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20세기 말 대한민국에 김지영이 있었다면,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잔느가 있었다. 한 인물의 일대기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여성상을 그렸던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그 시대의 잔느와 현재의 김지영, 그리고 미래의 ‘하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살아가게 될까.
[Great Teaching] 1883년의 잔느, 그리고 김지영과 하윤
2017년 한 해 화제가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2017년의 또 다른 ‘김지영’도, 82년생 ‘김지영’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김지영의 삶은 ‘여자’의 일생으로 읽힌다. 김지영이 한국 근대 여성의 보편적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수많은 여성들이 “내가 김지영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82년생 김지영> 이전에도 여자의 삶을 대변하는 작품이 있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다. 원제는 로 ‘어떤 인생’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나, 일본 출판계가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한 이후 지금까지 여자의 일생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잔느는 김지영에 해당하는 인물로 보편적인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883년 출판된 것을 고려하면 잔느의 나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82년생 김지영처럼 여전히 지금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있노라면, 잔느의 일생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보편적 일생으로 읽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잔느의 삶이 어떻기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일까. 또 1883년 여자의 일생으로 상상되는 이야기는 어떨까.

우선 당시 귀족들이 다들 그런 것처럼 잔느의 부모 역시 잔느가 여느 소녀들처럼 정숙하고 순결한 처녀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어린 딸과 헤어져 지내는 게 마뜩치 않았지만 딸아이를 잘 키워내기 위해 17세 때까지 수도원에서 생활하게 한다. 잔느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자유롭게 자연의 공기를 만끽하는 삶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던 중 17세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쥘리앵이라는 그 남자는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내 아내가 되어줘”라고 말한다. 잔느는 이 말의 의미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첫날밤의 경험은 잔느의 짐작과는 사뭇 달랐다. 몸과 마음의 교감이 아니라 난폭한 정사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 정도로 치부됐다. 잔느는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이제 너의 전부가 네 남편의 것”이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되새기며 아내로서 잘 살아내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녀 로잘리가 출산하게 된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은 채 울기만 하는 하녀를 보면서 잔느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로잘리를 찾던 잔느는 로잘리의 방에 있는 쥘리앵을 엿보게 된다. 사실, 남편 쥘리앵은 결혼식 이후 줄곧 로잘리와 동침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쥘리앵은 발각 이후에도 변명만 늘어놓으며 모면하려고 했고, 공교롭게도 잔느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면서 결혼생활을 그대로 이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쥘리앵은 다른 여자와 또다시 불륜을 저지르다가 결국 마차에서 굴러 떨어져 죽게 된다. 이후 잔느는 아들 폴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도시에 나가 따로 살게 된 이후에는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잔느는 결국 아들 때문에 파산 직전까지 몰려 집까지 팔고 고향을 떠나게 된다.


잔느의 일생이 곧 당시의 여성상
여기까지가 잔느의 일생이다. 시골 귀족의 딸로서 남들처럼 자라 남들만큼의 행복을 기대했으나 남들만큼의 행복은 쉽지 않았다. 잔느가 유독 불행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잔느만의 비극으로 한정 지어 생각할 수는 없다. 잔느의 불행과 비극은 여자의 일생이라는 범주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리즈 이모의 삶을 돌아보면 분명해진다. 리즈 이모도 잔느처럼 수도원에서 생활했는데, 어느 날 강물에 몸을 던진다. 가족들은 ‘연약한 정신의 소유자’ 정도로만 얘기했다. 리즈 이모는 늘 종종걸음으로 소리 나지 않게 걸어 다녔으며, 물건을 잡을 때에도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늘 자신을 사소하거나 연약한 존재로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여겼다.

리즈 이모는 잔느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그림자다. 리즈 이모의 불행이나 잔느의 비극 모두 여성의 일생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인간다운 자유를 원했던 것은 리즈 이모나 잔느 모두 마찬가지였으나, 리즈 이모가 그 생활을 스스로 거부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 잔느는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계보 속에서 집안을 유지, 관리하는 일을 해내지만, 결국 남편의 불륜과 아들의 방탕으로 삶의 비극을 맞이한다.

여성의 일생이란 집 밖의 ‘미친 여자’이거나 집 안의 ‘얌전한 아내 (엄마)’로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모파상은 잔혹할 정도로 차갑게 그려냈다. 여성은 얌전하고 정숙해야 된다고 인식했고, 여성의 몸은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간주했다.

가부장제의 계보 속에서 주인의 역할을 해냈던 남성들 역시나 성공하거나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 속에서 비교적 삶의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하녀로 하찮게 얘기되던 로잘리뿐이다. 로잘리는 잔느의 집에서 쫓겨난 뒤 아들을 홀로 키우지만 결국 자립에 성공한다. 소설 마지막에 로잘리는 잔느 옆으로 돌아와서 하녀가 아닌 친구처럼 잔느를 돌본다.

1883년 출판된 <여자의 일생> 속 잔느, 그리고 2017년 인구에 회자된 <82년생 김지영>까지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근 134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2017년 출생한 아이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여자아이는 ‘하윤’, 남자아이는 ‘도윤’이라고 한다. 혹여 <2017년생 하윤>, <2017년생 도윤>의 이야기가 쓰인다면 어떨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서사가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바라고 있지 않은가.


일러스트 전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