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곳이 아니면 떠나는 순수한 사람, 백이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맹자(孟子)’의 만장장구하(萬章章句下)에는 백이, 이윤, 유하혜, 그리고 공자를 비교하는 유명한 글이 있다.

맹자는 먼저 백이를 말한다.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나쁜 빛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며,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여,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혼란하면 물러가서, 나쁜 정사가 나오는 곳과 나쁜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차마 거처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이는 그 유명한 ‘백이숙제’의 그 백이다. 중국 은나라 말, 주나라 초의 전설적인 사람으로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 아우 숙제에게 왕위를 물리겠다는 뜻을 남기자, 숙제는 형을 두고 왕이 될 수 없다고 형에게 사양하고 백이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고 서로 양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형제는 고죽국을 떠나 주나라 문왕(文王)을 찾아가 신하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막상 찾아가 보니 문왕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殷)을 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두 형제는 무왕에게 도덕에 어긋나다고 충고했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해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그것조차 주나라 땅의 것이라 해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까지 청빈하고 도덕적인 사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사람으로서 가장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기란 지극히 어렵다.
공자의 수시처중은 오늘날의 상황적합이론과 흡사하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어느 하나로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정해 최적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공자의 수시처중은 오늘날의 상황적합이론과 흡사하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어느 하나로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정해 최적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훌륭한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이윤

맹자는 이어 말한다.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어느 사람을 섬기면 군주가 아니며, 어느 사람을 부리면 백성이 아니겠는가’하여 세상이 다스려져도 나아가며 혼란해도 나아가서, 말하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낸 것은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뒤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쳐주며, 선각자로 하여금 뒤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니,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 선각자이니, 내 장차 이 도(道)로써 이 백성을 깨우치겠다’하였다.”

맹자가 두 번째로 든 인물 이윤은 하(夏)나라의 걸(桀)왕이 매희(妹喜)라는 미녀에 빠져 폭정을 일삼자 탕(湯)왕을 도와 걸을 몰아내고 혁명을 이루었던 어진 재상이었다. 이윤의 이러한 혁명에 대해 맹자는 그 유명한 ‘혁명론’을 편다.

덕이 없는 군주는 더 이상 왕일 수 없으므로 난폭한 군주를 제거하는 것은 ‘한 남자를 제거하는 것일 뿐’ 군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로 혁명을 정당화했다. 이윤은 탕왕이 죽은 뒤에도 아들, 손자 대까지 계속 왕을 섬겼으며 탕왕의 손자인 태갑(太甲)을 섬길 때 태갑이 할아버지 탕왕이 세워놓은 법도를 외면하고 포악한 짓만 일삼자 그를 내쫓고 스스로 왕의 일을 맡았다가 3년 뒤에 태갑이 뉘우치자 다시 그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그를 보좌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윤은 엘리트 지도자로서 자임하고 훌륭한 왕을 내세우고 보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왕을 바꾸면서까지 선정을 이루고자 한 적극적인 참여파 인물로 평가된다. 역사 속에는 이윤처럼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윤처럼 권력을 다시 되돌려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유하혜

맹자는 또 이어 말한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군주를 섬김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작은 벼슬을 사양하지 않으며, 나아가면 어짊을 숨기지 아니하여 반드시 그 도리대로 하며, (벼슬길에서)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으며, 향인들과 더불어 처하되 유유하게 차마 떠나지 못해서 말하기를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 (네가) 비록 내 옆에서 옷을 걷고 벗는다한들 네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 하였다.”

맹자가 세 번째로 든 인물 유하혜는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때의 현자다. 성은 전(展), 이름은 획(獲)으로 유하(柳下)에서 살았으므로 이것이 호가 됐으며, 혜(惠)는 시호다. 노나라의 대부 유하혜는 세 번이나 면직을 당했는데도 노나라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백성을 걱정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 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군자에게는 두 가지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나라에 옳은 도가 없는데도 귀한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옳은 도가 있음에도 천하게 사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은 난세입니다. 세 번을 면직당하고도 떠나지 않는 것 역시 치욕에 가깝습니다.”

그러자 유하혜는 말한다. “떠도는 백성들이 해악으로 빠지려 하는데 내가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또 저들은 저들이고 나는 나요. 저들이 비록 백성을 괴롭히지만 어찌 나까지 더럽힐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하며 유하혜는 끝까지 자신이 처해진 현실을 버리지 않았다. 유하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유하혜가 밤에 성문 앞에서 유숙하는 집 없는 여자를 만나게 됐는데, 그 여인이 얼어 죽을까 걱정이 돼 그 여자를 안고 자신의 옷으로 감싼 채 하룻밤을 앉아 있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철저하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비굴해 보일 정도로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여러 직을 맡았고, 남과 화합하고 남의 의견을 수용하고 풍속을 따랐으며 무리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수시처중하고 집대성한 공자의 위대성

맹자는 앞의 세 사람의 예를 들고 나서 마지막으로 공자의 예를 들었다. “공자(孔子)께서 제(齊)나라를 떠날 적에 (밥을 지으려고) 쌀을 담갔다가 (서둘러) 건져 가지고 떠나셨고, 노(魯)나라를 떠날 적에는 말씀하시기를 ‘더디고 더디다, 내 걸음이여’라고 하셨으니, 이는 부모국을 떠나는 도리다. 속히 떠날 만하면 속히 떠나고, 오래 머무를 만하면 오래 머물며, 은둔할 만하면 은둔하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한 것이 공자이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백이는 성인(聖人)의 맑은(淸) 자요, 이윤은 성인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의 화(和)한 자요, 공자는 성인의 시중(時中)인 자이시다. 그래서 공자를 집대성(集大成)한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의 세 사람 즉 백이나 이윤이나 유하혜는 모두 어떤 한 측면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따르기 힘든 위대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공자는 이러한 위인의 특성을 두루 갖추어 크게 이루었고(集大成), ‘때에 따라 그때그때(隨時) 중용의 처신을 하는(處中)’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성균관의 전각을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자의 이러한 수시처중(隨時處中)은 오늘날 상황적합이론(contingency theory)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어느 한 가지로 고착돼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정해 최적의 해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훌륭한 지도자는 많다. 얼마 있지 않아 실시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라. 어느 사람은 청렴해 보이지만 국민 생각에 소극적인 듯해 보이고, 어느 사람은 스스로 자임해 적극적이지만 독단적인 면모가 보이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든 국민의 마음만 얻으려고 포퓰리즘에 빠져 있어 보인다.

앞에서 본 백이나 이윤이나 유하혜와 흡사하지는 않은가. 모두가 나름대로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특성을 고루 갖추고, 때에 따라 적절하게 국민의 여망을 통합하고 조정하며 ‘집대성하고 수시처중’하는 위대한 지도자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일러스트 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