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조암에는 526체의 나한이 있다

거조암(居祖庵)은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은해사(銀海寺)에 소속된 한 암자다. 이 절에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앞산의 암석을 채취해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1기(基)가 있다. 얼마 전에 이 절을 다시 찾을 기회가 있었다.

거조암의 가장 중요한 곳인 영산전에는 526체의 나한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 본존불의 모습은 장엄하지만 어딘가 이국적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이 나한상들은 너무나 소박하고 친근감이 가는 우리네 이웃 아저씨 풍모를 보이고 있다. 나한상들은 다른 불교 조각과는 달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거조암 영산전에 있는 526체의 나한상은 하나하나의 표정과 자세가 다르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것이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보통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라고 해 탱화로 그려 불상 뒤에 걸어 놓는데, 이 거조암 영산전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광경을 실제 모형으로 만들어 입체적으로 연출해 보이고 있다. 526체의 나한은 부처의 10대 제자와 16나한, 그리고 500나한을 합한 것이다.
[Book & Life] 우팔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부처의 10대 제자

부처가 설법하는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려면 부처의 일생을 쉽게 기록한 법륜(法輪) 스님이 쓴 ‘인간 붓다’를 읽으면 좋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뒤 부처님은 포교의 길을 나섰다. 부처님은 마가다국의 우루벨라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불을 섬기는 사화외도(事火外道)인 카샤파(가섭) 3형제가 1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큰 세력으로 있었는데, 부처님은 이 카샤파 형제를 설복해 제자로 삼고 교단을 형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화활동을 펴는 데 필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부처는 이렇게 마하가섭존자를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크게 교세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대가섭존자는 부처의 10대 제자 중에서도 으뜸가는 제자로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너무나 유명하다.

대가섭존자와 함께 부처의 10대 제자는 다음과 같다.

지혜제일 사리푸트라(사리불), 신통제일 목갈라나(목건련), 두타제일 마하카샤파(대가섭), 천안제일 아니룻다(아나율), 공해제일 수부티(수보리), 설법제일 푸르나(부루나), 논의제일 카트야나(가전연), 지계제일 우팔리(우바리), 밀행제일 라훌라(라후라), 다문제일 아난다(아난타).

석가모니는 이러한 10대 제자를 차례로 받아들임으로써 확고한 승단을 구축해 기반을 확립했다. 이 10대 제자 중에서도 특히 우바리존자의 귀의 일화와 부처의 말씀은 너무나 큰 감동을 주고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본다.



부처는 현재의 계급은 태어난 후 그렇게 길들여진 결과일 뿐 출생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지 않음을 인과론으로 설파해 당시에 사회를 지배하던 강력한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사회구조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바다에 이르면 강 이름은 없어진다

부처의 사촌 동생 일곱 명이 부처에게 감화돼 출가를 결심하고 왕가의 시종이자 이발사인 우팔리(우바리존자)에게 머리를 깎고 온몸의 보석과 장신구를 모두 우팔리에게 주었다.

우팔리는 부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기에 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왕자들보다 한 걸음 먼저 부처를 찾아가 자신과 같은 미천한 사람도 출가할 수 있는지를 묻고 부처가 이를 승낙하자 그 길로 바로 제자가 됐다.

일주일이 지난 뒤 머리를 깎은 일곱 왕자가 법도에 따라 선배들에게 차례로 절을 하다가 자신들의 머리를 깎아준 우팔리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세속의 가치관이 남아 있는 그들로서는 일주일 전만 해도 자신들의 시종이었던 수드라 계급(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의 최하위 계급)의 우팔리에게 절을 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10대 제자 중 유일하게 우팔리는 하층민이었다.

부처는 멈춰선 왕자들에게 엄하게 질책했다.

“너희들은 왜 주저하는가. 세속의 귀천을 떠나고 아만(我慢: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을 꺾은 자만이 승단의 형제가 될 수 있느니라. 너희보다 먼저 출가한 우팔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일곱 왕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우팔리에게 예를 올리자 부처는 여러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강이 있어서 갠지스강, 야무나강, 아지라파디강, 사라푸강, 마하이강이라고 불리지만, 그 강들이 바다에 이르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바다라고만 일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단 법과 율에 따라 발심하고 출가해 불법에 이르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중(衆)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부처는 현재의 계급은 태어난 후 그렇게 길들여진 결과일 뿐 출생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지 않음을 인과론으로 설파해 당시에 사회를 지배하던 강력한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사회구조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성자가 된 이발사, 우팔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큰 지혜를 얻는다. 거쳐 온 강물과 같은 온갖 과거를 지나 이윽고 오늘의 진리의 바다에 이르게 되면, 모든 물이 하나로 통합되고 평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바닷물에서 과거의 강물을 따지고 구별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의 이 설법은 카스트 제도의 타파와 함께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밝혔다는 데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종종 바다를 ‘진리의 바다’, ‘깨달음의 바다’, ‘해탈의 바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의 바다에 도달해 바다의 풍랑이 잠자면 즉 번뇌가 사라진 마음에는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해인사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16나한과 500나한

아라한(阿羅漢)의 약칭인 나한(羅漢)은 불제자 중에서 번뇌를 끊어서 인간과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로 가장 높은 지위의 성자(聖者)를 말한다. 특히 16나한은 석가모니의 명령으로 일정 기간을 세상에 있으면서 교법을 수호하겠다고 서원(誓願)한 부처의 제자 열여섯 사람을 말한다. 16나한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빈도로존자, 가락가존자, 가나가벌리존자, 소빈타존자, 낙구라존자, 발타라존자, 가리가존자, 벌도라불다라존자, 계박가존자, 반탁가존자, 나호라존자, 나가서나존자, 인갈나존자, 벌나파사존자, 아벌다존자, 주다반탁가존자.

그리고 500나한은 석가여래가 입적한 뒤 그의 가르침을 결집하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들을 말한다. 여기서 ‘결집(結集)’이란, 자격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말씀으로만 전해지던 불전(佛典)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말하며, 제1회 결집은 석가모니의 입멸 직후 500명의 유능한 비구들이 라자그리하(王舍城) 교외에서 대가섭의 주재로 열렸다. 우팔리가 율(律)을, 아난다가 경(經)을 그들이 듣고 기억하는 대로 외우고,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받아 확정했다고 한다.

거조암에는 우리 동네 이웃 아저씨처럼 수수하고 친밀하게 생긴 526체의 나한님들이 있고, 그 이름은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제1법해존자, 제2전광존자, 제3광명존자, 제4양명존자, 제5해참존자,

…(중략)…

제497이엄존자, 제498월신존자, 제499시원존자, 제500무량의존자.



일러스트 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