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글 정채희 기자 | 도움말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대표 | 참고 문헌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김란기 지음) I 사진 김기남·이승재 기자] 골목 끝 허름한 주점에서 해질녘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우리.

삶의 궤적이 그려진 그 공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때 그 길, 지금 다시 보지 않으면 곧 사라질지 모르는 너와 나의 정취가 묻어 있는 그 길에 대한 이야기.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도시에서 인간적인 곳은 어디일까. 아니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아직 인간적인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내가 찾는 곳은 점차 사라져 가는 도시의 좁은 골목이다.”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 중에서

2012년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종로1가에 자리한 피마길(피맛골, 지금의 교보빌딩 뒤쪽 피마길 초입). 오후 2시가 되자 골목의 귀퉁이로 5명이 모여든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이 멋쩍게 묻는다. “저 혹시….”

이들은 “곧 사라질 골목을 걷자”는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대표의 제안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김 대표가 전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은 저마다의 피맛골 추억을 나누며 곧 없어질 피마길을 걸었다.

이 길은 누군가에게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경찰의 물대포를 피하던 길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예비고사를 마친 고등학생이 난생 처음 다방을 가기 위해 서성이던 길이었다. 지친 하루 끝에 찾은 ‘열차집’의 빈대떡은 또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5년 후, 그때 그 길이 없어진다면…

그로부터 7년 후. 재개발된 피마길은 어느새 옷을 싹 갈아입고, 새로운 사람들을 맞는다. 아찔한 고층건물이 들어섰고, 정비된 골목으로 프랜차이즈 맛집들이 하나둘 자리했다.

어릴 적 추억이 사라진 길이 어디 피마길뿐인가. 2019년 1월 16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재개발 사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기자간담회를 통해 “재개발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철거 위기에 놓인 서울 을지로 세운상가 일대 공구상가를 비롯해 을지면옥, 양미옥 등 1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식당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재개발을 반대하는 거센 여론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을지면옥과 양미옥은 일단 살아남았지만, 언제 그 자리를 위협받을지 알 수 없다. 지금도 우리의 정담이 담긴 그때 그 길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5년 후엔 그 길 위에 또 다른 길이,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일 것이다. 잃고 난 후 후회하면 늦다. 너와 나의 추억이 쌓인 그 길을 지금 다시 걸어야 한다.

◆다시 보는 향수길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대표는 전통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골목의 가치와 의미를 짚어내기 위해 골목길 답사만 7년째, 둘러본 길만 120회가 넘는다.

그에게 모든 길이 다 소중하지만, 그중에도 으뜸이 있다. 골목대장, 김 대표가 꼽은 서울의
‘남겨두고 싶은’ 향수 길을 소개한다.

충무로 인쇄골목
‘세월을 찍어내는 지붕 없는 인쇄소’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제본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와 삼발이가 끊임없이 경적을 울려대는 곳. 오토바이에 산처럼 쌓인 제본들이 트레이드마크로 통하는 이곳은 출판과 인쇄의 메카, 충무로 인쇄골목이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인근 명보아트홀에서 마른내로를 따라 서울 중구청에 이르는 1.5km 구간이다. 출판소, 인쇄소, 지업사 등이 골목마다 들어차 전국 출판·인쇄 사업체의 70%를 이룰 만큼 국내 최대 규모의 출판·인쇄 업체 밀집 지역으로 통한다.

충무로에 인쇄소가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중구 삼일대로에 자리한 ‘경성인쇄공업조합’이 설립된 이래 조합 인근에 일본인 인쇄 업체들이 밀집하면서 지금의 인쇄골목의 터를 닦았다. 해방 이후에는 중구와 종로구에 다수의 인쇄 업체들이 자리했는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규모의 인쇄 시설이 파괴됐다.

그 후 1968년 세운상가가 들어서면서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잇는 상가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때 충무로 일대에는 홍보판촉물, 상업인쇄 등을 다루는 인쇄 업체들이 입지하면서 인쇄골목을 형성했다.

199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던 충무로 인쇄골목은 한때 등록된 출판소만 1024개소, 인쇄소가 289개소, 여기에 무등록 영세업소까지 더하면 약 3000여 개소가 있었을 만큼 그 세를 과시했다.

종사한 인력만 2만여 명으로, 이들이 산처럼 쌓인 제본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나르는 모습은 이 골목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 광경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오토바이는 3~5m 비좁은 골목길로 이뤄진 거대한 인쇄공장의 공정들을 실타래처럼 연결하는 하나의 컨베이어벨트다.

인쇄 산업 환경의 변화와 폐수, 분진 등 공해와 소음 문제로 인해서 그 규모가 과거에 비해 축소됐지만, 최근에는 충무로 인쇄골목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5대 특화 제조업 집적지구 중 하나로 키우겠다는 계획에 따라 재도약이 이뤄지고 있다.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후암동 문화주택골목
‘비좁은 골목길, 굽이굽이 희로애락’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북쪽으로는 남산을 향해 점차 북상하면서 형성된 곳, 남쪽으로는 남영동과 갈월동, 동자동 쪽 언덕을 타고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곳. 자동차 한 대가 들어갈 수조차 없이 비좁은 골목길.

서울 용산구 후암동은 좁디좁은 서울 땅덩어리에서도 단언컨대 비좁은 골목길로 형성돼 있다. ‘두텁바위’에서 유래한 후암동이란 지명은 바위가 많은 마을이란 뜻이었으니, 바위마을에 집을 짓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지금의 후암동 문화주택 골목이 생긴 것은 1910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신시가지로 개발하면서 대규모 고급 문화주택지가 조성됐다.

문화주택이란 서양식 공간 구조와 외관에 일본식 내부 구조를 가진 주택이란 의미로, 신시가지로 선정된 후암동 일대에 문화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2016년 기준으로 300여 채가 남아 있어 현존하는 문화주택의 최대 집결지로 통한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미를 더하며, 100년사를 켜켜이 쌓은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으로 자리했다. 비록 일제강점기 근대 유산이지만 100년의 세월을 함께한 근대 유산으로서 건축적 가치와 보존에 대한 찬반론이 불거지는 골목이기도 하다.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인사동 화랑골목
‘도심 속 사랑방, 화랑의 노래’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지는 인사동. 700m의 비교적 좁은 이 길은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자 중심지다.

상업적 화랑이 모여들며 ‘화랑골목(화랑가)’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일찍이 조선시대 최고 예술 관청이었던 도화서가 위치해 있어 당대 유명 화가들이 예술 작업을 펼치는 등 예술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땅이라 여겨졌다.

특히 1960년대 후반기부터 고미술, 화랑, 표구점, 지필묵 등이 주종을 이루면서 1970년대부터 현대 화랑을 필두로 최초의 근대적인 상업적 화랑이 인사동에 모여들었다.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가람화랑, 노화랑 등 화랑이 문을 열자 작가, 예술인, 미술 애호가들이 만남의 장소로 인사동을 찾으면서 전통 차와 전통 음식 식당이 많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가난한 예술가와 풍류객들은 술집 ‘평화만들기’와 ‘실비집’에서 삶의 무게가 담긴 술잔을 기울였다.

1980년 후반부터 강남권이 발달하면서 많은 화랑들이 이전하며 인사동의 전성기는 저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사동은 화랑과 골동품점, 공예품점이 밀집한 전통문화거리로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문화지구이자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서.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문래동 철공소골목
‘장인이 빚은 삶의 터전’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아? 삼성이나 현대보다 더 커.
나흘만 주면 비행기가 날아가.”
-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 중에서

열아홉부터 철공 일을 해 왔다는 김 씨 노인의 허풍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곳. 1970년대 철강 산업의 메카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단지골목이다. 지금은 현대화를 거쳐 예술창작촌으로 불리지만 수년 전만 해도 아니, 지금도 여전히 문래동 철공소단지골목이 더 익숙한 곳이다.

컨베이어 벨트식 산업생태계가 갖춰진 문래동은 해방 후 1960년대부터 작은 공장이 몰려들면서 철강산업단지를 이뤘다. 을지로와 원효로에서 시작된 소규모 철재 산업이 국가 전체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발전과 맞물리면서 문래동이 철재 산업의 중심지가 됐다.

영광은 길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직격타를 맞으며 문래동 철공소도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야 했다. 문 닫은 소공장촌으로 예술가들이 들어오며 지금의 문래동 골목에 철공소와 예술인이 공존하는 문화의 싹을 틔웠다.

셔터가 내려진 공장도 많지만, 여전히 골목길을 수놓은 수많은 ‘철공소 간판’들은 ‘못 만드는 것 없던’ 그 시절 산업 기지로서의 문래를 과시하듯 문래동 철공소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SPECIAL] 골목길, 추억을 걷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