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와 부귀를 탐했던 이사의 일생

치욕스런 궁형(宮刑: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후세의 사람을 위해 묵묵히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 ‘이사열전’은 진나라 승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린 이사(李斯)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이사는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서 법치사상을 강조한 순자(荀子)의 제자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고는 출세를 위해 과감히 진나라로 갔고, 진왕에게 당시의 국제 형세를 파악해 정책을 올리며 차츰 인정을 받아 벼슬이 날로 높아졌다. 이때 진나라에서는 외국인 등용을 배척하는 ‘축객령(逐客令: 외국에서 온 관리를 몰아내는 법령)’이 내려져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이사는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반대 상소를 올려 왕의 신임을 얻는다.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 이사는 진왕을 설득해 전국을 36개 군현으로 나누었다. 이에 대해 순우월은 분봉제를 주장해 진시황의 격노를 샀고, 진시황은 이사로 하여금 순우월을 처리하게 했다.

이사는 순우월이 옛것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경향은 고서(古書)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진시황에게 건의해 역사상 가장 악독한 정책인 ‘분서(焚書)’를 실시하게 된다. 의약, 무술, 원예, 점술 등 일부 실용 서적만 남겨 놓고 사서와 시, 서, 백가 등 주요 저작을 모두 불태웠다. 또한 분서를 한 2년 뒤에 함양의 유생 460여 명을 산 채로 매장하는 이른바 ‘갱유(坑儒)’를 단행했다.

당시 진시황을 수행했던 사람 중에는 이사와 진시황의 아들 호해(胡亥), 그리고 호해의 스승인 조고(趙高)가 있었다.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에게 충성 경쟁을 하던 이사는 결국에는 조고의 모함에 걸려 얼굴에 문자를 새기는 형을 받은 데 이어 코가 잘리고 두 발이 잘렸으며, 다음 목이 잘리고 마지막으로 허리가 잘리는 요참을 당했다. 이사의 일생은 일찍이 스승인 순자가 염려한 대로 자신의 권세와 부귀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절제하지 못한 결과였던 것이다. 물론 진나라는 얼마 가지 못하고 망했다.

이를 결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만으로 볼 것은 아닌 듯하다. 사마천이 피눈물을 흘리고 기록한 것도 후세 사람들이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Book&Life] 권력 말기에 나타나는 패망의 징후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백록피’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광이 쓴 중국의 역사책으로 주나라 때부터 후한 이후 위·촉·오 삼국시대까지 약 1300년간의 중국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근년에 권중달 교수에 의해 32권으로 완역된 이 역사서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총선이 있고, 연말에는 대선이 있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지도자가 자신은 물론 주변의 친인척, 그리고 비서 등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뒤따른다. 권력 주변의 비리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특히 정권 말기에 나타나는 부패의 징후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 <자치통감>에 부패한 권력의 주변에서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갈취한 이야기가 있다.

중국 한나라 무제 때에 안이(顔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청렴 강직해서 재정을 담당하는 대농령(大農令)이라는 높은 관직까지 올라갔다. 당시 한 무제는 제후들의 재물을 뺏으려고 흰 사슴의 가죽을 네모 반듯하게 잘라 40만 전의 가치를 지니는 백록피(白鹿皮)라는 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후들이 매년 황제에게 조하(朝賀: 경축일에 신하들이 황제에게 나아가 인사드리는 일)할 때 이 백록피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선물을 바치게 했다. 이에 대해 우직한 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했다.

“오늘날 왕후(王侯)들이 조하하면서 올리는 벽옥(碧玉)은 수천 전에 지나지 않은 데 비해, 백록피는 무려 40만 전이나 됩니다. 그런데 벽옥을 올리기 위해 이 백록피를 깔게 하는 것은 본말이 맞지 않습니다.”

터무니없이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대한 안이의 이러한 진언은 지극히 옳은 말이다.



권력 주변의 비리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특히 정권 말기에 나타나는 부패의 징후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



‘입을 삐죽 내민 것’은 ‘마음속으로 비방’한 증거

옳은 말이긴 하지만 이 말에 기분이 상한 무제는 마침 어떤 사람이 다른 사건으로 안이를 고발하기에 반대파인 장탕(張湯)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장탕은 이때다 싶어 안이의 비리를 샅샅이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안이의 죄를 찾기 어려웠는데, 예전에 무제가 내린 어떤 명령에 ‘반순(反脣: 입술을 삐죽 내밈)’한 적이 있었다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이것은 ‘복비(腹誹: 마음속으로 비방함)의 증거’라며 죄목을 만들고, ‘황제의 명령에 입을 삐죽 내민 것은 마음속으로 황제를 비방한 분명한 증거’라고 주장해 사형에 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지만 정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런 죄목도 서슴지 않고 만들었다. 장탕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옭아매 죽였지만 자신도 부하에게 모함을 받아 결국에는 자살하게 된다. 남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씌우면 자신도 억울하게 모함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권력이 바뀌어도 이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정적을 죽여서는 안 될 일이다.



범의 위세를 빌린 여우

얼굴 두꺼운 정치가들은 유력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뽑아 벽에 붙여놓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유력자와 친한 모습을 보여 스스로도 유력자임을 알리는 방법이다. 또 이러한 정치가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기꾼들도 많다. 이것은 호가호위(狐假虎威), 즉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을 말한다. 최근에 권력자의 비서들이 추악한 비리로 수사를 받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는데, 권력자들은 이것은 자신의 손발이 한 일이라 자신은 모른다고 하지만 이 말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옛날에도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권력자의 하인을 이용해 출세한 맹타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특히 이러한 사례가 두드러지는데, <자치통감>에도 후한 말에 부풍 출신으로 양주 자사가 된 맹타(孟陀)의 이야기가 있다.

후한 환제가 후사가 없이 죽자 당시 실권자인 외척 두무(竇武)가 태후와 의논해 영제(靈帝)를 황제로 세웠고, 영제를 이은 다음 황제가 헌제(獻帝)로서 이 황제 때 400년을 이어온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와 유비와 손권이 다투는 삼국시대가 열린다. 두무가 환관들과 손을 잡고 권력 중심에서 판을 칠 때 장양(張讓)이란 환관은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노복의 우두머리인 감노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이 노복의 위세 또한 대단했다.

맹타는 많은 재산을 풀어 이 노복들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아무리 자기 주인이 권력을 휘두르기는 해도 일개 노비 신분인 자신들이 양반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으니 이에 감복한 노비들은 어떻게 하면 그 보답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맹타는 “너희들이 나에게 절이나 한 번 하면 좋겠다”는 너무나 간단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어느 날 맹타가 장양의 집에 당도했는데, 그날도 역시 장양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맹타가 도착하자 노복 우두머리인 감노가 노복을 거느리고 나와서 맹타에게 절을 하더니 함께 수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 일로 인해 맹타가 장양과 대단히 친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장양에게 가기 전에 먼저 맹타에게 뇌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맹타는 이 뇌물 가운데 일부를 장양에게 갖다 주면서 장양과 교제했고, 그 결과 맹타는 양주 자사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런 노복을 둔 장양의 책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지도자는 중요하기에 올해 치러지는 선거에서는 친인척과 비서 등을 잘 다스리는 훌륭한 사람이 뽑히기를 기대해 본다.



일러스트·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