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싹트는 봄을 듣는다
LIFE • spring music
[한경 머니 =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파릇한 새싹이 ‘툭’ 거친 나무껍질을 뚫고 나온다. 얼어붙었던 길 위에 나른한 온기가 감돈다. 사람들의 활기찬 대화의 음량이 겨울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봄은 짧다. 해마다 더 짧아진다. 그래서 귀하다. 마치 청춘이 영원하지 않다는 대자연의 시위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된 교정엔 새내기가 북적댄다. 봄을 타는 여인들의 속내만큼 복잡한 게 또 있을까. 동경과 꿈이 싹트는 계절, 봄이 시작됐다.
리타 슈트라이히의 <빈의 나이팅게일> 음반.                        패드모어와 베자위던하우트의 <슈만> 음반.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의 <베토벤의 ‘봄’> 음반.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드뷔시> 음반.
리타 슈트라이히의 <빈의 나이팅게일> 음반. 패드모어와 베자위던하우트의 <슈만> 음반.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의 <베토벤의 ‘봄’> 음반.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드뷔시> 음반.
음반. 패드모어와 베자위던하우트의 <슈만> 음반. 오이스트라흐와 오보린의 <베토벤의 ‘봄’> 음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드뷔시> 음반.">
봄을 노래한 성악곡

올해도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울려 퍼질 것이다. ‘벚꽃 연금’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계절의 히트곡이다. 그 이전에 숱한 클래식 음악의 대작곡가들이 봄을 노래하는 곡을 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가 사망하던 1791년에 ‘봄의 동경(Sehnsucht nach dem Fruhling)’ K596을 작곡했다. KBS 클래식FM의 시그널로도 익숙해 한 번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짧은 봄만큼이나 소중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5월아, 다시 돌아와 숲을 푸르게 해주렴. 시냇가에 나가 작은 제비꽃 피는 걸 보게 해주렴. 얼마나 산책을 나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오지 않은 봄을 노래하며 왜 5월이 등장할까. 우리는 3월부터 봄으로 치지만 중부 유럽은 5월부터 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클래식 본고장 유럽인의 5월 정서는 우리의 3월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리타 슈트라이히의 노래에서는 동경과 설렘이 잘 묻어난다. 에릭 베르바의 피아노는 봄볕에 반짝이는 냇물같이 흐른다. 1956년 모노 녹음이지만 목소리와 피아노 모두 또렷하게 잘 포착돼 있다. 오리지널 마스터스 시리즈인 <빈의 나이팅게일>(8CD)로 발매된 음반 박스에 수록됐다. DG에서 녹음한 리트(lied) 전곡. 레퍼토리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볼프, 슈트라우스는 물론 모차르트와 민요까지 아우른다.

슈만의 ‘아름다운 5월에’에서도 이와 같이 봄을 노래한다.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린 1840년은 ‘가곡의 해’로 피어났다. 그는 ‘미르텐’ 이후 ‘리더크라이스’ Op.39, ‘여인의 사랑과 생애’ Op.42, ‘시인의 사랑’ Op.48 등 가곡집을 비롯해 여러 가곡들을 이 한 해에 다 썼다. ‘아름다운 5월에(Im wunderschonen Monat Mai)’는 ‘시인의 사랑’ 중 머리 곡이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름다운 5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 나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테너 마크 패드모어의 노래에 크리스티안 베자위던하우트의 포르테피아노가 곁들여진 녹음(HMF)에서 패드모어의 음성은 매우 아름답다. 특히 자음을 발음하는 부분은 음악에 옷을 입히는 듯 인상적이다. 하이네의 시가 얼마나 음악적인지를 느낄 수 있다. 베자위던하우트는 1837년 에라르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한다. 독특한 음색은 패드모어의 창법과 잘 어울린다.

나른한 봄을 그린 작곡가 드뷔시

봄의 작곡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프랑스 출신의 클로드 드뷔시다. 1862년 생제르맹에서 태어난 드뷔시는 음악과는 상관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시인 베를렌의 양모였던 앙투아네트 플뢰르 모테 부인이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10세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고 1884년 22세 때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드뷔시는 리스트를 만나 그가 권유하는 팔레스트리나, 라수스의 음악에 매료됐고,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자바의 가믈란 음악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1893년부터는 솔렘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구한다. 이후 드뷔시는 멜로디와 하모니, 리듬의 정연한 양식에 의한 음악을 버리고 새로운 음악적 표현을 창안했다. 인상파 회화의 수법에 알맞은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이었다. 그림에서 빛을 중시하듯이 음악에서 감각을 중시한 것이다. 새로운 감각을 위해서는 새로운 조성이 필요했다. 드뷔시는 대담한 화성을 쓰게 됐다.

1894년 말라르메 시에 곡을 붙여 작곡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새로운 음악 양식 인상주의를 수립한 역사적인 작품이었다.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낸 예술인 인상주의는 선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하지만 유현하고 신비로운 기분을 시적인 흐름으로 표현한다. 곡이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복잡하고 부유하는 듯한 플루트 프레이즈들은 처음에는 독주로 연주된 다음 반복되고, 이어 오케스트라의 현악기들이 반주된다. 마디 줄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느슨한 리듬이 연속적 흐름으로 흐른다. 약하거나 생략된 악센트는 꿈처럼 흐르는 유동성을 표현한다.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이다. 말라르메의 시에 기초한 이 작품 속 목신은 피리를 불며 양떼를 몬다. 목신이 부는 피리를 플루트로 표현한다.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의 음반(DG)은 1991년에 녹음했다. 객관적인 접근으로 뛰어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온기 있는 풍부한 표현을 보여준다. 섬세함이 잘 드러난 음질도 좋다.
제니퍼 스팅턴의 <베토벤> 음반.카라얀의 <빈 신년음악회> 음반.페렌츠 프리차이의 <봄의 제전> 음반.김봄소리가 블레하츠와 함께한 데뷔 음반.
제니퍼 스팅턴의 <베토벤> 음반.카라얀의 <빈 신년음악회> 음반.페렌츠 프리차이의 <봄의 제전> 음반.김봄소리가 블레하츠와 함께한 데뷔 음반.
음반. 카라얀의 <빈 신년음악회> 음반. 페렌츠 프리차이의 <봄의 제전> 음반. 김봄소리가 블레하츠와 함께한 데뷔 음반.">
봄의 소리를 표현한 명연주

제목으로 치면 비발디 ‘사계’의 ‘봄’만큼이나 많이 거론되는 작품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다.

베토벤은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에서 모차르트를 비롯한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쳤다. 모두 4악장에 걸쳐서 봄의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1악장의 주제는 꽃이 피듯이 아름답고, 그 주제가 여러 갈래로 펼쳐지다 끝난다. 느린 2악장은 아련하고 서정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3악장 스케르초는 상큼하고 유쾌하다. 4악장에서는 1악장과 반대로 피아노가 주제를 제시하고 바이올린이 따라간다. 게다가 이 곡은 31세 때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 작곡한 곡이다. 작품은 1801년 10월에 초연됐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모리츠 프리스 백작에게 헌정했다. 부제 즉, 별명인 ‘봄’은 베토벤이 직접 붙이지 않았다. 훗날에 출판업자가 작품의 분위기가 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는 이유로 붙인 듯하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과 레프 오보린의 피아노 연주(필립스)는 품격이 느껴지면서도 한 떨기 꽃향기 같은 따사로움이 함께하는 명연주다.

바이올린이 아닌 플루트 버전도 봄에 잘 어울린다. 제니퍼 스팅턴이 플루트를 연주하고 말콤 마르티노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미국의 조지 포프가 플루트용으로 편곡했다. 이 연주를 들으니 봄의 악기 플루트로 ‘봄’을 표방한 작품을 연주하는 ‘완결성’이 남다르다.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플루트 버전을 듣고 나서 원래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연주한 버전을 들으면 바이올린 음색이 다소 차갑게 다가온다. 바이올린이 진한 붓이라면 플루트는 크레파스로 그리는 그림이다. 1963년 켄트에서 태어난 스팅턴은 또래의 영국 플루티스트 가운데 탁월한 실력으로 인정받는다. 바로크에서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연주해 왔다.

‘봄의 소리’ 왈츠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883년 작곡했다. 소프라노 독창용이었지만 오케스트라 단독으로도 연주된다. 들에 지저귀는 새소리와 젊은이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함께 느껴지는 가볍고 밝은 작품이다. 이 곡의 연주로 카라얀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년음악회에 등장했던 1987년에 녹음했다. 캐슬린 배틀이 노래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로 유명하다. 베를린 필 단원들과의 불화 이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마지막을 실질적으로 함께했던 빈 필의 우아한 음색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봄은 복잡한 변화의 계절이다. 꽃샘추위는 기습 공격같이 매섭다. 얼음이 녹으며 질척해진 땅은 발끝에 불편하게 묻어난다. 지구 위에서 새 생명들은 저마다의 삶을 한 자리 영위하기 위해 원시적으로 꿈틀거린다. 봄에 설레는 여자의 마음처럼, 봄의 성분을 심리로 분석하면 결과가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성분에서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보았다. 그는 먼 옛날 원시적인 제의가 펼쳐지는 어느 봄날을 무대로 잡았다. 격렬한 리듬과 통렬한 불협화음은 몸의 경련과 광기를 드러낸다. 야수적인 리듬이 반복되며 고조되면서 원시인들은 히스테리에까지 이른다.

바늘에서 로켓까지 다 그려내듯 엄청난 다이내믹을 보여주는 곡이기 때문에 주로 번스타인, 불레즈, 아바도, 콜린 데이비스 등 녹음이 좋은 음반들로 들어 왔지만 요즘은 페렌츠 프리차이와 RIAS(Radio In the American Sector) 심포니의 1954년 연주로 듣는다. 모노 녹음이지만 전혀 낡지 않았다. 명지휘자 프리차이가 정밀하게 통제, 곡의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들어오는 해석이다. 프리차이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이나 코다이, 바르토크 등의 발산하는 작품을 지휘할 때 날카로움과 생동감을 실어내곤 했는데, 여기서도 눈을 못 뜨게 하는 봄의 직사광선 같은 야수성을 발휘했다.

김봄소리, 봄을 연주하다

끝으로 이름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음반을 소개한다. 수많은 콩쿠르에서 입상해 ‘콩쿠르 사냥꾼’이란 별명이 붙은 김봄소리가 200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라파우 블레하츠와 함께한 DG 데뷔 음반이다.

프랑스와 폴란드의 작품들이 실렸다. 포레 소나타, 드뷔시 소나타, 시마노프스키 소나타, 그리고 쇼팽 녹턴 20번이 나탄 밀스타인의 바이올린 편곡 버전으로 실렸다. 포레는 김봄소리가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이고 시마노프스키는 라파우의 선택이었다. 그 사이에 드뷔시를 넣었는데 라파우는 드뷔시가 프랑스적이면서 폴란드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바이올린의 따스한 음색이 자아내는 단아함은 그녀의 이름 ‘봄소리’와 꼭 닮았다. 라파우의 능란한 피아노가 길을 내준다.

짧고 귀한 봄이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마음속 ‘봄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