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l 사진 서범세 기자]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 민족의 맥을 잇는 한국고전번역원의 이규옥 번역사업본부장을 만나다.

여기, 시간의 터널을 뚫고 온 책,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탐닉할 때 옛것을 익히며, 옛것이 주는 오늘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도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이 본부장은 한문과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고전 번역의 길을 걷게 됐다. 충남 부여에 있던 곡부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 들어가 한문번역자의 길로 들어섰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지혜를 얻고자 할 때마다 고전의 문을 두드렸다는 그. 이 본부장에게 고전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고전은 시간의 터널을 뚫고 온 지혜”

-고전번역원은 어떤 곳인가.


“1965년 월탄 박종화 선생을 필두로 학술·문화·예술계 원로 50인의 주도로 설립된 ‘민족문화추진회’가 전신이다. 당시 한문을 가르칠 수 없으니, 끊어진 과거를 연결하기 위해선 우리 고전을 빨리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의해 설립됐다. 재야의 한학자들이 중추를 맡다가 그들이 연로해지자 후계자 양성을 위해 국역연수원을 만들었는데, 나 역시 연수원 출신이다. 42년간 민간으로 이어져 오다가 지난 2007년 11월 교육부 산하 학술연구기관으로 격상됐다.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한국 고전의 특수성이 있는가.

“고전 문헌은 한반도에서 살아 온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사상의 결정체이자 우리의 정체성 그 자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9년 이전에는 국가 기록이나 개인의 기록 등 대부분의 고전이 한문으로 기록돼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한문에서 한글로 짧은 시기에 문자가 바뀌면서 우리의 과거와 단절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내고자 한국고전번역원이 탄생했다.”

-고전번역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지난 반세기 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중한 우리 고전을 한글로 번역해 일반 국민과 학계에 제공하는 것이 본원의 임무다. 한국인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세계기록유산과 우리 민족의 사상과 문화의 정수가 담겨 있는 문집 등 각종 한문 고전을 번역해 2000여 종의 책으로 발간했으며, 문집 1200여 종을 <한국문집총간>으로 편찬해 전통 시대 우리 민족의 학술과 사상을 집대성했다. 또한 이렇게 방대한 번역 성과를 ‘한국고전종합DB’로 구축해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고전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고전은 시간의 터널을 뚫고 온 지혜”

-고전 번역은 어떤 작업인가.


“고전 번역을 하려면 우선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다이아몬드를 캐내기 위해 광산의 지질조사를 하는 게 ‘문헌 조사’다. 광맥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낸 다음 광석을 캐내야 하는데 그 작업이 ‘원전 정리’에 해당한다. 수많은 자료 중에 필요한 자료를 선별해서 정리하는 작업이다. 캐낸 돌덩어리들을 제련하는 것은 ‘번역 과정’이다. 1차 제련만으로는 불순물이 섞여 나오기 때문에 2, 3차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에 알맞은 내용을 뽑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재가공하는
2, 3차 번역 과정을 거친다.”

-고전을 꼭 배워야 하는가.

“고전은 시간의 터널을 뚫고 온 지혜다. 과거에는 지혜라고 인정받았더라도 10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500년, 1000년, 2000년의 역사를 뚫고 온 지혜들은 인류 모두에게 통용되는 삶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붕새가 구만리 상공에서 내려다본 삶과 인간이 고작 몇 미터 위에서 내려다보는 삶은 큰 차이를 가질 것이다. 인생 역시 지혜를 얻으면 여유가 생기고 폭넓게 보는 힘이 생긴다. 바로, 고전이 주는 힘이다.”

-고전 번역 현대화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화두인 핵발전소 설치 문제를 예로 들어 보면 핵발전소를 존치해야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크게 갈렸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미 조선시대에 결론이 난 부분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연재해와 천문 현상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여기에 이미 ‘핵발전소를 설치하면 안 되는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지진에 관한 기록은 너무나도 상세하다. ‘담이 쓰러졌다’, ‘닭이 놀라서 도망갔다’ 등 각 고을에서 보고한 내용만 갖고도 지진의 진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이 기록을 토대로 지진 보고가 많이 들어온 경상좌도
(경북 지역)는 지질조사를 하지 않아도 위험요소가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대가 기록을 남겨줬음에도 후대인들이 이를 고려치 않고 핵발전소를 지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고전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도 연결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명한 근거다.”

-고전을 등한시하는 분위기에 안타까움이 있나.

“그렇다. 우리 사회의 고전에 대한, 고전 번역에 대한 인식 부족에 안타까운 부분들이 있다. 속도감이 빠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행복이다. 이렇게 사회가 빠르게 변할수록 고전의 지혜를 통해 멀리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동안 등한시해 온 고전을 익히면 행복을 찾는 길이 의외로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고전을 단순히 고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고전의 울림을 지금의 삶에 반추해 접목해야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추천할 만한 우리 고전이 있나.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 <성학집요(聖學輯要)>란 책이 있다. 1575년 선조에게 제왕의 학문 내용을 정리해 바친 책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순서로 성군이 돼 조선을 태평한 세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제왕을 위해 지은 책이지만 사실은 대부분 일반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성인이 갖추어야 할 배움의 모든 것을 담음으로써 당대는 물론 현대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고전은 시간의 터널을 뚫고 온 지혜”

-고전번역원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한국고전총간(고전문헌 집대성)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총 2만9000여 종으로 추산되는 한국 고전서적은 경학 관련 서적인 경부(經部), 역사책인 사부(史部), 학술과 사상에 관한 책인 자부(子部), 개인 문집인 집부(集部)로 분류된다. 그중 경부 4.0%, 사부 34.9%, 자부 14.2%, 집부 40.3%의 분포를 보이는데 현재 집부만 정리가 끝난 상태다. 올 연말쯤 1차년도 사업인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사업이 마무리될 것이다. 원본에 목차를 붙인 영인본과 국제적인 표점 부호까지 붙인 표점본을 함께 간행하는 사업이다. 이 한국고전총간 사업은 중국의 역대 문헌을 집대성한 사고전서 편찬 사업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국가적 사업이므로 정부와 학계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본원이 각 지역 대학의 거점연구소와 함께 수행하고 있는 협동 번역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번역뿐 아니라 고전과 관련한 인문학 중심 센터로의 거점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다.”

이규옥 본부장은…
사학과를 졸업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문교육과정을 마치고 <홍재전서>,
<임하필기>와 <태조실록>, <인조실록>, <정조실록> 등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번역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3호(2019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