화적 상상력인 거죠.

석 교수 확장성과 무경계성이 포함된 개념은 경영학적으로도 정말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겠습니다.

정 교수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변신입니다. 어느 한 존재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신화에서 변신이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일반적으로 변신은 동서양에서 다 중요한 주제인데, 변신의 동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주로 신들의 벌에 의해 극한 상황에서 변신하는 경우가 많고, 동양에서는 자발적 변신이 많습니다.

이 교수 인과관계(causality)에서 벗어나는 것도 덧붙일 수 있습니다. 인과관계를 완전히 벗어나자는 게 아니라 원인론이나 결과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는 항상 인과관계가 있죠. ‘하느님의 플랜, 비전’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동양 신화에서는 인과관계가 없어도 우연히 나온 것들이 많습니다. 융 심리학에서는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라고 표현합니다.

석 교수 신화적 상상력의 주요한 키워드가 경영학적으로 함의를 줍니다. 서구적인 사고법이 논리적 사고(logical thinking)라면 동양의 신화적 상상력은 ▲자아와 타자와의 상관성, ▲상관성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교감성, ▲교감에서 시간과 공간의 확장성, ▲확장성에서 미지에 대한 긍정의 신비성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화두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비즈니스 현장에 적용 가능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이 기자 신화적 상상력을 말할 때 과거 어느 시대에 누가 왜 그러한 상상을 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는 얘기가 나올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기술로 구현돼 만들어진 세계를 살고 있는데,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상상을 통해 세계를 구현했을 것 같습니다.

이 교수 그게 원형이라는 겁니다. 신화는 특정한 개인이 만든 게 아니라, 모두가 만듭니다. 개인적인 특이성은 사라지고 걸러지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나 성격만 남는 겁니다. 오늘날 SNS가 신화 시대로 가면 구비의 기능을 하는 것이죠. SNS에도 무수히 정보가 왔다 가는데, 시간이 지나면 걸러져서 괜찮은 것들만 남는 것처럼요.

석 교수 오늘날 정치사회학에서 신화의 의미는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만드는 것으로 자주 쓰입니다. 경영에서도 신화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창업주들에게 신화라는 용어가 따라 붙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신화의 의미와는 거리감이 있죠.

정 교수 신화에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정치 신화도 있습니다.

이 교수 오늘까지 남아 있는 우리 신화는 피압제자가 만든 신화입니다. 남이장군이 신화가 됐어요. 왜냐하면 억울하게 죽었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무당들이 신으로 모실 거예요. 그런데 이성계를 모신다는 건 없죠. 정치공학과 신화의 차이일 겁니다.

석 교수 단군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이 교수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강림 신화, 알에서 나오는 난생 신화, 또 땅에서 솟기도 하고요. 단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강림 신화이면서 신과 짐승의 결합이죠. 단군이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담금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당집이라고 하죠. 곰이 곰이 아니라 감, 즉 신일 수 있어요. 일본으로 가면 가미가 되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곰이 중요한 동물이 아니에요. 오히려 호랑이가 많죠. 단군신화를 기록하면서 감이 곰이 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고대 이전에는 무당이 다 그레이트 샤먼(great shaman), 임금이었죠.


이 기자 신화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다양합니다. 신화를 고대의 생각법이라고 본다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그 상상력 그대로 가져오는 게 유효할까에 대해 궁금합니다.

이 교수 신화는 고대의 생각이 아니고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구비라고 하는데, 지금도 신화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정 교수 신화는 시대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원형은 계속 반복이 되죠. 다만 그 시대의 가치, 의식 등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겁니다. 본질은 그대로인 채로요.

이 교수 신화가 갖고 있는 힘 중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게 바로 상징성(symbolization)입니다. 기계가 모든 것을 구체화시키고 기계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상상을 할 수 있는데, 기계에 의해 구체화되면서 갇혀 버려요. 그 갇힌 것을 확장하는 게 상징성입니다. 추상화된 이미지로 우리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바로 신화의 힘이죠.


석 교수 상관성, 교감성, 확장성, 신비성이라고 표현했던 신화적 상상력에 상징성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장성 다음에 메타포적인 상징성이 돼야 신비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신화라는 개념을 고대적인 신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옷을 갈아입으면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 교수 앞으로도 신화적 존재들이 계속 등장할 겁니다. 그 시대에는 신화인지 잘 몰라도, 한 시대가 지나면 신화적 존재가 부상하겠죠. 남이장군도 그 시대에는 신화가 될 줄 몰랐겠죠.

석 교수 경영에서도 경영의 신화를 만든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많은 최고경영자(CEO) 중 한 명이었는데, 위대한 성과를 창출하고 나면 새로운 경영의 신화의 옷을 입습니다.

이 교수 새로운 신화를 쓸 때 윤색을 하면 결국 사라질 겁니다. 악한 측면, 어두운 부분을 같이 보고해야 오래 살아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신화가 됩니다.


이 기자 우리가 신화를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신화 안에서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을 텐데요. 신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신화적 지향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 공학 넘어 상상의 정신으로

이 교수 우리나라에서 샤머니즘이 중요한데, 만신이라고 하잖아요. 제주도에 가면 수천 개의 신이 있어요. 우리 시대의 신은 특정한 영웅보다 만신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 각자가 신이 돼야 해요. 우리는 지향점, 목표점 하면 자꾸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거든요. 동양 신화는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신화적 지향점이라 하면 내가 내 안의 신성성을 발휘하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진짜 보물을 만나게 되면 내 주변의 소소하고 헐벗은 사람이 다 만신이고, 다 섬길 수 있게 되거든요.

정 교수 말씀하신 부분이 동서양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연금술이 금을 만들고 불사약을 찾는 건데 서양에서는 근대 화학이나 과학, 즉 밖으로 나가 발전했죠. 동양에서는 내단법이라고 해서 내부 지향으로 갔어요. 자기 안에서의 완성인데 내면에서 불사의 경지를 추구했던 것이죠. 제3차 산업혁명 시대까지는 서양의 방식, 신화로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상상력이 유효했고 기여했어요. 그런데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죠.


석 교수 공교롭게도 경영학에서 얘기하는 개념들이 과거에는 주로 1등 제품을 구매했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어떤 가치가 구현되는지를 보고, 그에 부합하는 제품을 사는 거예요. 또 소셜의 개념이 중요하죠. 어떻게 사람들과 공유하고 잘 나누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흐름으로 부상하고 있고, 거기서 새로운 비즈니스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큰 맥락에서 동양적인 지향점과 통하는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 온·오프라인(O2O) 전략을 쓰면서, 새로 나오는 채널이 크로스채널, 멀티채널을 뛰어넘어 옴니채널이라는 개념이거든요. 동양 신화에서 얘기했던 확장성과 무경계성이 경영학에서 말하는 옴니채널과 통합니다. 왜 오늘날 동양 신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저의 결론은, 동양 신화를 제대로 알면 이제까지 이분법적인 생각에 갇혀 있던 창의성의 한계성에서 아웃 오브 더 박스(out of the box)로, 융합적 초연결의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생각이 확장돼 또 다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보고가 신화적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이 기자 그동안 제4차 산업혁명 시대와 관련해 동양 신화의 의미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정리해주세요.

이 교수 동양 신화를 안다는 게 서양 신화를 무시한다는 건 아닙니다. 이제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의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미래에는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 생태, 우주, 환경이 중요하고 발전을 넘어서는 성숙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봅니다. 그로 업(grow up)이 아니라 그로 다운(grow down)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게 진짜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 그동안 우리의 상상력의 터전이었던 동양 신화를 망각하고 살았는데, 미래 사회에 더욱 유효하고 의미 있는 삶의 양식으로 우리 문화의 뿌리인 동양 신화를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석 교수 한국 사람들에게 너의 마인드가 어디 있느냐 하면 가슴을 가리킵니다. 서양에서는 머리를 가리켜요. 이제는 머리와 마음이 서로 융합되어야 할 것 같아요. 내 안의 신성성을 찾는 마음속 신화, 상상 공학을 넘어서 상상이 또 다른 상상의 정신을 만드는 데서 신화의 재해석이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